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엔트메리-공항 가는 길-
아무도 없는 파란 새벽에
차가운 바람 스치는 얼굴
불안한 마음과 그 설레임까지
포기한 만큼 너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공항과 유난히 인연이 많은 인생인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 아기였을 때 그 옛날 김포공항 활주로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기억난다. 난 어머니 팔에 안겨 있을 정도로 자그마했고
그때 사진속에 나온 인물들은 아주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가신 외삼촌일가였다.
그렇게 멀리 떨어졌던 분들은 종종 한국에 나오면서 왕례를 하게 되었다.
이제 80이 넘으신 외삼촌은 하와이를 마지막 삶의 터전으로 삼으셨다고 한다.
고생도 많이 하셨고 장남을 먼저 떠나 보내시며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을 내신 분..
건강하시길 바랄 뿐..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 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나에게 있어서 그 사촌형은 어떠한 기억도 존재감도 없다. 다만 가끔씩 보내오는
사진을 통해 어엿한 가장이 되었고 한 사내아이의 아빠, 한 계집아이의 아빠로
성장하는 모습만을 접하게 되었다. 수십년이 흐른 후 한국에 인연이라고는 없는
그 분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귀향을 하셨다. 암투병.
이미 말기진단을 받은 상태셨지만 질긴 생명의 줄을 놓기에는 미련과 후회가
많으셨기에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나 보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암병동 한 침상에서 만난 그 분은 많이 초췌해 보였다.
힘들고 버거운 몸인데도 불구하고 내 손을 잡으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많이 컷다고
대견하게 날 바라보던 그 분...
결국 난...
한달 후 그분을 푸른 새벽길 공항 수화물 창구에서 알미늄 관에 갖혀진 상태로
작별을 하게 되었다.
어색한 미소 너의 뒷모습
조금 상기된 너의 얼굴
이젠 익숙한 공항으로 가는 길
가족 중에도 공항에서 작별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찬 누나는 아버지 몰래 유학 준비를 했고 하필 내가 대입시험을 치른 날 선언을 했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아버지는 끝까지 반대하셨으나 결국 누나의 의지를 꺽진 못하셨다.
그렇게 공항에서 유학을 떠나는 누나를 배웅하며 난 이상하리만큼 눈물이 안났다.
단지 집에 돌아와서 표현이 불가능한 상실감이 몰려왔을 뿐..
불안한 마음과 그 설레임까지도
포기한 만큼 너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전공과가 아니였던 그 녀석은 단지 건축이 하고 싶어 무모하리만큼 편입을 고집하였다.
편입 후 성이 안찼는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유학을 가게 되었다.
아끼는 후배 녀석이였기에 공항에 배웅을 하러 갔었다. 바리바리 가족들이 챙겨준
짐은 결국 가뿐하게 오버되버렸고 공항 바닥에서 그 녀석을 도와 짐을 해체하고 다시
싸는 일을 거들었다. 유학생활을 준비하는 짐...연고도 없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다는
텍사스로 떠나는 그 녀석의 가방은 여행이 아니였기에 참으로 잡다했다.
옷짐속에 끼여있다 삐져나와 요란하게 울렸던 자명종 때문인지 녀석의 긴장은
약간 풀리는 듯 했다. 어깨 툭 치며 "잘 될꺼야 임마"란 상투적인 인사를 건냈다.
여태까지 선배라고만 불렀던 놈이 "고마워요 형" 하며 작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가볍게 날 안아주었다.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 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왕복으로 기백만원이 드는 미국행 비행기를 편법이라면 편법일수 있는
해외입양 에스코트를 통해 저렴한 가격에 가게 되었다. 처음 들어보는 도시로
비행기를 3번 갈아타고 근 하루를 꼬박 비행기와 공항에서 보냈다. 애를 안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고 파란눈에 인종이 틀린 이 애의 양부모는
마치 오랫동안 떨어진 자기자식을 만나는 것처럼 기뻐하고 감격한다.
애를 떠나보낸 나는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잠안오는 예민함에 미국에서의 첫날밤을
뜬눈으로 지샜다. 그 애기....잘 살고 있겠지....
언젠가 우리가 얘기하던 그 때가 그 때가 오면
어릴적 우리 얘기하며 우리 또다시 만나길
내년 1월말엔 또 다시 공항에 나가봐야 한다. 아직 5달이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