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돈과 신뢰.
세상에서 가장 매치되기 힘든 위험한 두 단어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두가지를 함께 두고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관계는 완벽하다.
기리노 나쓰오의 2002년작, <아웃>을 쓰고, <부드러운 볼>을 쓰고, <그로테스크>를 쓰기전에 썼던
<다크>를 요약하는 가장 함축적인 말은 "돈"과 "신뢰"이다.
<다크>에서 등장인물들은 고작 몇백만원 되는 돈에도, 오랫동안 쌓아온 우정을, 사랑을 배신해버린다.
애초에 그들에게 얄팍하고 차가운 공생관계는 있었을 지언정, 신뢰가 바탕에 깔린 끈끈한 정은 없었던 것처럼.
 
사립탐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여자 무라노 미로는 마흔살이 되면 죽기로 한다.
마흔살이 되려면 2년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녀의 삶은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에 쫓기고 있다.
엄마, 남편, 사랑했지만 자신이 배신했던 남자-모두 죽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꿋꿋히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많은데, 미로는 왜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을까.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믿지도 못하는 자신의 삶에 지쳐버린걸까.
여기서 그치면 참 다행이겠지만, 미로는 혼자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소녀시절까지 조금 무뚝뚝한 부녀관계라고만 믿고 있었던 자신의 의붓아버지를 죽일 생각을 한다.
 
의도는 했지만,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의붓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한 결과 살인이 아닌 살인을 하게 되어버렸고,
마흔살까지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미로는 현장에서 도망쳐버리고,
장면을 목격(?)한 의붓아버지의 내연의 처가 죽이겠다고 미로를 찾아나선다.
의붓아버지와 친한 동료였던 대만 출신 야쿠자 데이 역시 다른 이유에서 미로를 찾아나서기 위해,
한때는 미로의 친구였던 게이 도모베를 구슬려 시각장애인 여자, 야쿠자, 게이-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은 미로를 쫓기 시작한다.
미로는 도망칠 곳을 찾아 거리를 헤메이다가 한국인 여권브로커 서진호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부산으로 도피하게 된다.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답게도 처음부분과 끝부분이 전혀 달라,
읽으면서 예상할수 없게도 만들면서 차츰차츰 변질되어가는 소설이다.
추악한 거리, 온통 괴이하도록 낯선 사람들, 하지만 차마 부인할수 없게 만드는 인간의 독-
기리노의 소설들이 늘 그렇듯이 암흑과 절망, 폭력과 독기로 가득차있으면서,
한가지 결과나 반전을 미리 정해놓고 쓰는 것 같지는 않은 즉흥성의 놀라움이 낯설게 읽는 내내 밀려온다.
 

인터뷰에서 기리노 나쓰오는 세상은 점점 희망이 없어질거라 말한다.
그리고 그 얘기를 자신의 딸에게도 해준다고 했다.
이 암흑과 불결한 독기로 가득찬 도시의 추격전을 바라보면서,
인간이란 참 믿을만한 존재가 못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가 이야기 했던 희망없는 미래는 이 소설에서 볼수 없었다.
어쩌면 진짜 세상에는 원대한 포부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품고 있는 사람은 이미 못말리는 몽상가일지도 모른다.
그런 원대한 포부따위는 어찌되든 상관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미래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무언가 있지 않은가.
"네가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어."하는 소망들.
가끔은 누군가에게 요구받으므로써, 상대방을 들뜨게 하는 그런 소망들-그것이 희망이 아니라면 과연 뭘까.
마흔살이 되면 죽겠다던 미로는, 누군가를 만나 더 살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결심에 도장이라도 찍듯이, 아이를 낳기로 한다.
돈에 배신당했고, 돈때문에 누군가를 배신했던 여자-이 비열하고 간악한 여자는 사랑을 하고나서 변한다.
믿고 있는 사람이 있고, 보이지는 않아도 또 언제가 될지 몰라도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겠다는 결심을 하는 이런 것이 희망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사람들이 있고, 그중에 특별히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세상은 완전히 암흑은 되지 않는다.
인간의 미래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한번쯤 얘기해본적이 있던가.
"날 믿어,제발"이라고.
기억이 나지 않아서, 언젠가 한번쯤 해보기로 했다.
정말로 믿을수 있게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초반부터 술술 잘도 읽혔던 책이고, 끝까지 도대체 얘기의 끝이 뭘까 궁금해하면서 열렬히 봤긴 하지만,
다 읽고나니 아쉬운 점이 많은 소설이었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까지, 미로가 의붓아버지를 죽이려했던 정확한 이유를 감을 잡지 못했다면
내가 너무 둔한걸까.
전체적으로 기리노 나쓰오의 다른 소설들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는데,
이것이 "미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 소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기리노 나쓰오의 모든 소설중에서 가장 정통 하드보일드에 가까운 소설이 아닐까도 싶고...
 
이 책은 칼보다는 닿지 않을지도 모르는 먼 거리에서 쏘아진 총알같았다.
비정하고, 투박하고, 한편으로는 애틋한-. 
 

p.s 책을 들추다가 깜짝 놀랐다. 표지의 여자와 그 뒷편에 인쇄된 기리노 나쓰오가 너무 닮아서...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그다지 마음에 드는 표지가 아니어서,
겉포장을 무척 따지는 편인 나같은 얄팍한 독자는 그 점이 역시 아쉽다.
종종 오타가 나있거나, 따옴표 표시가 잘못되어있는 부분이 많이 보여서 편집 완성도 역시 아쉽다.
 
p.s 2. 생각보다 많이 우리 나라가 등장하고, 그중에서도 부산이 소설의 주무대라고 할수 있는데,
내가 서울에서만 살아서일까, 아니면 다른 나라소설이라서일까,
책 읽는데 왜 부산도 외국같이 느껴지는건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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