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갑질도 배운다
‘갑질’도 배운다.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약자에게만’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게 갑질의 특징이다. 저녁모임 자리가 있던 식당에서였다. 두 여종업원이 한 조가 되어 서빙을 했다. 한 명은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외국인 출신 베테랑이었다. 그런데 선배격인 외국인 종업원은 아르바이트생을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했다.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며 매서운 눈초리와 어눌한 목소리로 훈계를 했다. 숯불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다며 ‘저리 비켜. 뒤로 나와!’ 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모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뭐라 마땅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갑질도 배우는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이국에서 온 그녀가 처음 일을 배울 때 혹 누군가로부터 저런 ‘갈굼’을 당하지 않았을까.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배운 며느리는 못된 시어머니가 될 공산이 크다. ‘반면교사’ 하기보다 ‘모방하기’ 어법을 따르는 건 얼마나 익히기 쉬운 학습법인가. 자신이 당한 설움을 고대로 어리바리하고 순진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달콤한 복수인가. ‘더 약자인 동료’를 괴롭혀 내 아픔을 위로받는 건 얼마나 적절한 보상인가.
‘어눌한 일솜씨’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저래도 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옆 친구가 거들었다. “괜찮아, 일주일만 지나면 저 관계도 역전될 거야.” 그때 얼음덩이 하나가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 일주일 뒤 자신의 운명을 그 이방인은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통 기한 촉박한 권력의 맛을 가장 실감나게 소진하기 위해 그미는 저토록 발악에 가까운 갑질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 순진한 아르바이트생 천사도 언젠가는 초강력 여전사임을 마다하지 않는 현재 자신의 입장을 능가하게 되리라는 원초적 두려움 같은 것, 그것이 그녀를 거친 언행으로 내몬 것은 아닌지. 애초에 불공정한 게임에 들어선 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는 갑질을 배우는 것 밖에 없었으리라는 이 당혹감.
2. 입술 헤르페스
또 입술이 부푼다. 전날부터 입술 주변이 간질간질하고 머리가 무지근해지더니 어깨와 팔뚝으로 통증이 몰려왔다. 따뜻한 곳에 등을 대 지지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쓰러지듯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입술에 기포가 생기고 발갛게 흉이 나기 시작한다. 구순포진이 도진 것이다. 몸이 앓거나 맘이 고달프면 자주 입 주변에 물집이 퍼지고 이내 헐곤 했다. 이 하찮고도 귀찮은 증상은 달갑지 않은 친구처럼 불쑥불쑥 찾아와 내 일상을 휘젓는다. 젊은 시절부터 쭉 그래왔다. 시험을 앞두고는 치통과 함께, 사랑을 앓으면서는 두통과 함께 슬며시 따라붙던 것이 이젠 만성증상이 되어 버렸다.
‘몸이 앓거나 맘이 고달프면’이라는 저 전제는 오랜 경험에 비춰볼 때 조금 수정해도 좋겠다. 내 경우 단순히 몸이 아픈 것만으로는 구순포진이 생기지 않는다. 반드시 맘까지 아파야 입술이 부풀어 오르게 된다. 맘에 사무침이 있거나 괴로움이 스미면 육체적 피곤으로 연결되고 몸은 그것을 감지해 나쁜 신호를 작동한다.
“밀려오는 파도 말고 밀려나가는 파도가 힘이 세고 매듭 묶이는 일보다 매듭 풀리는 일이 더 유혹이라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때로 휘청거리곤 하는 것이다. 그만 저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러다 그대와 함께 무너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잠복되어 있는 헤르페스 균을 도발하는 저 마음의 괴로움을『몰락의 에티카』에서 뽑은 이 말과 연결해본다. 담아야 하는데 멀리 밀려가고, 묶어야 하는데 쉽게 풀려버리는 게 사람 사는 일의 과정이다. 놓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리지도 못하는 그 틈새에 마음의 병이 서린다. 그게 ‘보통 사람의 보편적 정서’이다.
몸만 가벼이 아프면 한 사흘이면 족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아무리 가벼운 증상이라도 몇 주는 헤매야 한다. 몸 가벼이 아픈 것은 아프지 않은 것과 같지만 마음 아픈 것에는 가벼움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누군가 부푼 입술로 나타나거든 저이는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마음이 피로한 것이구나, 보아도 무방하다. 천형처럼 ‘나았다 도졌다’를 반복하는 입술 헤르페스.
3. 배려도 지나치면
딸내미랑 집 근처 단골 미용실에 들렀다. 젊은 부부가 오순도순 꾸려 나가는 곳인데, 아내의 일손을 돕기 위해 남편은 직장에서 야간일만 전담할 정도로 성실하다. 내가 염색을 하는 동안 딸내미는 신문을 뒤적이며 기다렸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텔레비전에서 CNN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영어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염색약 냄새 때문에 골머리가 아픈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참을만했다. 원체 신뢰감을 주는 부부인데다, 오죽하면 손님 앞에서 저 방송을 틀었을까 싶었다. 남편분 직장에서 승진 시험을 앞두고 영어 듣기 공부를 하겠거니 하고 짐작했다. 손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방송은 딸내미가 파마를 마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못내 모른척했다.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심정이 웬만하면 이해하자,는 감정보다 훨씬 절실할 것임을 알기에.
드디어 미용실을 나서는 시간, 열심히 사는 부부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승진 시험으로 영어를 치르나 봐요? 공부하려면 힘들겠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여사장님 눈이 동그래졌다. “따님이 그 방송 틀어놓은 거 아니에요?” 맙소사! 미용실에서 영어 방송을 들어야할 만큼 절박한 일이 딸내미에게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런 무례를 범할 만큼 대범한 아이도 못되었다. 부부가 동시에 말을 이었다. “우린 따님이 영어 공부하려고 틀어 놓은 줄 알았어요.” 한다.
다시 필름을 돌려 보자면 이렇다. 테이블에 놓인 신문 밑에 리모컨이 있었고 그것이 딸내미 팔꿈치에 눌려 저도 모르게 CNN 방송으로 채널이 바뀐 모양이었다. 딸내미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미용실 부부는 딸내미가 영어 공부하려고 그랬나 보다 했던 것. 나는 나대로 미용실 남편분이 영어 공부를 하나 보다 하고 넘겨짚은 것이었다. 까딱하면 서로 오해할 뻔했다. 오늘의 결론? 배려도 지나치면 오해를 낳는다. 그러니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는 거다. 단, 그 순간도 배려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4.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 위안이 있다 / (···) /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이란 시의 부분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에 꽂힌 후 폴란드 시인에 대해 더 검색하던 중 알게 된 시인이다. 쉼보르스카에 비해 덜 서정적이지만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진실에 가닿으려는 시인의 노고가 강풍에 흔들림 없는 나무둥치 같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자신의 희곡「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석쇠도 필요 없을 만큼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라고 일갈했다. 갇힌 공간에서 서로 욕망에 뒤엉키고 비애감에 젖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발설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촉수가 적나라하리만큼 발달한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가 그런 시선을 유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타인이 지옥인 이유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관심 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다. 어린 아기조차도 누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품는지, 누가 자신에게 적대적인지 본능적으로 구분할 줄 안다. 달리 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를 어릴 때부터 무의식중에 학습하는 것과 같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내 삶의 욕망과 비애가 타자와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는 그 절정의 순간에 타자를 지옥으로 인식하고 탄식하게 된다.
하지만 진실로 우리가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말은 자가예프스키의 단언처럼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라는 것. 타인을 만나 지옥일 때보다 타인을 만나 천국일 때가 일상에서는 훨씬 더 많다. 깨끗한 하루의 시작점, 누군가의 맑은 이마를 보며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부정의 언사보다 긍정의 언사이기 쉽다.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 타인은 아름다움일 때가 훨씬 많다. 자가예프스키의 이런 긍정의 독백에 시선이 가는 아침이다.
5. 행복한 카뮈
사람과 사람 사이는 상호보완적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좋은 제자는 스승이 만들고, 훌륭한 스승은 제자가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알베르 카뮈는 좋은 제자였고, 그의 스승인 루이 제르맹과 장 그르니에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루이 제르맹은 알제리 빈민가의 한 소년을 노벨 문학상 작가로 거듭나게 한 첫 번째 스승이었다. 궁핍한 살림을 꾸렸던 카뮈의 어머니는 초등과정을 마친 카뮈를 상급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당시 알제리 하층민 소년들은 노동자가 되어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부 열망으로 가득 찬 카뮈를 제르맹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카뮈의 어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성심껏 지도해주었으며, 장학금을 받고 중학교에 갈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선생은 소년 카뮈에게 글 쓰는 재능과 남다른 통찰력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아봤던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탄 카뮈가 어머니 다음으로 제르맹 선생을 호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장 그르니에 또한 카뮈에겐 잊을 수 없는 스승이다. 카뮈는 선생을 신뢰했고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신에게 기쁨이라고 편지를 썼다. 스승의 산문집『섬』에도 그 유명한 서문을 썼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이를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로 시작하는 카뮈의 서문은 그의 명성 덕에 스승의 산문집 자체보다 더 유명한 것이 되어버렸다. 진작 카뮈는 그 서문이 적힌 책을 받아 보지도 못한 채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사고 소식에 가장 먼저 달려온 이가 스승 장 그르니에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살다 보면 도처에 스승이 가득하다. 나를 이끌고 채찍질하는 모든 이는 루이 제르맹이요, 내게 충고하고 쓴 약을 주는 모든 이 또한 장 그르니에다. 내 곁에서 크고 작은 자극을 주는 모든 스승들을 하나하나 불러내고 싶은 밤이다. 카뮈의 행복에 견줘도 좋을 만큼, 제 곁 스승을 확신하는 당신이라면 이 깊은 밤 맘껏 행복해도 괜찮다.
6.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J·D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에는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앤톨리니 선생이 주인공 홀든 콜필드에게 성추행을 하는 장면,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콜필드의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 센트럴 파크 연못의 겨울 오리를 걱정하는 콜필드의 유머 깃든 순정이 깃든 장면 등이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학교 선생의 성추행 장면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묘사로 작동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하는 콜필드의 대사 장면은 그 장면 자체를 작가가 책 제목으로 뽑았을 만큼 순수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센트럴 파크의 겨울 오리를 걱정하는 콜필드의 마음이다.
“센트럴 파크에 있는 연못을 지나가 본 적이 있으세요? 센트럴 파크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연못이요. 아주 작은 연못이 있어요. 오리들이 살고 있는 곳 말이에요. 오리들이 그곳에서 헤엄을 치고 있잖아요. 봄에 말이에요. 그럼 겨울이 되면 그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스쳐 지나는 인연에 지나지 않는 택시 기사 호이트 아저씨에게 콜필드가 한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 저런 엉뚱한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런 의문은 동심이 풍부한 어릴 때나 그것을 잃어버린 어른이 되었을 때나 별 차이 없이 생겨난다. 살다보면 아주 익숙한 풍경인데 그 풍경이 느닷없이 낯설게 보이고 그 ‘낯섬’에 급기야 한 점 재기발랄한 의문이 생길 때가 온다.
아주 작은 연못에 오리들이 복작댄다. 봄의 기지개를 시작으로 조금씩 발길질하던 오리는 한여름의 풍성해진 자맥질을 지나 소요 없는 겨울을 맞이한다. 겨울을 맞이한 오리는 더 이상 연못에 머물 이유가 없다. 헤엄칠 물이 다 얼었기 때문이다. 그 많던 오리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제비처럼 따뜻한 남쪽나라로 간 것일까, 스님처럼 동안거에 든 걸까. 아주 작은 연못의 겨울 오리떼는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숨은 오리떼를 찾아 나목의 숲을 헤매는 담담한 풍경, 그것이 겨울이란 계절의 존재이유이다.
7. 겨울강
박남철 시인이 떠났다. 시적 성과로 ‘쩡쩡’ 울렸던 만큼 크고 작은 악행으로 ‘쩡쩡’ 울기도 했을 시인이 끝내 세상과 등졌다. 투병으로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시인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연민한다. 이제 편해졌으면 한다. 저자에 오르내리는 시인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여성 입장에서 분노하고 피해자 입장에 동조하던 그 마음조차 내려놓기로 한다. 모든 걸 떠나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온전히 너그러워진다는 건 살아남은 자로서 가장 하기 쉬운 애도법이다.
“겨울강에 나아가 /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 돌 하나를 던져 본다 /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 쩡, 쩡, 쩡, / 돌을 튕기며, 쩡, /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 쩡, 쩡, 쩡, 쩡, 쩡 / 강물은, 쩡, /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아, 쩡 / 봄이오면 녹아 흐를 것들아, 쩡, 쩡, /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흘러버릴 것들이 / 쩡, 쩡, 쩡, 쩡, 쩡 / 겨울 강가에 나아가 /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 본다 /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서 제 / 바닥에 닿을 돌들을, / 쩡 쩡 쩡 쩡 쩡 쩡 쩡”
시인의 대표시「겨울강」을 필사한다. 누군가 말했다. ‘악행보다 더 나쁜 건 위선’이라고.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눈썹이 떨리고 옆구리가 결릴 만큼 뜨끔해진다. 숱한 위선의 행적 앞에서 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행을 저지르기는 어려워도 위선을 행하기는 얼마나 쉽던가. 밥 먹듯 위선을 떨면서도 떳떳한 척할 수 있는 건 그 거짓이 간접적인데다 비겁함은 어느 정도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문 악행을 하고도 떳떳할 수 없는 건 그 공격성이 직접적인데다 치명적인 상처를 안기기 때문이다.
겨울강이 제 아무리 쩡쩡 얼음장 조이는 소리를 내도 강은 강이고 물은 물이다. 얼음 위, 던져진 돌들은 마법이 풀리듯 봄 오면 기어이 바닥에 가 닿는다. 겨울강을 내려다본다. 아직 얼지 않은 저 물빛, 악행보다 위선을 경계한 시인의 눈물인양 따끔거리듯 반짝이며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