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상해보자. 여자와 남자의 역활이 바뀐 세상을.
이런 상상력에서 시작된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가상의 나라 이갈리아에서 사용하는 몇개의 언어를 익혀야한다.
그 사회에서 누구를 더 중심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언어들이 바뀐다.
이를테면, 영어에서 많은 단어들이 he를 중심에 두고 바뀌듯이 말이다.
man, woman-굳이 따지고 보면 woman은 man에서 파생된 소단어로 보이기도 하며,
왕국 kingdom 역시 여자 남자 다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중성적인 선택없이 king이 주체가 된다. (그러고보면 여자, 남자 역시, 아들 자(子)를 포함하고 있으니 마찬가지 아닌가.)
모계중심사회인 이갈리아의 말들 역시, 여성중심으로 바뀌어있다.
 
여자는 움, 그리고 남자는 맨움이라 부르고, (레디스 앤 젠틀맨은 로디스 앤 젠틀움이 된다.)
kingdom은 queendom이 되며, 그들이 믿는 신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도나 제시카가 된다.(그리고 하느님어머니!라고 부르고, 믿을수 없이 황당한 순간, jesus!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donna!라고 말한다.)
이런 나라에서는 여자가 모든 주도권을 잡는다.
움과 맨움사이의 타고난 육체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움은 어린 시절부터 육체적인 힘을 기르고, 맨움은 아버지의 교육 아래 참한 신랑감이 되는 연습을 한다.
늠름한 움(여자)은 밖에 나가 돈을 벌고, 얌전한 맨움(남자)는 집안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살림을 한다. 이런 나라에서는 모든 기준이 움에게 맞추어져, 힘, 권력, 성적인 위치 모든 것에서 움은 맨움을 지배한다. 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윗도리를 벗고 다니고, 맨움들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기 위해,  "페호"라는 성기가리개를 착용해야하며, 움에게 잘보이기 위해 꽃 페호, 망사페호, 레이스 페호같은 것을 착용하기도 한다. (치마도 맨움이 입고, 맨움은 움에게 사랑받아야 하므로, 턱수염을 예쁘게 파마해야할 의무가 있다.)
움은 맨움보다 자연에 가까운 존재이며 아이를 낳는 거룩한 일을 하므로 움은 더 우월하며,
그들의 첫월경은 세상사람들에게 모두 축하를 받아야하며, 이 나라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는 월경축제이다.
물론 피임도 맨움의 몫이며, 아이를 키우는 것도 맨움의 몫이다.
그들이 결혼해 서로의 배우자가 되기 위해서는 맨움은 움이 원할 때 그들을 임신시키고,
'부성보호'라는 시스템을 통해 움에게 "간택"되어야 한다.
부성보호를 받지 못하는 맨움은 사회의 지탄을 받거나, 가난하고 비참하게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삶을 살게되므로, 부성보호란 이갈리아의 맨움에게 있어서 평생의 꿈이다.

여자와 남자의 성역활이 완전히 반대로 바뀐 소설이고, 남성중심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자인 나조차도 어색함에 끊임없이 피식피식 웃어가며 읽게 되는 소설이지만, 뼈를 담고 있는 유머같은 이 소설이 남성중심의 사회속에 담긴 남녀차별 문제를 수도 없이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여자로 태어나 살면서, 나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내게 약간의 남성혐오증이 있기 때문인데, 사실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은 적은 그다지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런 혐오증을 가진 사실 자체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반항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많은 남자들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좋아한다"는 의미가 성적인 의미에 그친다는 것 또한 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싶어하고, 책임지고 싶어하고, 여자의 몸도 영혼도 사랑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는 여자를 존경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여자는 연인이고, 배우자이고, 어머니이며 할머니이지만, 스승은 될 수 없다.
그것은 여자가 더 못났기 때문이 아니라, 여자는 그런 대상으로 여길수 없다는 암묵적인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말속에 은연중에 깔린 여자에 대한 경멸과 무시, 가부장적인 메세지를 여자인 나는 종종 느끼는데, 그것이 비단 남자들 자체가 여자에 대한 안좋은 기억이 있거나, 대놓고 무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교육되어 관습화 되어진 여자의 위치와 성역활이 그들에게 그런 생각을 가져다 주고 있음도 나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과 이야기 도중에 그는 말했다.
결국 역사를 만든것, 이 세상을 만든 것은 남자이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자는 남자가 만들어놓은 것에 해택을 받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만약, 남자가 없었다면 역사가 없었을 것 같냐고. 남자가 하는 생각을 여자는 못할 것 같냐고.
남자가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든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수없이 밖으로 나오려는 여자를 막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냐고.
남녀의 역활이 바뀌면 어색할 것 같지만, 여성중심 사회인 이갈리아를 바라보면 여성중심의 세상 역시 어색할 것은 없다. 사회적 통념에 따라 사람은 많은 것이 바뀐다. 이갈리아의 움들이 근육질의 여자들인것처럼 말이다.
 
이 책을 보고 누구나 패미니즘을 논하지 않을수 없지만, 패미니즘 자체가 차별적인 개념으로 보이는 나는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아무리 평등해 보인다고 해도 암묵적으로 깔려있는 차별은 존재해왔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로 보기이 전에, 인간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얼굴, 그들의 몸,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기 전에, 인간으로써 살아온 그 세월 역시 이해하고 알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부터가 평등의 시작이지 않나 싶다.
여자로 태어나서 부끄러웠던 경험, 여자로 태어나서 서러웠던 경험-
"비교적" 평등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런 경험을 가진 여자는 아직도 수도 없이 많다.
적어도, 태어난 것 자체가 수치스러워지는 그런 사회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당신이 만약 남자라면, 남자의 우월함을 말하기전에, 여자가 받은 억압 역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것이 당신의 어머니의, 당신의 연인의 길고도 서러운 역사이니까.
 
지금같은 세상에서는 노골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일들이지만,
여성 억압의 역사, 사회적 차별과 여성 자체의 각성을 통해 패미니즘이 시작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이갈리아라는 가상의 국가속에서 입장을 바꾸어 풀어놓은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
한편으로는 통쾌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고, 또 한편으로는 씁쓸한 코미디인데,
소설속의 많은 사건들과 행동들이 다소 극단적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게 되는 재미와 은근한 통쾌감이 있다.
글쎄..이 소설을 굳이 패미니즘의 입장에서만 봐야할까. 소설로써도 충분한 재미를 주고 있는데.
패미니즘에는 그다지 관심없는 나에게는 재밌는 상상력과
여성중심으로 모든 단어 바꾸어놓는 작가의 센스가 더욱 돋보였는걸.
내가 너무 단순하게 읽은걸까. 허헛...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석 2008-01-28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 오래 전에 읽었지만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리뷰를 보니 다시 읽고싶어지네요.

Apple 2008-01-2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참 재밌는 책이었죠.^^

쥬베이 2008-01-2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과 여성이 바뀐 세상을 이야기하는 책인가봐요
설정만으로도 느낌이 옵니다ㅋㅋㅋ
페미니즘적 해석이 불가피한 소설이란 느낌??

Apple 2008-01-29 0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더 이상한거죠.
하지만 참 재밌는 책이예요. 쥬베이님에게도 추천을..^^
 
잠자는 미녀 열림원 이삭줍기 15
로버트 쿠버 지음, 이성원 옮김 / 열림원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어디서 줏어듣기를, 동화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원래 미녀가 오랜 잠에서 깨어보니,
잠자는 미녀의 아버지가 미녀를 강간하여 낳은 아이들이 미녀 주위를 뛰어놀고 있더라...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구전되어온 이 동화의 원전이 어땠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지만,
몇가지 동화들은 꽤 에로틱한 코드를 은연중에 담고 있고,
후세에 그런 동화들을 기억한 사람들은 그 이야기의 여러가지 변형을 생각해낸다.
이를테면, 빨간모자가 늑대에게 걸리면 안되는 건 늑대에게 속된 말대로 "잡아먹힐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거나, 라푼젤을 돌봐주던 탑속의 마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하는 성인 버전의 동화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 역시, 몇가지 에로틱한 코드를 담고 있는데,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난 소녀가 100년동안 잠을 자게 되는 것이 그냥 마법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찔레"에 찔려 잠이 들게 된달지, 무방비의 상태로 누워 있는 여자에 대한 환상이랄지.
(움직이지 못하니 왕자가 키스는 안하고 다른 짓을 할지 어떻게 아냔 말이지..)
로버트 쿠퍼의 "잠자는 미녀"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엽기적으로 변형해 놓은 코드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속에 등장하는 왕자와 잠들어버린 미녀, 그리고 미녀를 마법에 빠뜨리게 한 장본인이자,
미녀를 돌봐주는 수호자인 노파요정, 세사람이 등장해 각자가 상상하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변형 버전들을 들려준다.
오로지 자신의 재미만을 위해 미녀에게 겁을 주기 위한 노파요정의 무시무시한 현실의 엔딩들,
그저 운명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다소 짜증나는 마음으로 가시 덤불을 헤치는 왕자,
꿈속에서 자신의 귀에 속살대는 마녀의 쓰디 쓴 (그러나 훨씬 현실적인) 자신에게 예정되어있을지도 모를 엔딩을 들으며 무기력하게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멍청한 찔레 공주.
노파요정은 무려 42가지의 다른 버전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이야기로 공주를 겁에 질리게 하면서도,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찔레 공주에게 "아이야, 네가 이 이야기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그러니"라고 말하며 차라리 꿈에 빠져있는 것이 나은 현실에 대해서 인생 선배처럼 다그치며 이야기해준다.

이 소설의 난점은 아주 짧은 이야기임에도 도무지 뭘 이야기하려는 건지 종잡을수 없다는 점인데, 꿈과 환상, 상상, 이야기가 뒤섞이면서, 공주가 정말 잠에 빠져있긴 한 건지, 왕자가 가시덤불을 헤치고 있기는 한건지, 노파가 들려주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사실인지 그냥 이야기인지 보는 내내 헷갈리기 때문이다.
역자 후기에는 멋들어진 감상평이 적혀 있지만, 재미에 눈이 맞춰진 나같은 평범한 독자로써는 그 의견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고, 이것이야 말로 평론을 위한 평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미를 끼워맞춘다면 대단하지 않을 작품이 세상에 있기나 할까.
모두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이 이야기에서 역사를 빗대어 놓았다거나,
비슷한 이야기를 양산해도 긴가민가 잘 모르는 독자를 빗대어 놓는다는 둥의 의견은 그다지 느낄수가 없었다. (물론 내가 멍청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책 자체 보다도 논문에 가까운 장황한 역자후기에 어쩐지 마음이 꼬여버렸달까.
재미있을 뻔한 소설을 무척 난해하게 만들어버려서 나처럼 우매한 사람을 혼란시킨 작가도 쬐끔은 밉고....

단순한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는 남이 읽어서 무슨 내용인지 알아볼수 없는 작품은
어떤 면에서는 실패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의미가 아무리 대단한 들, 읽는 사람이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런 면에서 아주 많이 아쉬운 책이었지만, 감상평을 아주 간단히 줄여보자면
" 매우 헷갈리지만, 볼만하기는 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베이 2008-01-2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패러디한 작품인가 봐요~
느낌이 오는데요ㅋㅋ 와 정말 읽고 싶은 책만 늘어가네-_-

Apple 2008-01-22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로써의 재미는 별로 없으니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켁..
 
전망 좋은 방 Mr. Know 세계문학 2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던가. 그때의 내가 중학생이었는지 초등학생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주말에 누워 TV를 틀어놓고 낮잠을 즐기다가 보게된 영화가 "전망 좋은 방"이었는데,
딱히 재밌었던 기억도 없고 아주 감동받았던 기억도 없었는데 묘하게 배우들은 생생하게 생각이 난다. (당시에는 이름을 몰랐지만 후에 다른 영화를 통해 알게되었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헬레나 본햄 카터가 등장하는 푸르른 녹색과 결벽증적일정도로 하얀 옷이 두드러지게 각인되었던 영화, "전망 좋은 방".
재작년에 나왔던 E. M. 포스터 선집을 통해 영화 "모리스"의 원작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너무도 아름다운 책 장정에 홀딱 반해 불이 나케 주문한 것이 벌써 1년반 전.
이제서야 제대로 보게된 "전망좋은 방"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영화의 이야기와는 많이 달랐고,
(물론 내가 잠결에 본 탓에 잘못 기억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이런 장르를 "로맨틱 코미디"라고 불러야 할까나.
빅토리아식 엄격한 예의범절과 금욕주의속에서도 피어나는 "단 한번의 키스만으로도" 잊을수 없었던 사랑의 성공담.
아주 아주 옛날부터, 이야기들은 차고 넘칠 정도로 쏟아져 나오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각기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설명이 되기도 한다.
신데렐라의 성공담이 요즘 드라마에서 아직까지도 활용되고 있듯이,
사랑이야기가 거기서 거기인 것 같으면서도 사랑받는 것은 누구나 이런 긴장감 넘치는 연애사건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노처녀 사촌언니를 대동하고 이탈리아 여행에 나선 루시 허니처치(이름마저 왠지 달콤하다.)는
피렌체에 자신들이 묶기로한 펜션의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망좋은 방을 바랬건만, 전망좋은 방은 엉뚱하게도 영국인 부자(父子)여행객들에게 가있는데...
친절하게도 아버지 에머슨은 루시와 그녀의 사촌언니 샬롯에게 방을 양보하는데,
아니 왠 걸.. 이 여자들은 정색을 하며 호의를 거절한다.
왜냐면, 겉치레에 묶여 사는 빅토리안 영국인들에게 그것은 말도 안되는 과잉친절이며,
그것을 빌미로 대체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지 의중을 알수 없다고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비브 목사까지 끼어들면서, 이 호들갑스러운 방 양보전(?)은 대략 마무리 짓고
루시는 원하던 전망좋은 방에 묶에 되는데...

여행지에서 빠지는 사랑이야 말로 가장 로맨틱한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면서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란, 자질구레한 물건을 사오는 것 밖에 없었던
순박한 처녀 루시는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원초적 고독감에 휩쌓여 있는 염세주의자 청년 조지 에머슨과의 모호한 애정전선에 휩쌓이는데...
예의범절 보다도 실리를 중요히 여기는 에머슨 부자는 여러 사람들에게 평판 안좋기로 유명하고, 자신이 생각해도 "뭘 모르는" 루시는 그런 평판에 휩쓸려,
한번의 키스에 "살고 싶어졌다"고까지 말하는 이 우울한 청년 조지 에머슨에게 끌리는 마음을
애써 혐오감으로 표출시킨다.

끌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피렌체에서 도망쳐버린 루시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든다.
자신과 똑같이 예의범절과 겉치례에 묶여 살아가는 조각같은 남자 세실.
자신을 마치 예술작품처럼 대하고, 자기애가 너무나 강한 나머지 모든 사람을 굽어보는 나쁜 버릇을 가진 세실은 비록 누구나 "신사"이며 최고의 신랑감으로 인정할지는 몰라도,
루시는 피렌체에서의 단 한번의 키스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세실의 새 빌라에 입주한 것은 다름아닌 에머슨 부자. 이 어쩔수 없는 운명에 루시는 자신의 과거(속의 키스)와 조지 에머슨에게 끌리는 마음을 주체 못해 바들바들 떨게되는데...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득바득 아니라고 우기는 처녀의 거짓말.
역시 사람은 무엇보다도 진실한게 가장 좋다는 원초적인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가보다. 이 연애담이 더더욱 귀여운 것은 20세기 초반의 호들갑스러운 사람들의 과잉 행동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인생 전반에 걸쳐 연애가 흔치 않기에 발생하는 무지로 인한 실수 때문이기도 하다.
조각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남을 사랑할지 모르고, 남에게 맞춰줄지 모르는 이기주의자라 세실을 비난하지만, 루시 역시 관습에 얽매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혐오하고 감정을 속이려 하지 않았나.
태어난지 100년도 넘은 소설이기에, 지금의 표현 방식과는 많이 다르고, 영국적인 수다까지 곁들여져 가독성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지만, 기존의 관습에 얽매인 루시와 보이지 않는 관습보다는
실제의 무언가를 더 중요시 여기는 조지 에머슨, 두 사람의 연애 행보가 꽤 귀엽게 그려진 작품이다.

아름다운 묘사와 함께, 영화속의 녹색과 흰색이 어울어진 그림같은 풍경이 떠오르는 소설.
시간이 나면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
(그러고보니, E. M. 포스터 소설 원작의 영화들이 꽤 많네..)

역시 시집 안간다는 처녀 말은 믿는게 아니다. 후훗...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베이 2008-01-19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E. M. 포스터 전집 보관함에 담아놨어요^^
살까말까 고민중인데, 시즈님 서평을 보니 갑자기 구매욕이...ㅋㅋ
제 주변에도 독신으로 살거라는 누나가 있는데, 믿으면 안되는거죠??ㅋㅋ

Apple 2008-01-19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실은, 이렇게 말하는 저도 독신주의라는...=_=;
 
오월의 밤 기담문학 고딕총서 3
니꼴라이 고골 지음, 조준래 옮김, 이애림 그림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책에도 궁합이라는게 있는건지, 가끔씩 나와 제대로 맞지 않는 책들이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딱히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 전혀 집중이 되지 않는달지, 읽어도읽어도 제자리 걸음인 것 같달지. 내게는 이 책이 딱 그런데, <오월의 밤>과 함께 사놓았던 에드가 엘런 포의 단편집 <붉은 죽음의 가면> 역시 그랬다. 에드가 엘런 포를 무척 좋아하는 나로써는 영문을 알수 없을 정도로 집중력이 저하되었는데, 도무지 이유를 알수 없다.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장정에, 마치 동화책 같은 적당한 글씨크기, 꼼꼼한 편집, 좋아하는 기담문학. 그런데 왜 이리도 읽히지 않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고골의 <오월의 밤>을 읽어보았는데, 잘 읽히지 않았을 뿐더러,
지금와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두려움을 자아낼 만큼 공포스럽지는 않기 때문에
조금은 심심한 독서가 되었다.
표제작인 <오월의 밤>을 비롯, 유명한 흡혈 마녀이야기 <비이>라던가, <무서운 복수>,
<성 요한제 전야>, <이반 표도로비치 슈폰카와 그의 이모> <저주받은 땅>이 함께 실려있는 고골의 단편집인데, 낯선 우크라이나의 문화들(소설속에서는 카자크라고 부르는...)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에의 긍지랄지, 그런 것들이 신선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기담문학이라고 읽기엔 그다지 괴기스럽지 않은 편이고, 단편들의 이야기 구조라던가, 소재, 주인공들의 행동양식이나 대화체등이 상당히 비슷비슷해서 낯선 문화를 접했다는 것 이상으로 소설로써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꼭 집어가면서 머릿속으로 이해가 될때까지 읽는 편인데, 러시아식 이름에 낯선 나머지, 이 기나긴 이름들을 입으로까지 발음해가며 읽어서 더더욱 몰입이 힘들었달까.
특히 이반 표도로비치와 이반 이바노비치와 그리고리 그리고리예비치가 한꺼번에 나오는 장면에서는 아....이 것 참....;;;)
 
마녀와 악마로 점철되어있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애림씨의 삽화였는데,
소설보다도 더 기이한, 괴기한 그림이 몹시 매혹적이라, 다소 비싼듯한 가격에도 돈이 아깝지는 않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기담문학 고딕총서는 어딘지 나와 궁합이 굉장히 맞지 않아서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예쁜" 책인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또 보게 될것같지는 않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베이 2008-01-15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담문학총서는 사기가 꺼려져요-_-
고급스런긴 한데...내용은 영 아니고...장정도 보기가 불편해요.
그나저나 삽화는 시즈님 말씀대로 멋지더라고요.

(아, 러시아 인명부분, 절대 공감입니다ㅋㅋㅋ)

Apple 2008-01-15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러시아 이름 읽다가 정신분열 걸릴뻔..=_= 무엇보다도 책이 장정만 화려할뿐 알맹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리고 뭔가 굉장히 불편한 것도 사실이고요.

쥬베이 2008-01-1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광적으로 양장본을 애호했어요. 특히 두툼한 양장 (열린책들ㅋㅋㅋ)
그런데, 요즘 약간 생각이 변했어요.
반양장본은 읽기가 편하더라고요.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거들떠도 안보다, 요즘은 꽤 많이 사들이고 있습니다-_-)
 
모팽 양 열림원 이삭줍기 18
테오필 고티에 지음, 권유현 옮김 / 열림원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다움을 몹시도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달베르라 불뤼는 이 남자는 눈이 어찌나 높은지, 그의 이상향적인 여인은 경이로울 만한 미모를 갖춘데다가, 조각상 같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너무 어린 소녀여서도 안되고 너무 닳고 닳은 여자여서도 안되기 때문에, 세상을 어느 정도 알만한 미망인정도면 적당하며, 너무 조신해서도 안되며, 적당히 내숭을 떨며 교태섞인 몸짓으로 자신을 만족시킬수도 있어야 하며, 미인에게는 가난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돈도 많아야 한단다.

눈이 이마 위에 달려있으니, 왠만한 아가씨들이 예뻐보일리 없어 아직 애인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달베르에게 미모와 재력을 갖춘 미망인 로제트가 나타나는데, 열렬한 사랑에 빠져 뜨거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그 때에,그는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녀는 분명 아름답고, 상냥하며, 자신이 원한 모든 것을 갖추긴 했지만,
언제나 상상에서 꿈꿔오던 이상향과 어딘가 어긋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는 미망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관계를 깰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로제트의 집에 수많은 여자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숱하게 거절하고도 원망받지 않는 남자가  나타나고, 대체 어떤 놈인지 궁금해 그를 보러간 달베르는 맙소사, 자신의 이상향에 딱 들어맞는 사람을 만나는데, 그 이상향은 바로 소문의 남자인 테오도르였던 것이다!
 
로제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관계를 깨지 않는 달베르는 한참이나 착각하고 있다.
로제트 역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어찌된 일인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안타까운 사랑이 있었고,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하고, 그 사랑의 실패에 마음이 망가져 다소 방탕할 정도의 관계들을 가져왔던 것이다.
테오도르. 용맹한 기사이자, 다정한 연인이자, 의중을 알수 없는 신비의 대상.
아름다운 미남자가 온갖 매너와 예의를 갖춰 자신을 공주처럼 대접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한 때 그녀는 테오도르를 사랑하여 그의 고백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그 고백이 너무 늦춰지자 참지 못하여 그를 유혹하기 까지 했으나, 테오도르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만, 결혼하지 않으려 했다.
한창 관심있는 듯 잘해주더니,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늘 내빼버리는 이 남자 테오도르는 과연 누구일까.
 
테오도르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는 사실 여자이다.
비록 치마를 입고 있지만, 정신에까지 치마를 두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녀(그)는 여자에게 주어진 한계가 지긋지긋했고, 또 자신에게 알맞는 완벽한 남자를 찾기 위해 남장을 하고 여행하다 여자를 숙녀처럼 대하다가도, 자기들끼리만 모이면 잠자리얘기까지 다 털어놓으며 여자를 경멸하는 남자들의 속내를 속속들이 알다보니 남자라는 생물 자체가 지긋지긋해졌지만, 남자처럼 행동하다보니 사실 자신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일부러 자각하지 않는 한은, 자신이 남자라고 믿게 되었다.
여행중 만난 로제트의 오빠와 친해지게 되어 로제트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신사다운 매너를 다하다보니 로제트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 넘치는 사랑에 어쩔줄을 몰라 망설이다가, 여러사람의 원망만 사게 되어 그 집에서 도망쳐 버렸다.
오랜만에 찾아간 로제트의 집에는 로제트가 새로 사귄 남자 달베르가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자신을 집요하게 뒤쫓는 달베르의 시선이 느껴진다.
 
20세기 초반, 음란물 논란까지 올랐던 테오필 고티에의 <모팽양>은 남장을 하는 여자 테오도르(본명 마들렌 드 모팽)와 그녀에게 꼬인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거의 100년이나 지난 소설이니 만큼, 지금 봐서는 손톱만큼도 음란하지 않으나,
당시로써는 몹시 도발적이고 버르장머리없는 소설이었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지금봐도 엽기적이라 생각되는 결말 부분은 특히, 여러 논란에 휩쓸리기 충분했다.
나는 이전에 읽다가 토할뻔했던 <북회귀선>을 떠올리면서 그 정도의 난독증이 있지 않을까 정신을 바싹 차렸지만, 의외로 <모팽양>은 경쾌하고 음흉하게 익살스러우며, 지금 봐도 꽤 수긍이 가는 면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보았다.

남장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자신이 남자인줄 알게된 모팽양,
자신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다른 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모팽양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남자가 되었으나, 남자를 역겨워하게 되었고, 여자들의 사랑이 얼마나 수동적이며 안타까운지도 알게된 모팽양. 그녀는 이제부터 남자를 사랑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여자를 사랑하게 될 것인가.
정교한 은세공품처럼 휘황찬란한 묘사와 시대물 다운 고전적인 분위기, 게다가 소설속의 모든 인물이 부르조아적인 탐미주의에 심취해 나른한 향략의 냄새마저 풍기는 <모팽양>은 나로써는 몹시 즐거운 소설이었다.
 
최근에 여러 예술작품에서 게이코드가 인기이다.(게이가 나오지 않는다면 <커피프린스>처럼 남장여자라도...) 만화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숱하게 나왔던 컨셉이지만, 최근에 TV에서도 왕왕 그런 코드가 보이는 것을 보니, 인기이긴 인기인가보다.
<모팽양>은 17세기에 실존했던 남장 여가수 마들렌 도비니를 모델 삼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최근에 인기있는 코드를 100년전의 소설에서 볼수 있다는 게 참 재밌다.
그런 면으로 요즘 사람이 보더라도, 이 소설은 무척 흥미진진히고 유쾌하게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엽기적인 결말도 있으니까 말이다.
 
열림원의 이삭줍기 시리즈는 아웃사이더 문학을 다루는 시리즈인데,
<모팽양>을 읽고 나니 이 아웃사이더 문학이 내 입맛에 들어맞어서 다른 시리즈들도 무척 궁금해졌으니  한권씩 모아 심심할 때마다 펼쳐봐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쥬베이 2008-01-11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시즈님 덕에 이삭줍기 시리즈 알고 갑니다^^
목록보니, 흥미로운 소설들이 많이 모여있는듯 해요
남장여자 모팽 양 이야기ㅋㅋㅋ 이 설정하나만으로 재밌을 거 같네요^^

Apple 2008-01-12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전부터 눈독드리고는 있었지만, 사실 별로 기대하지 않아서,
일단 도서관에서 읽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더라고요..^^흐흐...
쥬베이님도 읽어보세요~재밌게 읽으실수 있을거예요..^^강추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