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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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술자리에서 어떤 친구는 사랑에 고통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일부러 고통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고, 막연하게나마 동감할 수 밖에 없더라.
고통없이 다정함만이 넘쳐나는 관계가 있다면 그걸로 완벽할까.
자꾸 그 사람이 눈에 밟히고,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과 상처와 상실감이 신경쓰이면서, 타인들 보다 조금 더 마음쓰게 되고, 때로는 그 사람의 상처에 내가 데이고, 그러한 모든 힘겨운 점까지도 끌어안을수 밖에 없는게 사랑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냥 편안한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때때로 불편해지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래왔던 것 같다.
마냥 편안하고 다정한 관계에서 정착은 할수 있되, 장기체류는 하기 힘들었었다.
김연수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린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를 읽으면서, 꼭 이런 기분을 읽어낸 것 같았다. 일상의 어떤 순간, 이전에 했던 사랑을 다시 마주친 그녀의 입으로 비슷한 말을 마주하고서는 그냥 그렇게 인정하게 되어버렸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이 독특하고 미스테리한 제목을 보고 나는 이 제목을 "세계 끝의 여자친구"라고 잘 못 읽기도 했고, 하루키의 "세계의 끝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올리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작가의 말을 보고 나서야 이 제목이 일본밴드 World's End Girlfriend에서 따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World's End Girlfriend의 노래와 다르면서도 은근히 흡사한 부분들이 있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표제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단편에서는 그랬다. 현실의 이야기이면서도 어딘지 아스라히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느낌은 이 책에 수록된 9개의 단편 모두에서 읽어낼 수 있는데, 아마도 그 아스라한 느낌들은 내가 살아온 기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뻔할지도 모르는 이야기.
이 책에 실려있는 이야기들은 내가 겪었고, 다른 사람이 겪었는데, 그런데도 완전히 내것같지는 않았던 이야기들이어서 낯선 기분과 정체모를 노스텔지아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의 "끝"이기 때문에 절망적인 느낌을 줄수 있지만, 그 끝에는 또다른 시작이 있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시간들과 기억들, 그 속에서 소통하고 때로는 소통하지 못하는 것들과 그 치유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을 읽어냈다면 제대로 읽어낸 걸까.

온 인생을 완전히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성장은, 성장통은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항상 타인에게서 튕겨져 나온다.
누군가를 좋아했고, 그 사람을 잃어가는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살아오면서 마주하고 스쳐지나갔던 모든 인연들이 나를 또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게 만든다. 그 모든 변한 모습들이 결국 나이면서,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게 마련이지만, 이렇게 이기적인 개개인을 자신 아닌 상태로 변해가게 만드는 것 또한 사랑이라는 기적이 아닐까.
과거에도, 미래에도 만났고 만나게 될 모든 인연들이, 좋건 나쁘건 어떤 형식으로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이 커다란 세상에 내가 홀로 남겨져있지만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할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얼기설기 얽혀져있는 이 인연들 속에서도 때로 막막한 외로움에 시달릴 때가 있다.
왜냐면,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닮아있어도 타인은 결국 타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나와 네가 한 몸인 것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메꿀수 없는 틈같은 것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인생도 내 인생만큼이나 힘겨웠음을 알고 토닥여주는 연민이 있기 때문에, 결코 이해할수 없는 타인과 타의 틈조차 이해할수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또 무엇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해하는 척 할 뿐이 아닐까.
여전히 이해할수 없는 부분들은 남아있겠지만, 그것을 못마땅히 여기기보다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그 자체가 사랑이고 배려가 아닐까.
그래서 결국 중요한 건 소통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너를 이해한다 생색내는 거짓말보다는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한다는 "최선"이 훨씬 사랑스럽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충돌같은 사랑과 사랑을 묶어두려던 노력과 이별까지 모두 합쳐서 우리는 성장하게 된다.
가끔 사는 건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를 버스를 타고 무작정 어디론가 가는 것같을 때가 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내 옆으로 사람들이 오고, 또 떠나가고, 나는 막연한 목적지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별이 있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 남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대할 때의 나와 저 사람을 대할 때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지만, 결국 그 다른 모습들까지 나였다.
거울에 비춰진 여러가지 모습의 나. 그들이 남기고 간 그 여러가지 모습의 나는 그렇게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 것만 같다.

<세상의 끝 여자친구>에 수록된 아홉가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일상의 균열들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인생을 아주 약간씩 바꾸어나가듯이, 사랑이라는 충돌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되풀이하는 사람들. 비록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이었으리라.
끝이지만, 절망하지는 말기를. 애썼다면 그걸로 충분해.-라고 작가가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다소 쿨해보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촌스러운, 그리고 어쩔수 없는 것은 그대로 놓아두는 초연함 같은 것에 책을 읽으면서 공감했다.
어떤 때에는 레이먼드 카버를 읽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것 같았는데,
사실은 내 기억속 어떤 순간들을 읽어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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