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
리 홀 원작,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박선영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탄광폐쇄와 구조조정으로 여러모로 분위기가 흉흉한 탄광촌 마을에서 꿈이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환상이며 도저히 용납못할 사치이다.
아버지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없는 돈을 쪼개고 쪼개 아들을 권투학원에 보낸다.
지지않는 사내가 되기를 바라면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남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워낙 없는 살림이다보니,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들에 대한 반감은 자라나고, 그 안에서 피해의식이 자라나는지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폐배의식에 찌들어 승리에 쌍심지를 치켜뜬 아들들을 길러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 재키는 어린 아들 빌리 엘리어트를 걱정한다.
승리에 관심도 없고, 권투에도 관심없어 보이는 어리고 나약한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연민과 한심함을 오가면서 어머니도 없이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단지 꿈을 꾸고 싶을 따름인데, 마주보고 어디를 때릴까 고민하기 보다는 그저 하늘을 날로 싶을 따름인데, 발레리노가 되고싶은 빌리 엘리어트의 꿈은 이 가난하고 여유없는 탄광촌 마을에서는 코웃음 칠만한 사치가 되어버린다.

영화로 미리보았던 <빌리 엘리어트>를 원작소설로 보니 영화를 보았던 때의 나이와 소설을 보았을 때의 나이가 차이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소설에서 더 극대화 되었기 때문인지, 빌리의 시선으로 보았던 영화와는 달리, 소설은 빌리의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의 감정을 더 절실하게 느낄수가 있었다.
아들이 재능이 있다는데, 도무지 뒷받침해줄만한 능력이 없었던 가난한 아버지는 끝내 죽은 아내의 피아노를 장작처럼 쪼개서, 마지막 땔감으로 쓰면서 울음을 터트린다. 더이상 자식들에게 해줄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무형의 마음에서 온다면, 아버지의 사랑은 좀더 물질적인데에서 온다.
씁쓸한 얘기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래왔던 것 같다.
그래서 좀더 마음을 써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해줄 만한게 없을 때, 암담하고 막막한 심정으로 울음을 터트린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가슴이 찡했던 부분은 빌리가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도 아니었고, 구박하고 부려먹기만 하던 형이 빌리를 위해 나선 것도 아닌, 그저 그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소설 <빌리 엘리어트>는 다중일인칭이라는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화자가 되어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조금 얄미워보였던 빌리의 형도 충분히 이해받을만하게 되어있다.
그냥 소설일 뿐인데, 요즘은 이런 소설을 읽으면 자신을 소진해가며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들이 자꾸만 걱정된다.
세상의 많은 부모들이 그러할 테지만, 또 자식을 키워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삶의 기쁨이 되는지도 알지만, 부모가 아들의 꿈을 찾아주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소설속의 아버지가 빌리를 로열 왕립 발레학교를 보내놓고 나서 얼마나 많은 석탄을 캤을까,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더 짠해졌다.

영화만큼이나 재밌는 소설이었지만,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종종 소설이 영화화 되는 경우가 많아서, 두개를 함께 보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먼저 보고 영화를 보는 것이 훨씬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먼저보고 소설을 보니, 상상력에 한계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미 알고 있고, 나중에 어떻게 날아오르게 될지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 그 이상의 상상보다는 그저 영화에 충실한 이미지로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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