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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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등장한 '말'이 그 말이었구나. 

'모두 다 예쁜 말들'이 떠오른다.

어떤 나무의 말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9쪽

뿌리로부터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10쪽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
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나는 물거품 속으로 들어간다

이 해변에 이르러서야
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의 눈동자,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18쪽

호모 루아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하얀 입김을 피워 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으로 가능해요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지요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

———
* Homo Ruah. 'Ruah'는 히브리말로 ‘숨결’ ‘입김’을 뜻함
-24쪽

아홉번째 파도

오늘 또 한 사람의 죽음이 여기에 닿았다
바다 저편에서 밀려온 유리병 편지

2012년 12월 31일
유리병 편지는 계속되는波高를 이렇게 전한다

42피트···쌍용자동차
75피트···현대자동차
462피트··영남대의료원
593피트··.유성
1545피트··YTN
2161피트···콜트-콜텍
2870피트···코오롱유화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려 보낸
수많은 낮과 밤, 그리고 계절들에 대하여
망루에서, 광장에서, 천막에서, 송전탑에서 나부끼는 손에 대하여
떠난 자는 다시 공장으로, 공장으로,
남은 자는 다시 광장으로, 광장으로, 떠밀려가는 등에 대하여
밀려나고 밀려나 더 물러설 곳이 없는 발에 대하여
15만 4000볼트의 전기가 흐르는電線 또는 戰線에 대하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불빛에 대하여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처럼
끝없이 다른 파도를 몰고 오는 파도에 대하여
결국 산 자와 죽은 자로 두동강 내는
아홉번째 파도에 대하여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젖은 종이, 부서진 문장들,
그들의 표류 앞에 나의 유랑은 덧없고
그들의 환멸 앞에 나의 환영은 부끄럽기만 한 것

더이상 번개를 통과시킬 수 없는
낡은 피뢰침 하나가 해변에 우두커니 서 있다
-74쪽

잉여의 시간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오후 네 시의 빛이
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
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
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

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
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
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
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

잉여의 시간 속으로
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

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
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

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
두고 온 집이 떠오르고
너의 시간 속에 있던 내가 떠오르는데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 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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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9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4-07-29 21:45   좋아요 0 | URL
예! 꼭 필요해요. 4.16 특별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