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서정가제 유감

 

  당분간 나의 책 사는 주기는 느려질 것이다. 도서정가제 때문이다. 사두면 좋겠다 싶은 것은 정가제 시행 전 대폭 세일하는 기간에 마련해두었다. 하지만 느려진, 책 사는 주기를 평소대로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귀차니즘’과 친구인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것보다 집안에 편히 앉아 클릭 몇 번으로 책을 사는 쪽을 선호한다. 당분간 옛날만큼의 할인폭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 때문에 인터넷에서 책 사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책을 사는 게 여전히 ‘편리하고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 시행의 가장 큰 명분은 ‘동네 책방 살리기’이다. 그간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높은 할인율과 무료 배송이라는 매력적인 마케팅으로 그나마 열악한 대한민국 독서 시장을 휩쓸다시피 했다. 동네 서점들은 소리 소문 없이 문을 닫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계란과 바위의 싸움에서 당국이 계란 편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계란이 타조알 된다고 바위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15퍼센트 이내로 도서 할인율을 제한한다지만, 편법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간접할인이라는,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모든 패들을 동원할 것이다. 카드·통신사와의 제휴, 마일리지 지급율 인상 및 다양한 적립금 이벤트, 매혹적인 경품 잔치, 여전한 무료 배송 등을 내세워 기존의 고객을 유지·확보하게 될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간 만큼의 책값 이익은 영세 출판사나 동네 서점까지 가닿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네 책방 살리기라는 명분은 무색해지고 만다.

 

 

  도서정가제 시행의 ‘속 깊은 뜻’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책이라는 문화적 특수 공산품의 할인율을 당국이 설레발치며 규제한다는 게 어쩐지 맞지 않다는 생각뿐이다. 규제해서 약자나 소비자가 덕을 볼 수 있으면 좋은 시스템이지만, 규제해서 강자가 덕을 보거나 모두가 부담을 느끼는 시스템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직은 지켜볼 단계지만 도서정가제가 본래의 취지에 가닿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2. 엄마에 대하여

 

불안하면 확인하게 되고, 미덥지 못할수록 보채게 된다. 고구마를 구우면서 하마나 익었을까 젓가락으로 찔러대는 건 행여 그것이 탈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영화 보러 가자는 약속을 몇 번이나 다짐 받는 건 상대에 대한 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관심 가면 불안해지고, 마음 주면 보채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스스로 보채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한없이 평온하고 미더운 상태, 그건 에로스적 사랑의 본질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거짓 감정이다. 에로스의 속성에는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 과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구속함으로써 내 불안을 자초한다. 지루하면서도 다이내믹한 감정 소모가 이어진다. 한 마디로 진실로 사랑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랑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의 특질이다. 그 사랑의 불꽃은 종국엔 재만 남긴다. 그 재는 안타까이 오래 가는 성질의 것도 못 된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허용된 감정 안의 유한성의 사랑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이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시공간에서 자유롭다. 오직 사랑이란 본질 자체에만 기댄다. 따라서 그 사랑은 무심하다. 모든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 그 꼭대기에 무심함에 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기에 불안도 집착도 없다. 범접 불가한 그 사랑의 대상 1호는 내게 ‘엄마’이다. 애증이란 검증을 거칠 필요조차 없는 사람, 집착과 연민에서 자유로운 완전무결한 대상. 그러기에 이토록 무심하고도 뻔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덜 사랑할수록 영원히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진짜 사랑하면 그 말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 사랑을 확인하고 집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하면 한없이 무심해질 수 있다. 그 사랑이 곧 내 마음인지 스스로도 잊을 만큼 항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변명 같지도 않은, 늙은 엄마에 대한 이 직무 유기 사유서를 엄마는 이해할 것이다. 근데 무심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면 이런 반성문조차 필요 없는 거 아닌가.

 

 

 

 

3.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에

 

퍼즐 맞추기식 소설은 집중도를 요한다. 아귀 착착 맞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작가는 독자에게 그 어떤 친절도 베풀지 않는다. 처음부터 집중해서 읽어라, 는 작가의 한마디 충고만 있어도 독자는 바짝 긴장해서 읽을 텐데. 실은 그러한 충고를 충실히 따른다 해도 그 게임의 승자는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 칼자루를 쥔 자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짜놓은 작가의 그물망에 독자는 걸려들게 되어 있다. 독자는 작가의 펜 끝을 따라갈 뿐이다. 하지만 그 게임에 말려든 들었다고 독자로서 억울할 것인가.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작가가 의도한 바에 걸려들어야 제대로 읽은 게 되니까.

 

 

퍼즐 맞추기식 소설의 약점은 독자로 하여금 자칫 그것이 ‘의미없다’ 라는 평을 낳기 쉽다는 거다. 하지만 곱씹으며 꼼꼼하게 읽는다면 분명한 보상을 준다는 매력 또한 숨길 수 없다. 보상의 형태는 ‘충격’과 ‘여운’이다. 진부하고 평범한 두 낱말이지만 이보다 더한 작가에 대한 찬사가 어디 있겠나.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다시 읽는다. 볼 때마다 새롭게 눈길 가는 곳이 나온다. 오늘은 등장인물 사라 부분을 퍼즐 맞추기 해본다. 딸 베로니카의 남자친구 자격으로 놀러온 토미에게 그녀는 추파를 던졌을까. 작가는 직접적인 답 대신 묘사와 대사로그 정황을 중계해준다.

 

 

베이컨 요리를 만들려고 허둥대는 가운데 노른자 하나를 터뜨리면서도 토니를 관찰하는 장면, 서랍장에 몸을 기대며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마라고 뜬금없이 하는 말,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 토니에게 다른 화제로 말머리를 돌리는 일, 바란 적 없는 토니에게 계란을 하나 더 얹어주는 행위, 달궈진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에 던져 넣고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피어오르자 파괴적인 웃음을 터뜨리는 것, 둘만의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토니를 향해 미소 짓는 일, 손을 높이 들어 흔드는 게 아니라 허리께에서 수평이 되게 들어 작별 인사를 함으로써 토니로 하여금 좀 더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아쉬움을 유발하는 것. 급기야 “어머니 멋지시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베로니카에게 하게 되는 토니.

 

 

작가는 이 모든 디테일한 정황들을 소설적 장치로서 활용한다. 묘사와 대사로 이루어진 이런 것들은 주인공들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단서가 되고, 주제로 나아가는 밑돌이 된다. 처음 읽을 때는 그것들이 잘 안 보인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음미하면서 눈과 마음이 동화되다 보면 작가의 의중까지 파악된다. 하지만 소설을 누가 두세 번 되뇌며 읽기를 즐긴단 말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야만 그 의미가 제대로 맞물린다는 작가의 인터뷰에 호의적인 독자라면 이 퍼즐게임 같은 철학 소설에 한껏 빠지게 될 것이다.

 

 

 

 

4.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관계 망에서 언어만큼 자신의 위치를 잘 말해주는 것도 없다. 맘만 먹으면 우리는 십 분 이내에 관찰 대상자의 현재 계급 지도(地圖)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대상자들끼리 쓰는 언어 속에 모든 계급적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을 목표를 삼는 게 민주주의라지만 현실적 시스템은 그것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문자 생활이 발전되고 세련될수록, 인류는 계급의식을 의식적 · 무의식적으로 고착해나갔다. 인간 운명의 공통적 질서는 미개하고 야성적인 사고를 개조하는 일이었다. 문자가 그것을 가능케 하리라는 믿음이 일차원적인 사유보다 더 높은 의식적인 사고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의식을 낳았고, 자연스레 계급의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착하다’라는 말을 예로 들자. 그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쓰는 말은 되지만, 아이가 어른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티나가 ‘우리 시어머니 참 착해요.’라고 목젖 꺾인 하이톤 콧소리로 말할 때 우리는 별 뜻 없이 크게 웃어젖힐 수 있다. 그 웃음은 착하다, 는 말의 사회적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이방인에 대한 아량을 담고 있다. 그것은 착하다, 는 말의 계급적 한계를 무의식중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반면에 선하다는 말은 어른, 아이 구별하지 않고 쓸 수 있지만 대개 전자에 더 많이 쓰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낱말의 영어 뜻은 같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그 둘의 쓰임새는 사전적 풀이부터 묘하게 다르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를 때 착한 것이 되고, 거기에 도덕적 판단 기준이 더해지면 선한 것이 된다. 단순히 어른(권력)의 질서나 요구를 잘 따르면 착한 것이 되고, 거기다 도덕적 판단이란 막을 거르면 선한 것이 된다. 따라서 계급 언어의 산물인 착한 것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아도 좋다. 요구하면 따르고 부탁하면 들어주는 일방적 착함 대신, 부당하면 거부하고 곤란하면 거절하는 판단의 선함도 나쁘지 않다.

(* 이 페이퍼는 <곰곰생각하는 발님>의 최근 페이퍼를 읽다가 공감하는 바가 있어 작성한 거임.)

 

 

 

 

5. 본성을 거스르는 노력

 

좋은 소식은 실바람처럼 잔잔하게 오지만, 나쁜 소식은 강풍처럼 휘몰아쳐 온다. 몇 백 명이 동시에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낮지만 몇 백 명이 동시에 수장될 확률은 높다.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솟아나는 기적은 일어나기 힘들지만,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현상은 심심찮게 목도한다. 나쁜 소식 뒤에는 꼭 인재(人災)라는 말이 따라 붙고, 이는 자연스레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로 연결된다.

 

 

인간은 어질고 의롭게 태어났을까. 성선설의 근간을 이루는 인의(仁義)가, 말하기 좋은 당위의 사유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제 인간 깊숙한 곳에는 욕망이나 본능 같은 실체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나치기 때문이다. 인의는 타고난 자연적인 본성이 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다. 그런 착실한 성정이 선천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면 왜 인간은 욕망에 허덕이고 본능에 몸부림 칠 것인가. 배고프면 밥 찾고, 추우면 껴입고 싶고, 힘들면 눕고 싶고, 예쁘면 갖고 싶은 게 인간의 욕구이다. 자연스런 이런 현상은 인의라는 고상한 명분 앞에서 결코 주눅 들거나 꺾이지 않는다. 성악설이 성선설에 비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효도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은 선천적 범주가 아니라 인위 즉 교육이나 훈련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맹자의 성선설은 이성적 이상의 사유에 속하는 것이고, 순자의 성악설은 현상적 현실의 결과를 말해준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 큰 고민 없이 성선설보다는 성악설 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래야 어제오늘 벌어지는 여러 ‘나쁜 뉴스’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제게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 쾌락을 주는 것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 본성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성악설의 요지이다. 그 인위의 힘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 세상은 나쁜 소식들로 넘쳐난다. 본성이 선하다는 허상의 믿음 대신 본성을 개조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훨씬 현명하다. 스스로를 연마하는 현실적 자세의 중요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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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1-2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정가제 시행전에 책을 사두긴 했지만, 조만간 구입할듯요.
동네 책방이 과연 살아날까 의문입니다. 어쨌든 인터넷 서점은 15%는 디씨해주니까요.
차라리 도서관에서 책 구입할때 지역업체에서 최대 15%만 할인하는 법을 만드는것이 현명하겠지요. 정가제 시행전에는 경쟁으로 인해 35%에 납품했거든요.

다크아이즈 2014-11-23 07:57   좋아요 0 | URL
그런 방법이 있네요.
정가제 시행전 지역 업체들 울며겨자먹기였겠어요. 할인폭이 넘 커서...
지역 업체도 살리고 동네 책방도 살릴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지 도서 정가제만 덜렁 시작한다고 해결이 될까요?

일요일, 뭐해요? 나들이 가시는 거죠?
보림이도 한가해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