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은 시간
혼자 집을 지킨다. 남편은 출장 가고, 딸내미는 근무하고, 아들은 놀러 갔다. 낮에는 몰랐는데 밤이 되니 몸이 으슬으슬하고 떠도는 공기에도 한기가 서려있다. 입에서 쓴 내가 나고 어깻죽지에 동통이 밀려온다. 몸살기니 쉽게 잠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잡념만 뭉친다. 이럴 땐 식구들의 응원보다 나은 기 보충제는 없다. 괜히 가족 대화방에다 투정서린 문자를 남겨 본다. ‘이 밤 모두 나 빼놓고 잘 있제? 외롭다.’
‘내일 (집에) 간다.’ 애교나 과장을 모르는,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딸내미의 답문이 일착이다. 비교적 싹싹한 아들 답문도 나을 게 없다. ‘어머니, 파이팅.’ 선심 보너스처럼 달린 하트 이모티콘이 민망하다. ‘숙소 들어가는 중’ 남편의 답문마저 초간단하다. 그래도 마음 온도만큼은 문자에 비할 바 아니리라. 아니나 다를까 숙소에 든 남편에게서 금세 전화가 온다. ‘외롭다’는 말의 의미를 직해할 수 있는 사이는 역시 부부밖에 없구나. 일상 그대로의 몇 마디를 나눌 뿐인데도 위안이 된다. 전화기를 끊자마자 덤으로 문자 하나를 보내온다.
모 회사가 제작한 가족사랑 홍보물이다. 클릭하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영상이 뜬다. 일 년, 이 년 아니면 몇 개월. 결과표를 받아든 사람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무슨 내용인고 하니 남은 생애에서 우리가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다는 것. 일하고 자고 사람 만나 사교하고 등의 시간을 빼고 나면 가족과 마주하는 시간은 너무 모자란단다. 친절히도 가족시간 계산기가 덧붙여져 있기에 적용해보았다. 남은 시간을 많이 할당 받고 싶어, 잠이나 기타 여가 시간을 내 패턴보다 조금 줄여서 입력했다. 그래도 겨우 7개월.
으슬으슬하던 몸에 열감이 확 돋을 정도로 정신이 퍼뜩 든다. 이해하겠거니, 하는 전제를 깔고 다른 것에 비해 늘 후순위로 미루기만 했던 가족의 일. 평균 수명으로 봐도 삼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는데 가족을 위한 남은 시간이 고작 7개월이라니. 숙연한 책임감으로 잠 못 든다한들 이 밤은 할 말이 없겠다.
2. 탄력적 사고
쌍둥이 중 누가 장자여야만 할까. 흥미 있는 포스팅을 발견했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쌍둥이 중 늦게 태어난 아이가 맏이가 된다는 것. 상상으로라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단 일초라도 먼저 태어나면 형이 된다는 동양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접하니 무척 신선하고 신기하다. 사람의 생각이란 다양한 것.
현대 유럽 사회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도 우리만큼 위계질서를 잡아주는데 집착하지 않는다. 형 동생이라는 개념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전통 왕가에서나 우리식으로 하자면 시골 종갓집 같은 데서는 여전히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은 모양이다. 단 그들이 생각하는 형·동생에 대한 정의는 보편 정서와 다르다. 먼저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늦게 태어난 아이가 형이 된다. 먼저 수정된 아이가 자궁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느긋하게 나온다는 속설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한다는데 그건 과학적 근거가 없으니 넘어 가더라도 나머지 한 이유에는 솔깃해진다. 약한 아이가 먼저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안에서 강한 아이가 밀어내 준 뒤 천천히 나오게 된다나. 강한 자가 곧 형이라는 편견이 살짝 깔리기는 했지만 공감이 가기도 한다. 형이 꼭 동생에 비해 덩치가 크고 의리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힘 세다고 먼저 박차고 나가는 형을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흐뭇한 이야기다.
쌍둥이 중 누가 맏이인가, 하는 것은 과학적 진실 차원에서 논할 이야기는 못 된다. 산아의 위치에 따라 운명적으로 먼저 나오고 나중 나오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가 형이고 동생이냐를 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일일뿐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같은 조건에서 내가 먼저 빛을 봤으니 내가 형이라는 생각도 옳고, 내가 형이니 네가 먼저 빛을 보라고 떠밀어주는 생각도 옳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쌍둥이를 규정하는 순간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탄력적 사고를 하면 세상에 진실이 아닌 게 없게 된다. 사람 생각은 다 다르고 저마다 옳으니.
3. 글썰미 훈련
김연수의『소설가의 일』에 보면 핍진성(逼眞性)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작가에 의하면 ‘갈피 너머에 있는 훨씬 뒤쪽의 단어와 표현’을 찾는 행위이다. 두루뭉술하게 뭉뚱그려서 표현하는 것은 개연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책갈피 앞쪽에 해당된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핍진성인데 이는 갈피 훨씬 뒤쪽에 해당된다. 전체적인 플롯을 통해 개연성이 확보 되면 묘사를 통해 글의 핍진성은 완성된다.
내 식의 예를 들자면 “나는 그 여자가 좋아.”라고 말하는 건 개연성에 머물러 있는 거지만 “코를 찡긋하며 웃던 그 모습에도 미칠 지경이었지.”라고 말한다면 핍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핍진성을 구축하는 데는 더 많은 염력과 생각의 힘을 필요로 한다. 문학 용어에서 나온 핍진성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진실의 정도를 말한다. 있음직한 이야기로 독자를 납득시킬수록 소설로서의 힘을 갖는다. 플롯과 캐릭터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소설 요건이야말로 핍진성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핍진성을 구체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훈련이다. 눈썰미가 없으면 좀 전에 만난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사람을 제 삼자에게 설득시킬 길이 없어 그냥 ‘내 앞에 앉았던 사람’이라고 어물쩍 말하게 되고 만다. 하지만 눈썰미를 훈련하는 경우라면 그가 진자주색 털조끼를 입은 데다, 짧은 단발이었다는 것을 금세 기억해낼 수 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훈련하면 글썰미(?)도 생겨나고 나아가 핍진성 획득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눈에 띄는 진자주색 털조끼와 지나치게 짧은 단발을 한 사람을 묘사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성격이 특이한데다 단호한 면이 있음을 독자에게 알려줄 수 있게 된다. 구체적 정황을 담은 묘사 덕에 독자의 공감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믿게 하는 원동력은 핍진성이고 그것을 얻으려면 끝없는 연습의 힘 외의 방법은 없다는 걸 김연수 작가의 귀띔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4. 허삼관매혈기 대 허삼관
하정우 감독 · 주연의 영화『허삼관』덕에 위화의『허삼관 매혈기』도 덩달아 관심을 끈다. 위화 작가만큼 독자의 신뢰를 얻는 작가도 드물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라는 다소 긴 에세이를 읽은 것을 계기로 단박에 위화의 팬이 되었다. 그의 글 느낌에 대해 유행하는 신조어로 표현한다면 ‘웃프다’ 정도가 될 것이다. 자연스런 웃음을 유발하는데 결코 웃고만 있을 수 없는 슬픔의 격조가 서린 위엄이랄까.
『허삼관 매혈기』에도 그런 그의 문체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문학적 풍자에 관련된 모든 것을 이 한 권의 책에서 맛볼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인 소설이다. 해학, 촌철, 골계, 익살, 조롱, 패러디, 비장, 엄숙 등의 문체적 속살을 잘 드러내주는 이 소설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영화 『허삼관』도 일찌감치 보러 갔다. 거의 모든 영화가 원작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단순한 관람기가 맞는 이유는 명백하다. 일단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스크린에 다 담아내지 못하는 시공간적 제약이 있다.
영화 허삼관, 의 경우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그 배경을 옮겨 설정하다 보니 중요한 대목인 문화혁명의 광풍 시절이 빠져 버렸다. 한국전쟁 직후라는 배경이 중국의 지난했던 한 시절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허삼관이 시종일관 매혈을 하게 되는 그 장면이 원작 소설만큼 절절하지도 실감나지도 않았다. 원작이 보장하는 확실한 재미 요소인 시대적 · 공간적 배경이 바뀜으로서 이야기의 당위성을 잃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가족 신파 쪽으로만 방향을 틀수밖에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 는 작가가 ‘평등’에 관한 알레고리를 숨겨 놓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말하는 평등은 허삼관의 행동과 말로 표출되는데, 허삼관이 굳게 믿는 평등은 쉽게 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이다. 못된 짓을 한 하소용이 불치병에 걸리는 것도 당연하고, 아내가 지은 한 번의 과오에 복수하는 길은 자신 역시 바람 한 번을 피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방식의 평등이다. 하지만 그 평등마저도 우리는(못 가진 자는)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작가가 숨겨 놓은 평등이란 죽음 앞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성애라는 한 주제를 작가와 감독이 어떻게 달리 표현했는지 궁금한 이들은 두 작품을 비교 감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5. 방과 밥
가족을 이뤄 산다는 것은 방과 밥을 완성하는 일이다. 편히 쉴 수 있는 우리들만의 공간, 꾸밈없이 마주할 수 있는 가족을 위한 밥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 갖춘 노래이다. 하지만 순간순간 그걸 잊고 살 때가 많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의 심심함이야말로 최상의 버라이어티 쇼였음은 상실의 고통을 맞이한 후에야 알게 된다.
자책과 상실과 극복에 관한 토론 거리를 준비하느라 본「아들의 방」영화가 너무 먹먹하다. 이탈리아 항구 도시, 상담의인 지오반니 가족은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의 일상을 엮어간다. 휴일 아침 아들과 조깅을 하기로 했지만 응급 환자의 호출에 응하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새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갔던 아들은 익사하고 만다. 함께 있어주지 못한 죄책감에 지오반니는 주저앉는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천직이었던 지오반니도 자신의 상처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내와 딸의 상실감도 만만찮다.
아들의 죽음이 있기 전 그들의 식탁은 평화와 안식의 상징처였다. 무탈하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들이 죽기 전까지는 결코 알지 못했다. 식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무너져 내린 가족의 식사 장면 앞에서 심장이 조여 오는 통증을참아야 했다.
아들의 여자친구의 등장으로 그들에게도 치유의 기회가 생긴다. 안드레아의 죽음을 모르는 그녀는 안드레아가 찍은 그의 방 사진을 보여주며 그 방을 보고 싶어 한다. 아들의 방을 함께 둘러보면서 새삼 그 아이의 존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알게 된다. 남은 가족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온다. 그녀의 방문을 계기로 지오반니 가족은 진정으로 안드레아를 떠나보낼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동행인과 히치하이킹 중인 그녀를 배웅하다 보니 프랑스 국경까지 오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안드레아를 놓아줄 수 있게 된다. 죄책도 비탄도 상실도 애도도 결국 자신이 극복해야 된다는 것 더불어 평범한 날의 한 끼 밥, 무탈한 날의 소박한 공간이 얼마나 최상의 행복 조건인지를 가슴으로 알게 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