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첫사랑의 경계는 무엇일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인연을 스치고 지나가고, 그중에는 사랑, 또는 짝사랑, 또는 애증에 가까운 무엇을 품었던 상대들도 많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첫사랑을 언제 해봤냐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난감해 한 적 있는가.
나는 꽤 많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호감인지, 나 조차도 헷깔린다.
여섯살때 내 볼에 뽀뽀하고 도망치던 꼬마녀석의 뒷모습을 보면서 볼이 발그레 해졌던 것도 사랑이라면 내 첫사랑은 아주 어린 나이에 지나갔고, 마음과 몸이 온통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누군가를 그리워했던 것이 진짜 사랑이라면 내 첫사랑은 훨씬 후의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이든, 첫사랑의 기억은 움직였던 것 같다.
더 어릴때는 그보다 조금 어릴 때를, 나이가 들어서는 어른이 되기 직전이나 그 직후의 사랑을 첫사랑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내가 불렀던 그 모든 첫사랑은 기억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그림자였고, 첫사랑의 이지러짐은 일종의 성장통과도 같았던 것 같기도 하다.
첫사랑이라고 부를수 있는 것은 그 후의 사랑도 있었다는 이야기.
과거 나를 스치고 간 누군가는 항상 아련한 그림자로 남게 마련이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면서 내내 그런 아련한 감정을 느꼈다.
책속 누군가의 첫사랑이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첫사랑과도 같았던 것 같다.
물론 지독히 질긴 것으로 치자면 내 첫사랑은 발끝에도 못미치지만...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과정, 단편단편 조각내어져 기억나는 일들.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마음이 짠해지는 기억속의 사소한 사건들.... 이 책에서 작가가 표현해놓은 기억의 단편들이 어찌나 현실감 있던지, 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내 이야기를 듣는 듯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가 열다섯이 되던 어느 해 만났던 한나라는 여자.
간염에 걸려 거리에서 구토를 하고 있던 미하엘을 무뚝뚝하게 돌봐주던 손.
뭔가에 홀린 듯, 그 여자의 집으로 걸어가면서 보았던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들, 망설이던 생각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런 것들이 대체 뭐길래, 그렇게 질기도록 평생을 가슴에 품어야하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시절, 미하엘의 일상의 전부였던 한나가 어느날 사라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도 몸과 마음이 온통 한나의 생각으로 가득차있고, 서서히 그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에 미하엘은 다시 한나를 만나게 된다.
뜻밖에도 법정에서. 죄인으로 서있는 그 한나를....

영화를 먼저 보고 봤기 때문에 내용이야 다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서걱서걱 부서지는 듯한 책속의 말들때문에 가슴이 아련히 아려오더라.
결코 미녀라고 할수 없는 여자, 기분 좋았나 싶은 순간 갑자기 화를 내고,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아서 그냥 사과하는 수밖에 없는 다루기 힘들고, 알수 없는 이 여자의 매력은 뭐였길래, 미하엘은 평생을 그녀의 기억을 끌어안고 살았던 걸까.
사랑은 사람을 만든다지 않았나. 아마도 그래서이겠지...
한나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사람을 배우고, 또래 아이들보다 어른스럽게 행동하게된 미하엘에게 한나는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 자신을 대표했던 아이콘이지 않았을까.
한나를 통해 변화된 그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얼마나 신기하고 즐거웠을까.
책장을 거듭하면서 이런 질문은 또다시 떠오른다.
그토록 감추고자 했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죄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죄까지 다 인정한 한나가 드디어 문맹에서 깨우쳐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똑바로 직시하게 되었을때, 글을 통해 변화된 그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과연 신기하고 재밌기만 했을까.
그리고, 이 무지한 여인의 죄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용서할수 있는 것일까.
아니, 일단은 그걸 죄라고 부를수 있는 걸까.
열다섯살짜리 소년을 사랑한 30대의 여자의 사랑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어떻게 이해할수 있는 것일까.

로맨스 소설처럼 시작해, 여러가지 도덕적인 고민까지 안겨주는 소설이지만, 책속의 주인공들의 태도처럼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냥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결국은 사랑이야기이고,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묘하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 떠올랐는데, 지나간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는 행위들과 서걱대는 아련한 문장자체의 매력때문에 더 그랬으리라 싶다.
<연인>이 그랬듯,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역시 기나긴 먹먹함과 아련함을 남기는 소설이었다.
영화도 재밌었던 기억이 나는데, 사실은 책이 훨씬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다.
영상으로는 도저히 표현할수 없는 아름다운 문장들. 조각나는 기억의 단편들.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애수...
카메라에는 담을수 없는 무형의 감정들이 책에는 넘쳐난다.
이래서, 원작만한 영화 없다고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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