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만두님이 움직그림을 주셔서, 생각난 김에 자동차 타고 제주도 여행이나 가자.

 (그런데 자동차에 탄 사람, 마립간인가 아니면 마립간 여자 친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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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10-09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오른쪽의 동그란 넘(?)이 마립간님 아녜요?
(그나저나 되게 오랜만이네요. 제가 격조했어요, 그죠?)

물만두 2004-10-0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여자같기도 하고... 하지만 전 마립간님처럼 멋진 남정네라 생각할래요^^ 조끼가 가죽이잖아요. 팔에 문신도 있구... 여행 잘 다녀오세요. 여자친구랑요^^

sweetmagic 2004-10-20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낮인거 같은데 라이트 끄고 가세요 ~ ㅎㅎㅎ
 

* 개나리

 우리나라에 봄이 되면, 분홍 빛의 진달래와 노란 빛의 개나리. 개나리는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개나리가 어느 순간, 멸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개나리는 양성화이나 이형예현상(장주화, 단주화가 있음)을 갖는 식물로 수분에 의해 번식하는 방법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씨에 의한 재배는 거의 이루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꺾꽂이의 재배되고 있습니다. 씨에 의한 재배와 꺾꽂이,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전자의 다양성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유전자가 동일한 개나리에 치명적인 어떤 바이러스가 발생하게 된다면 대부분의 개나리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종할지도 모릅니다. 자연보호나 환경보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죠. (이런 상황에서 개나리를 자생식물로 분류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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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10-0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서 흔히 보는 개나리는 장주화나 단주화 중의 어느 하나인데, 어느 것인지 모르겠네요. 혹시 알고 계시는 분, 알려주세요.

마냐 2004-10-12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워낙 어려운 질문인가봐요...암튼, 궁금해서 검색했더니..

"장주화는 암술이 수술보다 긴 것이고, 단주화는 반대로 암술이 작아서 커다란 수술에 둘러 싸여 있는 겁니다.

음... 영리하신 분은 물론 예상하셨겠지만, 이 두 종류의 꽃이 서로서로에게 꽃가루를 날려보낸다는 군요....그렇게 해서 좀더 다양한 개나리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그로 인해 환경변화에 따른 멸종 위기에 대처한다는 좀 거창한 의미도 있더군요.
...만약 지나가다가 장주화가 핀 개나리를 보셨다면, 근방에는 분명히 단주화를 피우고 있는 개나리가 있다는 말씀이죠..."

흔히 보는 장주화 개나리 옆에는 단주화가 있고, 둘이는 함께 살아간다니...음..영영 답을 못드릴듯 합니다. ^^;;;


마립간 2004-10-1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이 말씀하신 것이 거의 맞기는 한데, 마지막에 말씀하신 장주화, 단주화 개나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현재는 틀린 이야기입니다. 근대화가 되기 전에는 장주화와 단주화의 수분에 의해 개나리가 번식했는데 (이때는 지금 처럼 개나리가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근대화 이후 사람이 인위적으로 꺾꽂이해서 번식시킨 이 후로는 둘중에 하나만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환경에 대해 이해와 실천이 나아지는 때는 '둘이 함께 살아가길 기대합니다.'
 
집단 정신의 진화
하워드 블룸 지음, 양은주 옮김 / 파스칼북스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진화에 관한 네트워킹의 역할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세 가지 개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자아 또는 정체성으로 대변될 수 있는 meme의 개념과 방법적인 접근에 있어서는 스파르타의 방식과 아테네 방식의 비교, 그리고 복합 적응 시스템complex adaptive system입니다. 그리고 저의 가치관의 한계가 아직 플라톤Platon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서양의 학문은 뉴턴Newton에 이르기 까지 플라톤이 벌려 놓은 일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지만...

 아테네는 다양성, 수평적, 민주주의(개인주의), 자유주의, 국제주의(세계화), 성장주의, 상업주의 등의 방법을 택하였고, 스파르타는 통일성, 수직성, 전체주의(집단주의), 권위주의, 고립주의(지역화), 저성장주의, 군국주의 등의 방법을 택하였습니다. 저자는 환경이 좋을 때와 나쁠 때에 따라서 그 환경에서 그 집단(meme의 하나)이 생존하는 우월적인 방법이 다르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책은 네트워킹을 통한 공생을 강조합니다. 다양성의 확보와 정보의 교환이 진화의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meme이 한번 형성되면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는 행위가 있고, 너희에 대한 적대적 행위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 meme의 확장이 필요한데 개인, 가족, 국가 그리고 각각의 문화의 한계를 넘는 meme, 즉 인간의 도덕성으로 인류 전체에 대한, 그리고  자연을 포함한 meme의 확장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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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10-08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라는 생물학의 개념을 이용해서 '집단정신'을 풀어내는 저자의 통찰력과 솜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조집행자, 다양성생성자, 내부심판관, 자원이동자, 집단간토너먼트, 이 다섯 가지 개념은 meme을 보다 구체화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빨리 하워드 블룸의 다음 저작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 다원주의

 많은 알라디너는 다원주의를 추구하며 자유주의 추구합니다. 제가 잘 아는 알라디너 한 분은 스스로를 다원주의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다원주의는 다른 모든 가치들 위에 군림하는 특정가치, 특히 ‘좋은 삶’에  관한 특정 과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분명 자유와 개인의 자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상정한다. 따라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 자유주의는 공허한 논리체계로 전락한다.

(서병훈 교수님의 글이 인용되었습니다.)


 만약 다원주의를 인정한다면 이슬람 문화에서 존재하는 가족에 의해 행해지는 ‘명예 살인’은 다원주의에 근거한  다양한 문화로 볼 수 있는가? 만약 이런 다원주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면 그 근거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자유주의


 상위 권력체계에 대한 하위체계(개인)의 자유를 최상 덕목으로 생각하시다면 전체적 조화를 위해 강제되는 한 예, 고교평준화는 학생의 학교 선택의 자유를 억제하며 종교적 포교를 목표를 건학이념을 학교를 세우는 것도 불가능한데... 교육 평등을 목표로 한 국가 강제되는 교육제도는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합당하게 받아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좀 더 쉬운 예로 건강보험의 강제 가입, 국민 연금의 강제 가입, 자동차 책임보험의 강제 가입은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허용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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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10-0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다원주의가 꼭 특정 가치를 우위에 두지 않는 걸 의미하는 걸까요? 이건 다원주의를 좀 극단적으로 해석한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원주의는 무가치주의(허무주의?)와 별단 다르지 않을 테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다원주의는 옳다/그르다 혹은 좋다/나쁘다 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락음악을 좋아하고 락음악만을 듣더라도 클래식음악 또한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죠. 문제는 관용의 한계를 어디까지 설정하느냐 하는 것과 또 이 한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개입하게 되는 개인이나 집단, 혹은 나라의 주관의 합리성을 어떻게 확보하는냐 하는 것인데, 두 가지 모두 무척 어려운 문제입니다. 마립간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다보면 어떤 기준을 세우는 게 어려워지니까요. 결국 지금의 저로서는 극단을 피하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중용과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는 애매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네요. 제가 에코를 좋아하는 이유중 하나가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균형을 잡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가을산 2004-10-0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원주의와 자유주의는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병훈 교수님이란 분을 제가 모르지만, 이 글의 맥락으로 보아, 개신교 입장을 다원주의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립간님께서는 서병훈 교수님의 논리에 동의하십니까?

"특정 과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와 "다원적인 과점의 존재를 인정한다" 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만..

그리고, 이슬람의 '명예 살인'은 이슬람의 본질이 아닙니다.
마치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들이 이슬람 문화를 파괴한 것이나, 중세 마녀 사냥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듯이요.

그리고, 갈대님의 댓글에 대부분 공감합니다. 다원주의의 단점까지를 포함해서요.
그래서 저는 늘 어느 한 체제나 교파나 이데올로기, 계층을 대변하지 못하는 '회색인'입니다.

마립간 2004-10-08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 빨리 댓글을 주셨네요.^^
갈대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사용한 다원주의는 정확한 개념의 용어로 사용하면 상대주의가 더 합당합니다. 현재 사용되는 다원주의 용어의 개념에는 인간성, 자유, 평등에 관해서는 우월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우월적 지위(저는 이 지위를 권위라는 용어로 사용합니다.)의 근거가 궁금합니다. 상대주의보다는 다원주의가 제가 하고자 뜻을 잘 반영할 것 같아 일부러 오용하였습니다.(죄송) 저는 이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저의 가치관이 플라톤의 이데아를 철학을 벗어나지 못 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락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선악비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원주의자들은 공통기준판별불가능incommensurabiliity라고 합니다.

마립간 2004-10-08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 좋은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을산님, 위 글은 서병훈 교수님이 쓴 글을 인용하면 저자를 밝혔지만 서병훈 교수님의 주장은 아닙니다. 그리고 종교와 관련된 글도 아닙니다. 저는 수리철학에서 절대주의를 의지하고 싶지만 제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아마추어는 절대주의를 믿고 수학에 전문적 지식이 있는 분들은 상대주의를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다른 가치관에서도 절대주의를 믿고 싶지만 상대주의가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이라는 것에 의혹이 있습니다. 현재로서 합리적인 방법은 다원주의자(상대주의자가 아닌) 주장하는 바와 같이 몇 가지 가치관(인간성, 자유, 평등)에 우월적 지위를 두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저 역시 이것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철저한 상대주의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있기 때문에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택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수라 밝혔던) 그 근거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예살인'을 이슬람의 본질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문화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일컬은 것입니다.

가을산 2004-10-0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종교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에는 논리나 이성적인 면 뿐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 문화,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여러 가지 면이 있기 때문이죠.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해도, 남의 신앙에 대해 개입하는 것은 가능한 피합니다.

마립간님의 글들을 보았을 때, 상당히 논리적이지만, 그리고 저도 논리적이고자 노력하지만, 서로 무언가 논리의 체계가 다른 듯한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이런 것의 기저에는 의외로, 무의식에 자리잡은 전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저의 느낌입니다. 이런 경우는 이론이나 논리로 합의점을 찾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같은 사실, 같은 정보를 접하고도 종종 그 해석은 전혀 딴판으로 나올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마립간님과의 이야기는 늘 흥미롭습니다.
제가 저의 생각을 좀 더 잘 내보여드리고, 마립간님의 글에 대한 시시콜콜한 제 생각을 나누고 싶지만, 시간상, 그리고 제 표현 능력상 제약이 많습니다. ^^



 
 전출처 : 밀키웨이 > 노인과 여인

 


 

루벤스의 "노인과 여인"


"Caritas Romana"라고 하는 테마로 그려진 그림인데 이 테마가 2001년에 굉장히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서야 이 그림을 본 저는 참 시대에 뒤떨어졌구만요 ^^
하여간..이 그림에 대한 글로 그 저자를 모른채 둥둥 웹을 떠돌고 있는 글이 있습니다.



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관에는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 한 작품이 걸려 있다.
방문객들은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유스러운 애정행각을 그린 이 작품에 불쾌한 감정을 표출한다.
이런 싸구려 그림이 어떻게 국립미술관의 벽면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미술관의 입구에...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노인의 부도덕을 통렬히 꾸짖는다. 의아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푸른 수의를 입은 주책스런 노인과 이성을 잃은 젊은 여성은 가장 부도덕한 인간의 한 유형으로 비쳐지고 있다.
작가는 도대체 어떤 의도로 이 불륜의 현장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일까?
이 그림은 정말 3류 포르노인가?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은 분명히 젊은 여인의 아버지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는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 해 감옥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음식물 투입 금지'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다.
딸은 해산한 지 며칠 지나서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노인과 여인>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다.
동일한 그림을 놓고 사람들은 '포르노'라고 비하도 하고 '성화'라고 격찬도 한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그림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한다.
사람들은 가끔 본질을 파악하지도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우를 범한다.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진다. 교만과 아집 그리고 편견을 버려야만 세상이 보인다..



그런데 저 글에 대한 반대글도 만만치 않게 떠다니고 있습니다.
이 역시 작자미상...ㅠㅠ


2001년도 즈음에 푸에르토리코 국립 미술관의 현관에 걸려 있다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제목의 저 그림에 대한 감동적인 해설이 유행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림에 숨은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야 하듯, 우리의 일상에서도 교만과 아집, 편견을 버리고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가 어떤 곳인지 안다면 "국립" 미술관이란 표현에 좀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에서 그려진 그림이 현대적이기는 커녕 왜 저렇게 르네상스 풍인가?

진상은 이렇다.
감옥에 갇혀 굶어죽게 된 아버지를 딸이 자기 젖을 먹여 살려 내었다는 것은 맞다.
문제는 이 감동적인 얘기가 현대의 푸에르토리코가 아니라 고대 로마(!!!)의 것이라는 점이다.
서기 30년경, 발레리우스 막시무스(Valerius Maximus)가 쓴 Facta et dicta memorabilia 에 실려 있는 얘기로, 아버지의 이름은 Cimon, 아버지에게 젖을 먹인 딸의 이름은 Pero라고 하는데, 딸의 이 숭고한 행동에 감동한 당국은 결국 아버지를 석방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그린 그림을 Caritas Romana 라고 부르는데, 고대 로마에서는 벽화로도 많이 그려질 정도로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이 주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 뭔들 자취를 안 감추었으랴만 --- 인간의 육체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던 르네상스 시대부터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그림이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연스러운 애정행각을 그린 3류 포르노 작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관심"에서 보듯, 이런 그림이 어느 정도의 에로틱한 면을 포함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 이 그림을 보고서 에로틱한 상상을 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오히려 Caritas Romana를 보고서,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투사라는 식의 황당한, 이념 과잉의 왜곡된 해설이야 말로 더 큰 잘못일 것이다.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진다"라는 말은 "푸에르토리코의 국립 미술관" 운운하는 엉터리 해설에 되돌려 주어야 할 말이 아닐까?

참고 문헌: The Female Breast as a Source of Charity: Artistic Depictions of Caritas Romana

(영어가 되시는 분은 http://www.hait.ac.il/staff/boazT/balaseng.htm 에 가시옵소서...저는 못 갑니더...)

그리고 문제의 그림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Rijksmuseum에 있는 Rubens의 작품이다. 도대체 어디서 "푸에르토리코 국립 미술관"이니 "푸에르토리코의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이니 하는 말이 나온 건지... -_-


Caritas Romana라고 하는 저 테마의 다른 그림들도 있네요 ^^
무식한 저로서는 작가가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요.
도데체 사람들이 왜 그림만 덜렁 올려놓는고야...ㅠㅠ
최소한 작가는 알려줘야징...
그런데 저도 요 바로 밑에 걍 제목도 없이 그림만 줄줄줄 올려놓습니다...찔린당...-_- ;;;

 

 

 

 Charles Mellin

 


Lorenzo Pasinelli

 



Jean-Baptiste Greu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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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10-0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쓰기 위해 그림을 포토샆을 손을 보고 글을 다 쓰고 나서 혹시 다른 분이 글을 올리지 않았나 해서 검색을 해 보니 밀키웨이님 같은 내용의 글을 이미 올리셨네요. 이런!

마립간 2004-10-09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있는 아프리카 어느 부족...

기자가 어느 할아버지에게 : 여러 부인을 거느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할아버지 : 오래 동안 여러 부인을 거느려 와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 날은 이 부인과 생활하고 다른 날은 다른 부인과 생활하는 것도 재미있지? 나중에 법이 정해져 한 부인만 가져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어느 미국 방송사에서 아프리카의 어는 부족의 일부다처제를 취재하고 시청자로부터 부정적인 느낌을 갖게 만드는 TV 쇼가 있었습니다. 굳이 서구의 시각이 아닌 우리 한국 사람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부도덕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양성 평등을 주장하는 분들에게는 더욱 더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이 곳에서 일부다처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순수하게 육체노동의 의해서만 경제생활이 가능한 이 곳에서는 여성 단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성 평등을 위해 이곳은 반드시 산업화 현대화해야 할까요?

깍두기 2004-10-08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벤스가 웬 푸에르토리코....? 하면서 쭉 보니 아니군요.
마립간님이 쓰신 댓글의 아프리카 부족 이야기를 보니 갑자기 <키리냐가>란 책이 생각나는군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는지는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puzzlist 2004-10-17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대글"은 제가 썼습니다. ^^

마립간 2004-10-19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zzlist님, 가끔 나타나셔서 저를 놀라게 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