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들고 달리기
어거스텐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시공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열세살 어거스텐의 부모는 지나치게 사이가 나빠서 만나면 즉시 싸우기 시작하는데,
이 싸움의 강도라는 것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부부싸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개..."라던가 "쌍..."라던가 하는 욕이 난무하고 집안이 부숴질 것 같으며, 정신적으로 나약한 어머니는
급기야 미쳐버려서 양초에 불을 켜는 대신 먹어버리지 않나, 남편이 자신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득차게 된다.
아들을 꽤나 생각하는 듯 하지만 책임질 생각은 전혀 없는 정신병자 어머니,
애초에 책임감 같은 건 없다는 듯, 자식에게 냉담한 알콜중독자 아버지.
얼마나 대단한 환경인가.
이런 환경에 비하면, 어거스텐이 학교를 가고싶어하지 않는 13살짜리 게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평범하기마저 하다.
 
아버지가 자신과 아들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과대망상에 부푼 어머니는
어거스텐을 평소 의존하고 있는 정신과의사 핀치 박사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리고 후에는, 자식도 물건처럼 누군가에게 양도할수 있는 것처럼 핀치 박사에게 아들을 버린다.)
정신병자인 어머니 보다 더 정신이 나가있는 정신과의사 핀치 박사.
갈 곳 없는 정신병자들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무척 관대한 의사로 보이지만,
그건 허울일 뿐이고, 그렇게 양자로 받아들인 정신병자들에게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방치한다.
핀치박사는 건강한 분노 표출이 정신병 예방에 좋다면서,
딸들이 서로 험악한 말을 내뱉으며 죽일듯이 싸워도 내버려두고.
집안은 온통 쓰레기장에, 집안 사람들은 "개...."라던가 "쌍..."라던가 "ㅈ같은..."같은 말이 붙지않으면
대화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누구도 어거스텐에게 무언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 곳의 어른들은 열세살짜리아이보다 미쳐있으며, 자신을 책임지기에도 벅차
어거스텐은 열세살 어린 나이부터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며, 서른살이 넘은 남자와 연애를 하고,
애초에 모든 것을 갖춘 백인으로 태어난 것같은 (빌) 코스비의 딸에게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학교가 가기 싫어져서 휴학을 하기위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물론 죽을 마음은 없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어거스텐의 성장기를 다룬 <가위 들고 달리기>.
작가의 이름을 눈여겨봐두는 센스가 있는 독자라면 알겠지만, 주인공 어거스텐은 소설가 자신이다.
자신의 지난 과거를 바탕으로 써내려간 자전적인 소설이란다.
소설이라면 웃을수 있지만, 현실이라면 결코 웃을수 없는 상황과 인간들이 속출한다.
과연 이 소설의 어디가 픽션이고, 어디가 논픽션일까. 어디를 보든 거짓말같은 현실이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가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으나, 외면하고 싶어하는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온통 충격적인 이야기뿐이라 거의 두들겨 맞거나 한바탕 욕설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지만,
책을 보는 내내 키득대면서 많이도 웃었다.
폭력적이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쿨함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소설이라,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쾌하며 밝다.
그러니까-밝으면서 암울하다.
악질적인 것, 기분나쁜 것, 상처받을 만한 것을 대놓고 우스꽝스러운 연출을 하거나 비웃어버리는
블랙코미디를 영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 농담이 지나치게 독기넘쳐 불편할만한 소설이지만,
나는 착한 농담보다는 삐뚤어진 농담을 좋아하므로 소설속의 악질적인 농담을 공감하며 웃을수 있었다.
주인공 어거스텐의 일어난 사건에 뛰어들기보다는 멀리서 지켜보는 방관주의자적인 면모와
내면의 삐뚤어짐이 나와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엉망진창인 세상을 살아왔던 어거스텐이 더 나쁜 길에 빠질수 있는데도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 노력했고 꿈을 꾸고자 했고, 뉴욕으로 가 소설가로 성공할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책임감없고 변덕스러운 레즈비언에, 자식을 버리기까지 하는 얄미운 엄마 때문도,
자유방임이 최고라 생각해 지나치게 자유방임해버린 나머지,
대책없는 분노덩어리를 양산해 내는 핀치 박사 때문도 아니다.
핀치 박사의 집에서 어거스텐이 얻은 유일한 교훈은 "내일은 내가 알아서-"였을 뿐이었다.
어거스텐은 비록 굴절된 내면을 가졌어도, 자기파괴를 일삼거나 비관주의에 빠져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어난 것을 어떻해-세상이 이런 걸 어떻해-어쩔수 없잖아-하고 태생적인 불행은 포기하고
미래를 꿈꾸었고, 자신을 단련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정신은 똑바른 아이였기 때문이다.
만약 무언가를 고치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면 어거스텐 역시 망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종종 냉소적인 것과 비관주의를 같은 것으로 본다.
두개는 완전히 다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냉소적인 사람은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비관주의에 빠질만큼 성의있게 세상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깊이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고, 슬쩍 비웃고 방조해버리는 게으름이
상황에 감정적으로 빠져들어 자신을 소진하고 망가뜨리는 것과 어떻게 닮을수가 있단 말인가.
종종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비관적이라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어거스텐을 비관주의자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사에 그다지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방조하는 편이 더 잘 어울린다.
우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멀쩡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사람들이 어떻게 미쳐가든, 무엇이 우리를 찢어 할퀴든-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의 인생과 꿈이 있으니까 앞으로도 살아나갈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인생은 어두운 암흑이지만,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