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집에서 밥이라도 먹을라치면 평소 쓰던 큼지막한 성인용 숟가락이 아닌 원래 쓰던 것의 반 정도의 용량을 보유하는 자그마한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고 있다. 이 숟가락의 원래 주인은 다름 아니라 지금 미국에 유치원 입학을 빙자한 외유중인 주니어의 것이다.

모유수유를 잠깐하고 이유식용 티스푼 용량의 수저와 분유병을 끼고 살던 녀석이 어느덧 무럭무럭 자라나 이젠 아빠 수저의 반 정도 되는 용량의 수저를 들고 넙죽넙죽 밥도 잘 먹었고 지나치다 싶으면 아빠 밥까지 뺏어먹는 욕심까지 부렸더랬다.

갑자기 수저의 용량이 줄어든 이유는 내 아버지의 방침 때문이었고 그 방침이 다분히 미신스럽고 신용스럽지 않다 치더라도 내 자식 편하라고...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애비의 심정 때문이라도 지금의 그 수저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누나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결국 현지 교포인 아버지 친구 아들과 눈 맞아 결혼해버렸지만.) 뒷바라지를 위해 자주 미국으로 출타를 하시던 어머니의 숟가락으로 식사를 하시곤 하셨다. 이유는 지금 내가 주니어의 수저로 밥을 먹는 이유와 같았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장기간 출타 중인 그 가족의 수저로 밥을 먹고 국을 떠야 외지에 나간 가족이 밥 굶지 않고 편안하게 지낸다는 아버지의 이론 혹은 구전 되어오는 이유 때문이었다.

6.25 전쟁 중에 징병나간 외삼촌을 기다리던 내 외할머니가 그러하셨고 그의 사위인 아버지가 그러하시고 그 아들인 내가 그러하고 있다.

당분간 집에서 먹는 밥이 조금은 불편할지 모르더라도 10번 떠서 먹을 밥 한 공기, 국 한 사발을 15번, 20번 떠먹는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리라. 건강하고 밝게 잘 먹고 잘 성장해 준다면 손가락으로 먹으라 그래도 그리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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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7-08-09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 부성애가 물씬 풍기는 페이퍼입니다. ^-^ 주니어 보고싶어서 어떻게 참으세요?
갑자기 어버이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나네요..;; 저도 주니어가 건강하고, 밝게 성장하길 바랄께요. 그런데.. 마지막에 등장한 손가락을 숟가락으로 읽은 것은.. 저만 인가요? 으흐

Mephistopheles 2007-08-09 01:00   좋아요 0 | URL
저는 제가 오타낸 줄 알고 화들짝 놀라 살펴보기까지 했습니다...그런데..흘려 읽어보니까 숟가락으로 보이기도 하네요..ㅋㅋ

2007-08-08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09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inpix 2007-08-08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이유가 있군요. 저도 나중에 누군가의 숟가락으로 먹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따뜻한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ㅁ'/

Mephistopheles 2007-08-09 01:02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아버지가 알려주시더라구요 평소 어머니 외국에 출타중일때 안 알려주시다가..^^

춤추는인생. 2007-08-08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메피님 감동이예요.. 쥬니어가 나중에 그사실을 알수 있도록 증명사진이라도 남기시는게 어떠세요?^^

Mephistopheles 2007-08-09 01:02   좋아요 0 | URL
아...그 놈 어쩌면 자기 수저로 밥먹었다고 징징거릴지도 모릅니다...ㅋㅋ

비로그인 2007-08-08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리 떠난 사람의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그런 의미가 있는줄 몰랐어요.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는 글이네요.

Mephistopheles 2007-08-09 01:03   좋아요 0 | URL
가까히 있어주지 못하니까 일종의 대리만족같은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그래도 이런거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면 불편해 죽겠다 정도가 아니라면 행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해적오리 2007-08-08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메피님의 따땃한 마음이 느껴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네요. 갑자기 돌아가신 아빠도 보고 싶어지고...

Mephistopheles 2007-08-09 01:04   좋아요 0 | URL
아주아주..우리 해적님은 마음에 눈물 많은 소녀 하나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니까요..^^

프레이야 2007-08-0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그런 깊은 뜻이 담긴 숟가락의 내력, 감동입니다.
숟가락은 생명을 떠서 입에 넣는 행위가 담겨있어요. 숟가락을 놓는다,라는 말이
저세상으로 간다는 말과 동의어이듯이.. 오늘 부엌에 있는 숟가락들을 다시 봐야
겠어요.^^

Mephistopheles 2007-08-09 01:05   좋아요 0 | URL
숟가락이라는 문화 자체가 동양권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전한 문화라서 그런지 좀 유별한가 봅니다.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남자는 바람핀다 라는 소리도 있잖아요..ㅋㅋ

무스탕 2007-08-0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아부지는 어려서부터 어딜 가게되면 자신의 수저가 아니라서 밥먹는게 고역이었답니다. 오죽하면 외가에 갈때도 수저를 들고 갔다는군요 -_-;;
메피님의 글을 읽으니 제가 어디 멀리가면 울 아부지, 딸래미 생각하며 제 수저를 사용하실까 궁금해 졌어요 ^^

Mephistopheles 2007-08-09 01:05   좋아요 0 | URL
음...아마도 두 수저를 번갈아 쓰시지 않으셨을까 추측됩니다만..^^

마노아 2007-08-10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성애를 넘어 인류애가 느껴져요. 주니어 건강히 밥 잘 먹고 있을 테지요^^

Mephistopheles 2007-08-09 01:06   좋아요 0 | URL
으허허 인류애까지...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가 자식생각하는 마음은 다 똑같은 거겠죠..^^

라로 2007-08-0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질서가 있는 집안에서 자라셨군요~.^^;;;
사랑과 애뜻함이 묻어나는 페퍼 잘 읽었어요..
우리가 아주 작은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이 기도가 되는게 아닐지..

Mephistopheles 2007-08-09 01:07   좋아요 0 | URL
어찌보면 가장 밀접한 가재도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곡기를 섭취하는 도구이다 보니까요.

마늘빵 2007-08-08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그럼 집에 혼자 계신겁니까?

Mephistopheles 2007-08-09 01:08   좋아요 0 | URL
메피님은 집에 혼자 있지 않습니다. 메피님은 마님과 함께 있습니다 아울러 아버지도 계십니다..아버지는 올해 말에 출국 예정이시지만요.^^

마늘빵 2007-08-09 10:33   좋아요 0 | URL
앗, 그렇군요. 그럼 쥬니어만 떨어져있는거군요.

짱꿀라 2007-08-09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한수 배우고 갑니다. 사랑이 지극히 묻어나는 페이펍니다.

Mephistopheles 2007-08-09 01:09   좋아요 0 | URL
설마설마...집떠나와 객지에서 직장생활 하시는 산타님이..사모님께 이제부터 내 수저로 밥먹어요 알았죠 꼭 내 수저로 먹어야 해요 네?~~ 하시진 않으시겠죠..^^

보석 2007-08-0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정말 부성애가 느껴지는 마음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Mephistopheles 2007-08-09 23:31   좋아요 0 | URL
하핫..부성애라뇨 평상시 잘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다보니 숟가락이도..^^
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