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큐리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아멜리 노통브 소설들을 천천히 끄적대다 보니,
함께 읽은 <머큐리>와 <공격>은 어쩐지 비슷한 느낌을 주는 한편의 시니컬한 동화같은 소설들이었고,
이전에 읽었던 아멜리 노통브 소설들의 특징에서 좀 벗어나 있으나
여전히 노통브 특유의 말싸움 대결은 주구장창 이어지고 있는 소설들이었다.
 
<미녀와 야수>의 고딕판 같은 느낌을 주는 머큐리는 한 부유한 (전직) 선장의 섬에서 시작된다.
선장 오메르는 폭격에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채 얼굴이 망가진 하젤을 양녀로 삼아
육지에서 고립된 섬에 같이 살고 있으나, 이제 곧 23살이 되는 하젤과 이제 곧 77세가 되는 선장 오메르의 관계는
단지 양녀와 양부사이만은 아닌데...
몸이 좋지 않은 하젤을 간호하러 육지에서 섬으로 건너온 간호사 프랑수아즈는
섬에 도달해 외로움에 지쳐있는 하젤의 이야기를 듣다가 둘 사이의 폭력적인 관계를 눈치채고
하젤을 구하기 위한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이 책은 독특하게도 두가지 결말을 준비해놓고 있다.
다소 평범하게 이야기가 끝나는구나..했다가, 아멜리 노통브가 덧붙여놓은 또다른 한가지 결말에서
나는 알수 없는 통쾌함과 어이없음에 한참을 웃다가 잠잘 시간을 놓쳐버렸다.
섬에 갖힌 미녀, 미녀를 감금해 놓고 삐뚤어진 애정을 과시하는 남자, 그리고 섬에 갖힌 미녀를 구하려는 또다른 미녀.
고딕적인 요소와 함께, 동성애적인 코드, 아멜리 노통브 다운 시니컬하다못해 악의적이기 까지 한
등장인물들의 대사들, 신랄하고 삐뚤어진데다가 억지논리를 그럴 듯 하게 설명하는 고집쟁이들.
동화적이고, 다소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부족한 부분은, 특유의 불꽃튀는 설전과 이상야릇한 결말로 충족시켜주고 있다. 그래서 노통브의 소설들이 언제나 그렇듯, <머큐리> 역시 짧은 이야기지만, 더러는 그 짧은 이야기조차 지루하고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머큐리>는 한편의 이상한 동화처럼 무척 흥미롭고 즐거운 작품이다.

그나저나, 아멜리 노통브가 한때 일본에 살았음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소설에 일본 이야기가 무척 많이 등장하는데, <머큐리>에도 역시 일본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떻게 이렇게 어떤 이야기든 일본이야기를 갖다붙일 수도 있는지도 신기하다.)
그녀의 소설속의 일본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사람이 일본을 사랑하는건지, 일본을 경멸하는건지
제대로 알수가 없단 말이야...
어떨 때는 꽤 많은 부분에서 일본식의 사고방식이 드러나는데다가 그러한 문화코드 자체를
신비롭게 여기는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떨 때는 신랄하게 비난하고 비꼬고 만다.
혹시 이런 것이 노통브 자신의 일본에 대한 애증의 감정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식의 탐미주의에 아멜리 노통브가 꽤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소설들이 바로 <머큐리>와 <공격>이었는데,
이마저도 이런 삐뚤어진 탐미주의를 옹호하는건지 경멸하는건지는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p.s 미치고 팔짝 뛰는 답답하고 짜증스러운 상황이나 사고방식을 만드는데 있어서
아멜리 노통브를 따라갈 사람은 세상에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베이 2007-12-09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동화같은 이야기였어요~
동성애적 코드는 아멜리 노통브 소설에 조금씩 묻어 있더라구요
서평 잘 봤습니다^^

Apple 2007-12-0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공격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에 어느 순간 나는 내가 탐미주의자라는 것을 알았다.
꽤나 편식쟁이이던 어린 시절의 나는 '보기 나쁜' 그리고 '냄새가 이상한' 음식들은 절대 먹지 않았다.(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게 무슨 탐미주의와 연관이 있나 싶겠지만, 음식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면에서 그랬던 것같다. 나는 언제나 무엇이든 '보기좋은 것'을 훨씬 좋아했다.
마음이 예뻐야 진짜 미인이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냉정한 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안그런척 성인군자처럼 내숭을 떠는 것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쁘다'는 말을 그다지 하지 않는데, 동시에 '못생겼다'는 말도 그다지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보고 '예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내 마음에 찰만한 미를 가진 무언가를 만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고, 극한의 추함또한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이상에 맞춰지지 않는 이상, 아무리 예쁘고 잘생기고 아름다운 미남 미녀라도
평범한 남자,여자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최상, 아니면 그저그런 것. 극단적이지만, 내 시선은 그렇다.
그래서 나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못생겼다 해도, 어딘가는 괜찮은 구석이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모순같이 느껴지지만, 내게 있어 (내 눈에) 최상의 미가 아닌 이상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경계는 모호해서, 오히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거나 타인의 외모를 문제삼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조금 더 예쁜 사람이 그보다 못한 사람의 외모를 헐뜯는 것이야말로 우물안 개구리의 자아도취적 폭력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외모를 잡아 험담을 늘어놓거나 냉소를 던지는 것을 무척 우습게 생각한다.
그러는 자기는 얼마나 잘나서?

미에 관한 아멜리 노통브의 시선을 알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 <공격>인데, 이런 나는 그녀의 미에 관한 의견중에 꽤 많은 부분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고, 또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머큐리>와 함께 동화같은 느낌이 풍겨나는 <공격>은 <노틀담의 꼽추>의 이야기를 은근슬쩍 데려오고 있고, 세기의 추남 에피판의 입으로 '얼굴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면서, 결국 마음좋은 추녀가 아닌 미녀를 사랑한 카지모도 역시 추악한 속물'이라 말하고 있다.
그렇다. 미녀에게는 아름다운 마음까지 바라면서, 미녀를 사랑한 추남은 그 열등감과 이루어질수 없을 사랑덕에 동정을 받아야하는걸까.
결국은 모두 이왕이면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책속에 주인공 추남 에피판이 미녀에게 빠진 카지모도를 속물이라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속물근성을 노골적으로 인정하고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배우 에텔을 사랑했듯이, 여배우 에텔 역시, 사람 좋은 척, 외모같은 것은 문제되지 않는 척 하지만, 결국은 아름다움이 척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넌 좋은 사람이지만, 너랑 사귀고 싶지는 않아. 그러나 속마음은 결국 넌 못생겨서 싫어.
이런 것이 간사한 인간의 마음이다.

외면과 내면의 미에 대한 젊잖은 허위에 대한 신랄한 공격을 퍼부어대는 <공격>.
몹시 공격적이고 음흉한 냉소주의자 아멜리 노통브다운 책이다.
<머큐리>와 함께 더불어, 동화같은 이야기이자, 고전의 이야기를 살짝 가져왔고,
또 미에 대한 적나라할정도로 솔직한 그녀의 시선을 알수가 있다.
그래. 적어도 이 여자는, 내숭은 떨지 않아서 좋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베이 2007-12-09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보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
<노틀담의 꼽추>이야기를 다시 보게 됐답니다.

Apple 2007-12-09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오랜만에 아멜리 노통브 책 읽으니까 재밌네요..
 
생존자
안토니오 스쿠라티 지음, 이현경 옮김 / 낭기열라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2001년 어느 날, 졸업시험을 치르기 위해 체육관으로 오토바이 헬멧을 든 학생이 들어온다.
비탈리아노라는 이 문제아는 오토바이 헬멧에서 총을 꺼내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체육관을 지키고 서있던 교사들을 향해 총알 세례를 퍼붓는다.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세요, 선생님!"이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읊은 채 역사교사이자 철학교사인 안드레아 마레스칼키 선생만을 살려둔 채, 그는 유유히 세상밖으로 사라진다.
무차별 총기 난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안드레아에게 세상은 생존자라는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고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치욕스러운 이름을 지어주고, 온 세상은 그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안드레아에게 "어째서"냐고 일제히 묻는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앞서 커다란 죄책감과 부담을 짊어진 자, 생존자 안드레아는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질문세례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 사건을 떠올려본다.
어째서, 왜, 비탈리아노는 그 많은 교사들을 무참히 살해해버린 것일까.
절망과 죄책감에 빠져 죽음보다 못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안드레아가 살아있기 위해 반드시 찾아야하는 질문의 답을,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고통과 고독, 무기력속에서 안드레아는 답을 찾기로 한다.
과거를 돌이켜, 자신이나 학교가 비탈리아노라는 문제아에게 저질렀던 실수, 잘못된 교육, 불운한 연결고리, 그 무엇이든, 생존자로써의 책임감을 짊어지기 위해서.

짧게 이 책의 이야기를 들어도 누구나 떠올릴수 있듯이, 이 책은 올해 세상을 공포와 경악, 안타까움과 절망으로 술렁이게 만들었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안드레아의 일기와 기억의 추적으로 비탈리아노를 악마의 광기에 빠뜨리게 만들게 된 연결고리들을 아무리 찾아도, 우리는 비탈리아노가 바랬던 무지에의 계몽이 무슨 뜻이었는지, 확실히 알수 없다.
비탈리아노는 속된 말로 '노는 아이'였고, 낙제생으로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도 많았으며,
한편으로는 무척 똑똑하고 철학적이었으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멕시코에 가는 것이 꿈이었던
어쩌면 세상에 많은 그저그런 평범한 학생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에게는 소설에서처럼 변덕스럽고도 불우한 환경도, 세상을 총알로 쓸어버릴정도로 깊은 트라우마나 인생을 좌지우지 할만한 열등감이나 증오심도 없다.
비탈리아노는 스무살, 그 나이 또래의 청년들이 그렇듯, 젊은 혈기에 세상을 비웃는 건강한 증오심이 있었고, 책속의 말처럼,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는 신들이 사랑하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젊은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평범하고 건강한 젊은이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병이 든 것은 비단 이 젊은이뿐만이 아니라 어찌할 바도 모른 채 섣불리 진단내려버리는 인간세상인지도 모른다.
흔히 자주 쓰는 트라우마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새삼 궁금해진다.
똑같은 상처를 받고 살았던 사람이라도 예후는 사람마다 다른데, 인간이란 존재는 무언가를 확실히 결정짓고, 판단내리고, 그것이 진실이라 믿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던가.
언제나 세상에 통용되는 진실라는 것은, 믿는 것이 당연한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믿어야만 한다는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안드레아가 알수없어 끊임없이 고뇌하듯이,
이런 경우에도, 저런 경우에도, 이런 불행한 사건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학생들의 권익을 위해 애쓰는 자애로운 선생처럼 비치는 안드레아 역시,
또다른 자신처럼 느껴지는 비탈리아노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이래도 저래도 피할수 없었던 사실들에 절망을 했듯이.
하나를 위하자면 다수의 것이 피해입게 되고, 다수를 위하자면 하나를 완전히 절제해버려야하는 진퇴양난의 모순들속에서 교육의 의미란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무엇을 어쩌자는 것이 아니다. 완벽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생각을 좀 해보자는 것뿐.
책을 절망에 빠진 지도 모르는 모순덩어리 세상을 묵직하고 절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우리들에게 "어째서"라는 질문을 토해놓고, 애매모호하고 씁쓸하게 사라져버린다.

인간은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어째서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
어째서 사람이 자신을 지옥으로 몰아넣는지.
어째서 마음속의 악마가 깨어나는지.
그렇게나 수많은 연구를 해도, 하나의 사실로 귀결지을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생각을 가지고, 수많은 경우의 수를 살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잘못된 많은 것들을 옳고 진실되다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나도 모르겠어. 우리들 모두 알지 못해."
우리 모두 알지 못하고, 가끔 그 알수 없는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우리는 책임질수도 없고, 결론지을수 없는 허무한 무기력감에 괴로워질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합본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상수 옮김, 배미정 그림 / 신세계북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보면서 문득, 교과서처럼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곤욕스러운 일일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 생각없이 읽다가, 중간쯤 보다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 책이 논술 관련도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책 읽는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는데, 과연 교과서적인 독서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교과서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찾은 듯 주제의식 따위를 찾으며 읽는 것처럼 되었으니 수년간 반복해왔던 기계적인 교육방식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영향력을 가졌는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 교과서처럼 읽지 않을수록 즐거워지는 것이 소설의 세계.
수능과는 한참 떨어진 나이에 읽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무척 유쾌하고 재밌었다.
 
고양이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세상에 대해 다룬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느 세상에나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간군상들로, 이름도 없고 쥐도 잡지 않는 평범한 고양이의 시선에서 서서 인간이라는 족속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때, 우리는 이들에게 부러움을 느끼기도 할테고, 혐오감을 느끼기도 할테지만, 주인공이 고양이인 이상, 그런 모습들이 곱게 보일리가.
'겉멋든' 학자인 고양이 주인과 그의 잔소리쟁이 아내, 헛소리를 늘어놓는 허풍쟁이인 미학자 메이테이, 늘 요상한 연구를 하고 있는 간게츠군, 딸을 시집보낼 생각으로 이남자 저남자 재보는 아줌마 하나코.
서로가 서로를 업신여기면서도, 한구석으로는 서로를 부러워하는 인간들.
고양이가 보기에 인간은 얼마나 쓸데없는 데 온신경을 쓰고 살아가는 동물인지,
하는 짓이 하나 하나가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겉으로만 우아한 척 하는 가식덩어리들,  자세를 낮추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에 잡힌 어리석고 간교한 인간들의 마음들이 유쾌하게 그려져있다.
 
풍자소설이니 뭐니 하고 얘기를 할수도 있겠지만, 일단 재미로 읽은 소설이다보니
어쩐지 인간의 모습보다 소나무 미끄럼틀을 좋아하고, 사마귀나 매미를 괴롭히는 고양이의 모습이 더 흥미로웠고, 인간을 비꼬아놓긴 했지만, 꽤 유쾌하게 그려져있어서 분량이 꽤 되는데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읽을수 있는 책이다.
왠지 모르게 "샤바케"같은 소설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딱 그런 느낌으로 읽어나가면 즐거운 소설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세익스피어라고 불린다고 하던데, 과연 일본의 고전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베이 2007-12-02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으신거 같네요~ 나쓰메 소세키 자주 접하고 싶은 작가에요^^
그런데 <그 후>인가 이건 별로였어요-_-

Apple 2007-12-0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글쿤요..^^ <그후>라는 소설도 있었군요;;;그..금시초문..;;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토록 오만한 세살이 있을까.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스러움에 모든 것을 바칠 것이라 생각한다. 못이기는 척 애교를 떨어 자신을 사랑하게도 만들고, 자신이 너무나도 똑똑한 아이라는 것을 부모님이 알면 실망할까봐 선심을 베풀어 적당한 나이에 말문을 터기도 한다.
딱 아멜리 노통브 소설 캐릭터다운 오만하기 짝이없는 세살이 되겠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지나치게 사랑받고 자라난 아이들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줄 알았던 것같다.그래서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자기 손악위에 쥘수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이 자기 발아래 굴러가는 줄 아는, 그런 아이들이 세상에는 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되바라졌다거나, 자기밖에 모른다고 하거나, 또는 부모가 잘못키웠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타인의 마음같은 것은 이차적인 문제이다.
일단은 자신의 굶주림과 자신의 외로움, 자신의 만족감이 중요할 뿐이다.
나는 순자가 주장했던 성악설을 믿는 편인데, 바로 이런 자신밖에 모르는 소악마가
세상을 살아가며 여러가지를 교육받고 자신의 마음이 중요하듯 타인의 마음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되면서부터 이 어린 소악마들이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속의 세살짜리 영악한 주인공은 신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정착한다.
아직도 배워야할 것은 너무나도 많겠지.
이 세살짜리가 겨우 자살 비슷한 사건으로 인해 인생을 깨달았다고? 웃기는 소리.
(게다가 본인이 마치 퇴폐적 탐미주의에 심취한듯 자살사건이라 명명하는 그 사건은
타인이 보기에는 명백한 '사고'가 아니었던가.)
단지 죽음과 삶의 차이를 깨달은 것이 아닐까.
자신을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사람만이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 여기는 극단주의자인 이 오만한 세살이 먼저 깨달아야하는 것은 어린 시절 자기합리화처럼 되뇌인 삶과 죽음의 대한 겉멋든 철학보다 삶과 살아있는 것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재미의 여부를 떠나 간단히 읽기에는 술술 잘 읽히고 괜찮은 책이었는데,
읽다보니,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어쩐지 기분이 꼬여버렸다.
(나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많이 이용하는 작가들이 불편하다. 자기 삶이 마치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고 착각하는 지나친 자기애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또 하나는 소재 고갈에 대한 안일한 대처방법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공주병에라도 걸린 것 아닐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보니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지배했던 집요하기마저한 자존심 대결은 어찌보면 자신의 의견이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벽창호같은 어린 아이의 고집같았다는 느낌도 든다.
마음에 들지 않는거지. 자기 멋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과 사람이....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 한참 심취해 있다가 더이상 읽기를 포기했던 것은
'독특함'이라는 겉포장을 벗겨놓고 나니 그 이상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인 것같다.
"난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난 독특해." "난 세상에서 보기 힘든 종류의 사람이야."
자신을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의 말처럼 실소를 자아내는 사고방식이 또 있을까.
세상이 광고하듯, 아멜리 노통브는 천재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오만한데다가 공주님처럼 키워져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에 영 마음이 불편해진 한 인간일 뿐이라는 점을 본인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가가 굳이 천재일 필요가 없다는 점과
독특한 자극성같은 것은 한때 반짝하고 금새 사라질 뿐이라는 점도...
그래도 오랜만에 집어든 김에 그간 안 읽었던 아멜리 노통브의 책들을 좀 들여다봐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베이 2007-11-26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즈님~ 아멜리 노통브 다시 읽기 시작하셨네요^^
아멜리 노통브...공부끼가 좀 있긴 하죠ㅋㅋㅋ 저도 이 책 얼른 읽어봐야 겠어요~
서평 굿입니다^^

Apple 2007-11-2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오랜만에 읽었어요..흐흐..
쥬베이님 필을 받아서 오랜만에...^^
다른 소설들은 더 좋겠지요?^ㅅ^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