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독서 - 욕망에 솔직해지는 고전읽기
이현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2월
품절


삶이 권태에 빠지는 이유는 시골에 살아서만은 아니고, 무능한 남편 때문만도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 탓도 있습니다. 권태는 중산층 부르주아의 정서입니다. 그보다 상류층이거나 빈곤층이라면 권태롭지 않아요. 빈곤층은 먹고살기 바쁘니까 권태로울 여유가 없고, 상류층은 정치 활동이나 사교 활동이 많아서 일상생활을 관조해볼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중간층이 문제입니다. 중산층은 대개 먹고살 만은 하지만 아주 풍족하지만은 않은 상인 집단입니다. 권태라는 건 이렇듯 특정한 사회적·시대적 조건 아래 발생한 것입니다.
-25쪽

출산은 엠마에게도 현실에 만족하면서 주저앉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입니다. 육아를 하며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다른 일은 잊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엠마는 아이를 직접 보지 않고 유모에게 맡기는 바람에, 주저앉을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놓칩니다. 하층민은 직접 아이를 돌보지만, 중산층 이상은 보통 유모가 대신 돌보죠. 어머니는 아이를 가끔 보러 갈 뿐이에요. 육아도 하지 않고, 노동도 하지 않으니 남은 시간은 권태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변변찮다면 더더욱 그렇게 됩니다.
-27쪽

톨스토이 작품에서는 ‘적게 먹고, 가급적이면 육식을 자제해야 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어요. 채식주의를 주장한다기보다 육식에 반대하는 것인데, 이유는 육식을 통해서 많은 열량을 얻으면 에너지가 남아도니까 욕정을 품게 되고,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절식을 해야 하고, 그래도 에너지가 남으면 노동으로 소진해야 합니다. 톨스토이에게 도덕적 삶이란 그런 구체적인 삶입니다. 로렌스는 도덕에 대한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건강한 욕정을 억압하는 게 오히려 부도덕하다고 생각해요. 자연적인 본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건강이라고 봅니다. 로렌스가 쓴 편지를 보면 톨스토이를 꽤나 탐독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렌스는 《안나 카레니나》같은 작품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두 작가가 모두 성을 중요한 문학적 화두로 다루지만 결론은 서로 다릅니다.
-97쪽

《햄릿》은 행수로 따지면 약 4000행 정도 되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런 평도 가능했을 겁니다. 존 판던의 인용입니다.

마음이 어지러운 젊은이에 관한 멋진 희곡이다. 그런데 이 젊은이의 지독한 우유부단함 때문에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할 연극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나 4시간을 넘겨버렸다. 거의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수준이었다. 연극이 절반 정도 지났을 때 나는 이렇게 소리칠 뻔했다. 빨리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인다!
-138쪽

이 작품이 길어지는 건 복수가 ‘지연’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햄릿》을 복수극이라고 하지만 한마디 덧붙여야 합니다. 복수 ‘지연’극이라고요. 이 작품은 부왕에 대한 복수가 왜 지연되는가에 대한 드라마입니다. 마지막에 가면 정작 복수는 금방 끝나는데, 5막까지 가는 모든 내용이 복수 지연입니다. "왜 복수는 지연되는가?" 이게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풀어야 할 수수께끼입니다.
-139쪽

우리는 흔히 ‘곱게 미치라’고 충고하지만 돈키호테는 ‘숭고하게 미친’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돈키호테의 모험담을 마주하게 되면 광기 없는 삶이란 무난한 공허에 불과한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일상의 안락에 파묻혀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불쌍한 몰골’로 비칠 때 우리는 다시금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풍차를 향해 돌진해가는 이 방랑기사의 피가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다면요.
-193쪽

《마담 보바리》에서 권태의 원산지는 프랑스라고 했었죠. 덧붙이자면 우울증은 영국산, 광기는 러시아산이라고 하고요. 이런 감정들도 일종의 문화 상품들로, 장신구를 수입하듯이 수입해오는 겁니다. 보통 그걸 전파하는 것이 문학작품인데, 푸슈킨도 독서 경험을 통해서 권태로운 주인공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냅니다.
-204쪽

파우스트의 비극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게 된다는 건데, 사실 요즘은 비극의 내용이 달라졌다고도 합니다. 현대인의 비극은 내 영혼을 사줄 악마가 없다는 거라나요.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고 하잖습니까. 단, 계약 조건이 좀 특이하죠. 일도 해주고, 영혼도 파는 거니까요.
-209쪽

《돈 후안》의 원산지는 스페인입니다. 스페인에서는 ‘돈 후안’, 프랑스와 영미권에서는 ‘돈 주앙’이고, 이탈리아에서는 ‘돈 조반니’입니다. 한편 푸슈킨 작품에서 돈 후안은 ‘돈 구안’이라고 불립니다. ‘돈 후안’을 러시아 식으로 읽은 발음인데 ‘돈 주안’이라고 부르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에 시인의 의도가 가미돼 있습니다. ‘구’라는 발음이 러시아어 뉘앙스로는 ‘죽음’과 연관됩니다. 돈 후안의 파멸로 끝나는 작품의 결말을 미리 암시한다고 할까요.
-230쪽

헤어지면서 돈 구안은 돈나 안나에게 키스를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돈나 안나가 키스를 해주며 "자, 여기 이렇게"라고 말하는데, 러시아어로 키스는 남성명사라서 원문에서는 "여기 키스가 있어요"란 문장이 "여기 그가 있어요"로 표현됩니다(영어로 옮기면 "Here he is"입니다). 교묘한 이 중의적 의미 역시 푸슈킨의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가 옵니다. 기사단장의 석상이죠.
-250쪽

돈 구안이 손을 내밀며 "자, 여기……"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돈나 안나의 "자, 여기 이렇게"와 대구를 이룹니다. 러시아어로 손은 여성명사라서 "여기 손이 있네"라는 돈 구안의 말은 "여기 그녀가 있네"라고 표현됩니다(영어로는 "Here she is"입니다). 여기서도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죠. 결국 돈 구안은 돈나 안나를 남겨두고 죽음을 맞습니다.
-251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3-08-30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의 팬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책은 거의 다 구해보았는데, 철학에 관한 책 두 권은 조금 어려워서 못 시작하고 있네요.

마노아 2013-08-30 08:50   좋아요 0 | URL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주 쉽고 재밌게 설명해 주셨어요. 로쟈님이 은근 유머 감각도 있으시다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답니다. 다른 책들도 도전해야겠어요. 일단 쉬운 것부터요~ ^^
 
신나게 자유롭게 뻥! - 황선미 인권 동화, 중학년 베틀북 오름책방 6
황선미 지음, 정진희 그림 / 베틀북 / 2013년 7월
장바구니담기


내 책상 서랍, 내 지갑, 내 일기장, 내 메일, 내 컴퓨터 검색창 같은 것 좀 마음대로 뒤지지 말라고 나는 대들지 않는다. 다른 엄마들처럼 엄마도 직장에 다니면 좋겠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어떤 잔소리가 쏟아질지 뻔히 아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이란 고작해야 음식 깨작거리기, 뭉그적거리기, 말 안 하기, 멍하니 있기 정도. 덕분에 엄마는 나를 좀 게으르고, 느리고, 입이 짧고, 숫기가 없는 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착하다고.-18쪽

"너 요즘 수상해. 그깟 축구공 같은 것에나 정신 뺏기고 말야."
잔소리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이번만큼은 가슴이 쿡 찔린 것처럼 아프다.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지. 엄마를 미워하기는 싫은데.-28쪽

그때까지 나는 잘 몰랐다. 내 심장이 어떤 건지. 터질 듯 벌렁거리고 아프기도 한 심장이 나한테도 있었던 것이다. 진짜 살아 있는 내 심장. 바보처럼 그걸 처음 깨달은 날이었다. 내가 나라는 걸 알게 해 준 짧은 시간. 심장은 누구한테나 있는 거지만 진짜 내 심장은 그날 다시 태어났다. 그게 그 축구공을 내가 가져야만 하는 이유다.-36쪽

내 통장은 제법 묵직하다. 저금통이 다 차거나 돈이 생길 때마다 은행에 저금했으니까. 그러나 손도 못 대는 돈. 대학 입학금으로 써야 된다나. 엄마는 늘 그랬다. 미래를 위해 오늘은 다 참아야 된다고. 놀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친구도, 졸린 것도 다. 나에게는 미래만 있고, 오늘은 없는 것이다.-37쪽

"필요한 건 엄마가 알아서 다 사 주잖아."
아, 이제 알았다. 나는 바로 이게 싫었다. 나한테 필요한 걸 왜 엄마가 알아서 사 주느냔 말이다. 갓난애도 아닌데. 뭘 고르고 선택할 권리 정도는 내게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47쪽

"어리구나. 넌 공부해야 할 어린애야."
라힘은 바느질하며 생각했어요. 일 대신 공부를 하면 누가 돈을 벌까요.
"공부해야 삶이 바뀐단다."
지금 일하지 않으면 가족이 굶어 죽을 거예요.
"너에게도 보호받고 공부하고 놀 권리가 있단다."
권리.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논다는 말은 알아들었어요.
일거리가 줄어들면 형들이랑 가끔 놀기도 합니다. 바느질이 잘못돼서 망친 공을 차지요. 그나마도 너덜너덜해졌지만 어린 일꾼들에게 그건 아이처럼 뛰어놀 수 있는 시간을 줍니다. 하지만 시간을 그렇게만 보내면 누가 가족의 끼니를 책임질까요.-1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여자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3년 7월
장바구니담기


젊은 사람에게 '젊음'의 우월함을 안겨주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젊었을 때 그렇게 대해주면 기뻤으니까.
누군가 젊음을 부러워해주는 건 기쁘다.
자신에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그래서 사실은 특별히 부럽지도 않지만 젊은 사람에 대한 서비스.
나는, 젊은 나로 돌아가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좋다. -68쪽

이런 때에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는 안 된다.
수다 떨면서 기분을 풀기에는 이르다.
상처받은 자신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지금은 나를 가만히 내 버려두자.
상처받는 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니까.-95쪽

나, 꼴불견?
아니야. 싫은 부분도 있지만 좋은 점도 있어.
꼴불견인 인간으로 변한 게 아니라 '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거야.
여러 가지가 있어서, 그것이 나라는 인간.
질투도 하고 부러워도 하고 비뚤어지기도 하고
마이코라는 좋은 친구가 있기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기도 하는
그런 나는, 세상에 한 명밖에 없어.

자신 찾기 따위가 뭐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진짜 자신을
자신이 찾아 헤매면 어쩌자는 거냐고.
그러면 자신이 불쌍하잖아.-104쪽

자신의 마음이 보이지 않을 때는 그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 상담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옅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할 것이다.
계속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리고 계속 그렇게 해왔던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여러 모습의 내가 모여서 하나의 내 모습을 만들고 있다.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늘려간다.
그 정도로 괜찮을지도.
합체해서 강해져 가는 나-11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피 패밀리
고종석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월
장바구니담기


책 만드는 게 일이다보니, 저자들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그러면서 글과 사람의 차이에 대해 자주 놀란다. 아니 처음에 자주 놀랐다. 이젠 그런 일을 하도 많이 겪어, 으레 그러려니 한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서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르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거의 예외 없이 실망하게 된다. -11쪽

민형 형에게는 세상에 대한 연민이 있다. 꼭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꼭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숨탄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고양이에게도, 염소에게도, 비둘기에게도 연민을 느끼는 것 같다. 물어보진 않았으나, 그는 아마 어려서도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과 숨탄것들에 대한 그의 연민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에게 자기 연민이 거의 없는 듯하다는 점이다. 때때로 그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 같다. 그의 연민은 오로지 그의 몸 바깥으로만 향한다. 그 연민이 늘 연대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마음의 연대는 몰라도 몸의 연대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순수이성이나 판단력은 그의 실천이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니, 그의 실천이성은 그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격렬한 실천으로까지는 말이다. 그는 늘 자신을 우익이라 말한다. 그건 무슨 겸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자신을 우익이라 여기는 것 같다.-14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 망국 - 오백 년 왕조가 저물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7월
구판절판


청과의 전쟁 명분을 얻기 위해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군은 이로 인해 거세질 조선 내 반일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두 가지 카드를 썼다. 그 하나는 대원군과의 결탁이다. 임오군란 때 군인들도 대원군에게 의지했고 갑신정변 때의 김옥균 일파도 대원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때의 전봉준도 홍계훈에게 보낸 글을 통해 대원군의 국정 보좌를 요구하고 있다. 그만큼 그에 대한 백성의 신망은 드높았지만 청국에서의 억류 생활 4년을 보내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건만 내내 가택연금 상태로 보내야 했다. 권력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울분이 컸을 대원군. 그런 그의 울분을 일본 측이 파고든 것이다. 대원군은 우선 민씨 척족 중에서 평판이 안 좋은 이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대원군에게 허용된 권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삼고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등을 위시한 온건개화파와 유길준, 조희연, 김가진 등의 급진개화파들을 망라해 내각이 짜였는데, 일본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 구성이다. 일본이 꺼내든 또 하나의 카드는 내정개혁이었다. 이를 위해 군국기무처가 꾸려졌다.
-73쪽

가장 참혹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향년 45세. 죽고 나서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죽음이 공식 확인되었고 2년 넘게 지난 고종 34년(1897년) 11월에야 장례가 치러졌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다. 그녀를 만났던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세련되고 지적이며 총명한 여인으로 기억한다. 초대 미국 공사 루셔스 풋의 부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강력하면서도 상대를 압도하는 성격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요. 동양 전체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여성입니다." 왕비 시해에 참여했던 한 일본인은 이렇게 평한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정치력을 지녔지. 멍청했으면 우리가 죽일 이유도 없잖아." 실제 그녀는 정세에 대한 빼어난 이해와 판단력을 지녔고 위기 상황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인아거일을 주도했을 만큼 외교적 안목과 수완도 빼어났다. 그러나 당대 조선인들의 평가는 매우 인색하다. 유길준은 이런 말까지 했다. "그녀는 세계 역사상 가장 극악한 여인!"
-156쪽

이런 부정적 평가의 이면에는 전통적인 편견이 자리하지만(암탉~) 그러나 현실적인 근거들도 충분히 있다. 일단 그녀는 권력의 중핵이었고 그녀에게 기댄 민씨들의 전횡이 있었다. 갑신정변 때 칼을 맞은 민영익은 당시만 해도 선교사 자격으로 와 있던 앨런에게 치료받았다. 완쾌되자 민영익은 치료비 외에 사례로 10만 냥을 더 주었다 한다.(당시 3천냥 정도 유동 자산을 보유하면 서울에서 부자로 통했다.) 갑오개혁 때 탐오 혐의로 유배된 민형식이 끌어모은 돈은 70만 냥에 이르렀다.(1895년 국가 세입이 480만 냥) 그럴 정도로 민씨 정권의 유력자들은 매관매직, 뇌물수수 등을 통해 치부했고 벼슬을 산 이들은 투자비를 뽑기 위해 백성을 쥐어짰다. 삼정은 다시 문란해졌다. 이에 모든 원성은 왕비와 민씨 척족을 향했다.
-159쪽

민씨 정권이 취했던 정책들은 또 어떤가? 개화라는 큰 방향을 잡기는 했으나 장기적 비전을 갖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내정 개혁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잦은 궐내 잔치와 굿판. 누구 못지않게 서양 세계의 실상을 많이 알았고, 그런 만큼 개화된 모습을 보일 법했지만, 굿이나 무당에 의지하는 전근대성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160쪽

이런 일들로 그녀의 정치는 많은 비판을 불렀다. 그런데 이 모든 비판, 즉 민씨 척족의 전횡과 삼정의 문란, 일관성 없는 개화정책, 굿판 등의 구태...... 이 모든 책임은 왕과 왕비 공동의 것이다. 왕비의 조언에 힘입어 친정하게 된 이래 왕은 줄곧 왕비와 정치적 행보를 함께해왔다. 왕에게 가장 두려운 상대는 다름 아닌 아비 대원군. 임오군란은 이를 선명히 확인시켜주었다. 그 뒤로도 세상을 뒤집으려는 이들은 민씨 정권의 타도를 내걸었고 한결같이 대원군과의 연대를 꾀했다. 그 무서운 아비를 상대하려면 왕비의 지혜와 왕비의 일가 사람들이 필요했다. 왕비는 왕의 요구에 충실히 응답했다. 그렇게 왕비는 최대 정적인 대원군과 맞서 싸우는 동맹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요 후원자였다. 말하자면 둘은 정치적 일심동체였다. 때문에 공도 과도 공동의 것이라 하겠다.
-162쪽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 보인 황제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는가 하면 현실론을 펴는 이완용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도 보인다. 돌이켜보면 중요한 고비마다 강단 있는 태도를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황제를 만났던 적잖은 외국인은 이런 평을 내놓았다. "황제는 죽음을 많이 두려워하는 인상." 확실히 황제에게는 위기의 시대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단호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그렇기도 하려니와 지나온 경험으로 볼 때 이해되는 면도 있다. 숱하게 찾아왔던 위기, 그때마다 황제는 몸을 낮추고 입을 다물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반전이 이루어지고는 했다. 왕비 시해 후 숨막혔던 감금생활도 흥분하지 않고 조심스레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극적으로 벗어났다. 그랬던 것처럼 황제는 조약에 반대하고 그 심각성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목숨 걸고 반대하지 않았다. 또 한 번의 반전을 기대하면서.
-270쪽

일본은 귀족령을 만들어 왕실의 혈족과 병합에 공이 큰 이들, 포섭할 필요가 있는 이들 등 모두 75명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렸다. 을사조약의 반대자였던 민영기와 5적에 들지 않았던 이하영도 받았다. 이중 김석진은 작위를 받은 걸 수치로 여겨 자결했고, 자결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조정구(대원군 둘째 사위)를 비롯해 윤용구, 한규설, 민영달, 홍순형, 조경호는 작위를 반납했다. 김가진은 비밀 독립운동 단체의 일을 맡아보다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김윤식, 이용직, 김사준은 뒷날 반일운동을 했다가 작위를 박탈당했다. -305쪽

계속 논의되어온 일이 현실이 된 탓일까? 이미 조정이 친일 일색이었던 때문일까? 재야 사학자 황현이 절명시를 남긴 채 목숨을 끊고 전 러시아 주재 공사 이범진은 전보로 고종에게 유서를 보낸 뒤 거실에서 목을 맸다. 그 밖에도 지방 군수로 있던 벽초 홍명희의 아비를 비롯해 자결하는 이가 더러 있었지만 을사년 같은 격렬한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지배가 10년, 20년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어느덧 식민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갔다. 작위를 받은 이들 말고도 나라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열망했던 이들도 상당수는 점차 일제와 타협해갔다. -307쪽

일본과 맞서 싸운다는 건 너무도 무모해 보였다. 그런데 그토록 무모해 보이는, 승산이 1%도 안 되어 보이는 독립을 위한 투쟁이 35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졌다. 가산을 정리하고 국경을 넘어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꾸리는가 하면, 직접 무장투쟁을 벌였다. 국내에서는 엄중한 감시를 뚫고 지하조직을 구축하며 저항활동을 벌였다. 일제의 탄압은 지독히도 악랄했다. 독립투쟁의 길은 추위와 배고픔, 고문과 투옥, 총살과 교수대, 그리고 가족의 고난과 곤궁이 예정된 길이었다. 그 모든 걸 감당하며 역사 앞에 이름 없이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조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 -30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