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자의 아내 2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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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이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시간은 없고, 자꾸 다른 일들이 생기고, 영화를 보러가려고 하면 시간표가 맞지 않고....
그러던 중에 그냥 놓쳐버렸는데, 뒤늦게 <시간 여행자의 아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책을 보고 있을 때는, 반짝이던 영화의 트레일러가 생각났는데, 책을 덮을 때는 전혀 다른 감상이 이어졌다.
시간을 거스르는 사랑.
우리 사랑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간 역시 방해할수 없다는- 다소 낯간지럽지만 로맨틱한 상상을 하면서 이 책을 보았는데, 다 보고 나니 물론 그런 추측도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정작 이 책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 소설은 시간을 감내한다는 것, 시간의 무력감, 완벽한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주인공 헨리는 시간 여행자이다.
SF 영화처럼 약물의 오용이나, 현대 과학의 승리 따위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타고난 존재이다.
헨리에게 있어 시간 여행이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 그냥 내던져 버리는 그런 종류의 "체질"에 가까운 장애이다.
막연하게 생각해보면 꽤 좋을 것 같지 않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거의 실수들을 바로 잡을수도 있고, 미래로 갈수 있다면 면 로또번호라도 알아내거나, 오르는 주식을 미리 사놓을수도 있고, 미래의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모습도 훔쳐 볼수 있다.
그러나 시간여행에 이렇게 좋은 점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시간 여행을 몇번이고 되풀이 하면서 헨리가 얻게 되는 것은 벌어질 일은 아무리 막으려 해도 결국 벌어지고 만다는 운명의 무력감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으로 몇번이고 다시 돌아가 살아있는 엄마를 바라보고, 사고도 막으려고 하지만, 이미 그는 그 세계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인간이고, 벌어질 비극은 필연처럼 피해갈 수 없다.
내일, 아니 당장 1분후에 어디로 사라질지도 모르기 떄문에, 어디론가 뿅!하고 사라져버려 알몸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타인들에게 그 모습은 상당히 이상한 모습으로 보일 뿐더러, 잘 모르는 사람 집에라도 떨어지게 되면 범죄자가 되는 건 순식간의 일.
때문에 헨리는 어린 시절 자신을 만나러 온 성인이 된 또다른 자기자신에게 도둑질하는 법, 자기 몸을 지켜내는 법, 열쇄따는 법 등의 잘못된 것을 배울 수 밖에 없다.
한때 좋아했던 밴드의 공연장에 떨어져도, 언제 죽을 지 뻔히 아는 사람의 공연을 보고있는 것이 마냥 신나지도 않게 되고, 미래에 벌어질 일의 원인이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나게 상처받기도 한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아무 시간에나 내던진다는 것이 헨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인생은 부질없고, 노력해봤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마음을 다치게한 사건은 잊어버릴수도 없게 계속 되돌아 가게 되고....
그 무력감과 허무함때문인지, 헨리는 한때 오염된 인생을 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이 찾아오는 건지, 찾아가는건지, 기이한 인연으로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소녀는 여섯살. 그리고 헨리는 서른 중반쯤 되었다.
알몸으로 들판에 내던져진 헨리를 경계하면서도 자꾸 말을 걸어오던 이 소녀는, 미래의 자신의 아내이다.
어린 시절의 아내를 만났기 때문에 그 소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젊은 시절 만난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 여자의 어린 시절로 내던져 지는 것인지, 이것이 운명인지 우연인지는 알수 없다.
헨리의 말처럼, 시간 여행을 하는 몸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모든 시간이 뒤죽박죽 엉켜버리기 때문에.
나이든 헨리는 자신이 언제 나타날지를 적은 목록을 소녀에게 건네주고, 소녀는 그가 입을 옷과 먹을 음식을 준비해두고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현실의 헨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러고나서도 헨리가 시간 여행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클레어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캐릭터일까.
내가 보았던 시간여행자의 아내 클레어는 그렇지 않다.
나름 자기 의견과 취향이 확실한 전형적인 요즘 여자같은 이미지인데, 클레어는 현실의 헨리를 만날 때까지 단한번도 사랑에 빠지지 않은 채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헨리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고, 현실의 헨리가 자꾸 사라져버리는데도 초조함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왜 그럴까.

시간이 뒤엉켜버린 헨리를 만난 덕에, 클레어의 시간 역시 뒤엉켜 버렸기 때문이다.
자꾸 과거로 회기해버리는 헨리를 붙잡으려 해봤자 어쩔수 없는 일임을 알고, 또 그 시간 여행이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헨리를 만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교적 초연한 태도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 얼마나 거대한 기다림인지.....
언젠가 찾아올 헨리를 만나기 위해, 클레어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도 기다린다.
그 찰나의 순간을. 또 바보같이 기다리게 된다.
마냥 기다리고 있는 사람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 다른 시간을 멤돌게 되는 사람.
그 "의지와는 상관없는"행위의 무력감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클레어는 한없이 기다린다.
그래도 그 시간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헨리라는 사람이 있었고,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 뿐이니까....
이 변덕스러운 시간과 세상에서 영원한 것이 딱 하나 있다는 것을 클레어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기다림이 초조하거나 지루하지 않은 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클레어의 그런 현명함과 분명함이 나는 무척 부러웠다.

마냥 핑크빛 로맨스로 점철되어있지 않아서 더 좋았다.
시간이 주는 무력감.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버리는 운명의 속성같은 것은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장으로 갈수록 서늘하게 짠해지는 뭔가 있다.
나는 지금 어떤 시간을 걷고 있을까.
내게 주어진 운명은 무엇일까.
두근두근하면서도 두려운 상상들이 책을 덮고나서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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