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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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11쪽

월식

젊은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달을 따주겠다고 했겠지요

달의 테두리를 오려 술잔을 만들고 자전거 바퀴를 만들고 달의 속을 파내 복숭아 통졸미을 만들어 먹여주겠노라 했겠지요

오래전 아버지 혼자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간 밤이 있었지요 사춘기의 풀벌레가 몹시 삐걱거리며 울던 그 밤,

그런데 누군가 달의 이마에다 천근이나 되는 못을 이미 박아놓았던 거예요 그 못에다 후줄근한 작업복 바지를 걸어놓은 것은 달빛이었고요

세월이 가도 늙지 못한 아버지는 포충망으로 밤마다 쓰라리게 우는 별들의 울음소리 같은 것을 끌어모았을 거예요

아버지 그림자가 달을 가린 줄도 모르고 어머니, 그리하여 평생 캄캄한 이슬의 눈을 뜨고 살았겠지요
-14쪽

빗소리

저녁 먹기 직전인데 마당이 왁자지껄하다

문 열어보니 빗줄기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와서 진을 치고 있다

둥근 투구를 쓴 군사들의 발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

부엌에서 밥 끓는 냄새가 툇마루로 기어올라온다

왜 빗소리는 와서 저녁을 이리도 걸게 한상 차렸는가

나는 빗소리가 섭섭하지 않게 마당 쪽으로 오래 귀를 열어둔다

그리고 낮에 본 무릎 꺾인 어린 방아깨비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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