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양심, 천안함을 추적하다 - 물리학자 이승헌의 사건 리포트
이승헌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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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부 추진체에 300도의 열만 가해졌더라도 잉크는 완전히 타 없어졌을 것이다. 비등점이 이보다 높은 유성잉크나 페인트를 사용했더라도 어뢰 외부의 페인트가 타버릴 정도였다면 내부의 유성잉크나 페인트도 함께 탔을 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외부 페인트가 탔다면 "1번"도 타야 했고, "1번"이 남아 있다면 외부 페인트도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고열에 견딜 수 있는 외부 페인트는 타버렸고, 저온에도 타는 내부 잉크는 남아 있다. -서재정·이승헌

-47쪽

6월 24일경 노종면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정희 의원실에서 합조단에 흡착물질을 요구했더니 천안함 선체의 흡착물질(AM-1)과 어뢰추진체의 흡착물질(AM-II)은 주겠다고 했는데 모의 폭발실험에서 나온 흡착물질(AM-III)에 대해서는 아직 확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뭔가 확실히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다음날 노기자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웃으며 "모의 폭발실험 흡착물질의 EDS데이터가 조작되었군요."라고 말해주었다.

-100쪽

저녁에 서재정 교수와 인터넷전화로 통화를 하다 참여연대 보고서 이야기가 나왔다. 오늘 참여연대가 지난달 발간한 『천안함 이슈 리포트』의 영문판을 유엔 안보리에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나라당과 정부를 위시한 보수진영으로부터 맹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국가적 이적행위"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우익단체 회원들이 참여연대 사무실 앞으로 몰려가 물리적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경찰은 팔짱을 끼고 방관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101쪽

백낙청 교수가 젊었을 때 어떤 분이었는지는 잘 몰랐는데 리영희 선생의 『대화』에 의하면 60년대초 돈과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식들은 다 군대를 빠질 때, 하버드 박사과정 재학중 귀국하여 입대하고 군복무를 마친 분이라 한다.l 또한 스물여덟의 나이에, 그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한 분이 아닌가. (...) 현정부와 한나라당의 고위직 중에서 군 복무를 회피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어찌 백낙청 교수 같은 분과 비교가 되지 않겠는가.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전쟁 불사’를 부르짖고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은 ‘전쟁 불가’를 외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119쪽

정간사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얼마 전에 현 태국정부로부터 국외추방을 당한 탁신 전 수상의 변호사라는 사람이 여기서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그때 태국정부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기자회견 사실이 알려진 후, 한국 정부로부터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항의전화가 여러 번 걸려왔다고 한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한국정부의 이해 부족에 기자클럽에 있는 동료들에게 참으로 부끄러웠다고 하셨다.

-142쪽

"우리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이 주간지 기사가 이승헌 교수님의 소속을 밝혔으니 학교 본부에서 교수님과 가족을 보호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토오꾜오 경찰과 일본 경찰청에 이교수님의 개인정보를 주어야 하는데 동의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처음에 귀를 의심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찰에 협조를 요청한다니.
"토오꾜오대는 이교수님의 보호를 위해 경찰이 필요하면 경찰이 캠퍼스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른 도시로 가는 것은 가급적 삼가시고, 꼭 갈 일이 있으면 며칠 전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일본 경찰청이 그 도시에 교수님의 행적을 미리 알려 보호대책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일본사회의 저력이랄까 하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사회가 이 정도로 개인의 학문적 소신을 지키는 일을 지원해주다니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152쪽

기사에 의하면 러시아 조사단의 결론은 천안함이 먼저 수심이 얕은 해역에서 좌초했고 깊은 물로 가려다가 무언가 사고가 일어나 천안함이 세 동강났다는 것이다. 좌초의 증거들 중 하나는 스크루 날개의 변형상태였다. 이 ‘초기 좌초설’은 이미 『서프라이즈』대표 신상철씨와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 이종인씨가 처음부터 주장했던 건데, 어뢰 공격 이외의 모든 가설은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에 의해 조명받지 못했다. 더구나 그들이 박사학위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 전문가들 또한 똑같은 결론을 냈으니, ‘초기 좌초설’의 신빙성이 더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61쪽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신문지상에서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이 문제는 정권과 보수세력 전체의 존립이 걸린 문제라, 정부의 주장을 계속 되풀이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믿게끔 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을 했을 것이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과학이라는 권위를 빌리면 국민들로서는 믿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 한국 과학계의 나약한 침묵이 또 하나의 이유다. 이 정도로 문제가 제기되었으면,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한국물리학회 같은 공인된 과학단체에서 진실규명을 요구하거나, 직접 실험을 통해서 진실규명을 하겠다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폭발 초기 버블 팽창과정이 가역적인지 비가역적인지는, 아주 기초적인 물리문제이어서 실험을 할 필요도 없는데, 개개인이 익명으로는 발언을 해도 실명으로는 하지 않는 이유는, 현 정부에 밉보이면 연구비가 끊길 것 같아 몸을 사리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이렇게 개인이 하기 어렵다면 공인된 단체가 나서야 하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187쪽

버지니아대학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이 낙향 후에 직접 교정과 건물을 설계하고 세운 학교로 유명하다.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던 제퍼슨은 교정에 유럽풍의 건물과 파도 같은 담장들을 세웠고 곳곳에 아기자기한 정원들을 만들어놓았다.

-235쪽

하나 재미있는 것은 합조단이 발표한 최종보고서에는 실제로는 합조단의 결론을 뒤집는 씨뮬레이션 결과나 EDS데이터 등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합조단 실무과학자들은 양심적으로 모든 자료들을 다 주었고 합조단 고위관계자들은 이를 종합하는 단계에서 자기들에게 불리한 자료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모두 다 보고서에 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여겨졌다.

-240쪽

이과대 학생들의 발표에서 전두환정권 시절의 금강산댐 에피쏘드를 듣고는 새삼스러운 감회가 일었다. 한 학생은 당시 어울대 모 교수가 TV에 나와 금강산댐이 열리면 여의도 63빌딩이 40층까지 물에 잠긴다고 주장했던 예를 들며, 과학이 정치에 부역했던 사례라고 지적했다. 과학자가 자신의 발언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지인으로부터, 10월 28일 합조단 단장을 지낸 윤덕용 교수가 포항공대에서 학부생을 상대로 천안함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강연을 들으면 이수학점을 받을 수 있어서 많은 학부생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교수들도 몇몇 오고 학교 행정관계자들도 왔다고 하며, 또한 포항가속기연구소의 연구원들, 포항공대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 등 소장 과학·공학자들도 다수 참여하였다 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윤교수의 강연 후 토로시간이 매우 격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245쪽

특히 박병규 박사라는 분은 자신의 인터넷 필명이 Gaia라고 소개한 뒤, 데이터 조작이라는 말도 꺼내며 윤교수를 몰아세워 그가 당황해하자, 몇몇 교수들이 원로이신 윤교수께 무례하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는 데 쓸데없는 권위에 기대어, 진실을 추구하는 그 노력을 묵살하려 하는가. 미국에서 학위를 하면 나이에 전혀 상관 없이 지도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존칭 없이 그저 "철수야" 식으로 이름으로 부른다. 이는 단지 우리와 그들의 언어적 차이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고 학문에 있어서 서로간의 평등한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히고 학회나 쎄미나 등 발표 후 토론은 오직 무엇이 과학적 진실인지만을 따질 뿐이다. 이렇게 연령·직책에 대한 권위의식이 전혀 없는 미국 등지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왔을 한국 교수들 중 일부가 권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보면 참 우스울 따름이다.

-246쪽

침몰의 원인에 대한 이러한 진상규명과 함께 병행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데이터 조작 혐의에 대한 조사다. 이 ‘조작혐의’의 진상은 과학의 재현성 때문에 언젠가는 꼭 밝혀질 것이다. 이것은 이명박정권이 한국사회에 준 ‘과학적’ 선물이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간단히 모의 폭발실험을 다시 하면 된다.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현정부에 감사한다. 그날이 오면 한국사회는 명실공히 참된 민주사회라 불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48쪽

과학적데이터의 조작이 국제무대에서 이용된 적도 있는데, 그 결과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 예가, 잘 알다시피,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 직전에 당시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이 유엔에서 이라크에 대량살상용 생화학무기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죠. 당시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유사시 45분 내에 상화학무기를 배치, 발사할 능력을 갖췄다는 식의 보도가 줄을 이었는데요, 이는 뒤에 모두 조작된 정보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7년여 간의 전쟁을 통해 희생된 무고한 인명들에 대한 책임은, 당시 미국과 영국 등에서 무기 자문역을 했던 과학자들에게도 상당 부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제 외교장에서는 이라크전쟁처럼 무언가 결정되고 실행되면, 무수한 인명피해 같은 매우 불행한 결과들을 피할 수 없죠.

-253쪽

이렇게 미국의 경우는 과학자들이 실명을 걸고 과학적 문제 제기를 하는데요, 아마 미국 과학계가 훨씬 크고 다양하다는 점, 그리고 한국에 만연된 인정주의보다는 과학의 존엄성과 엄밀성에 더욱 가치를 두는 미국 과학계의 분위기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에서는 실명을 걸고 남을 비판하면 학계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자신의 연구비나 자신이 속한 조직의 연구비를 따는 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심한 것 같습니다.

-257쪽

이번 국정감사에서 보니 한나라당이 이종인 알파잠수기술 공사대표를 추궁하는 방식은 세가지더군요. 하나는 ‘어느 당이냐?’며 소속을 묻는 사상검증입니다. 둘째는 ‘전문가인가?’라고 묻는 식의 권위주의에 기대기, 셋째는 ‘직접 폭발실험을 해보고 하는 소리냐?’는 식의 태도였습니다. 첫 번째 태도는 거론할 필요도 없는 반인권적 발언이고, 두 번째는 이종인씨는 이 문제에 있어 누구 못지 않은 과학적 탐구정신을 보여주지 않았냐고 되묻고 싶네요. 세 번째는 물리학의 정성적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국회의원과 이를 반복해서 재생하는 언론사들의 무교양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다보니 국민들은 이를 진실게임인 양 결론이 나지 않는 어려운 문제로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265쪽

(이필렬)2차대전이 끝난 뒤 일본의 과학자들은 군사주의에 동참했던 과거사를 반성하며 민주과학자연맹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활동 또한 그들의 독립성이라는 전통에 기여했을 것입니다.

-273쪽

(이승헌)제가 머물던 토오꾜오대 연구소에는 내부 승진이 없습니다. 즉 조교수가 부교수로 올라가려면 다른 대학으로 자리릉 롬겨 그곳에서 부교수가 되어 활동하다, 잘하면 부교수나 정교수로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토오꾜오대에는 쿄또오대 출신이 많습니다. 이러다 보니 교수 집단 내의 패거리정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속된 말로 동종 교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실력은 없어도 내 후배니까 끌어줄게라는 식의 문화는 한국보다 훨씬 적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든, 공대를 나왔든 다른 전공을 했든 실력이 있다면 인정한다는 거지요. 이런 것들이 연구의 자율성에서 중요한 토대가 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274쪽

(이필렬) 교수의 승진 씨스템은 독일과 마찬가지군요. 한국의 경우는 요즘 들어 연구실적을 따지면서 점점 개선되어간다고는 하지만, 오래전부터 내부승진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집단의식이란 것이 생기고 남을 비판하는 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생겨나지요. 더구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 예컨대 천안함사건 등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입장을 드러내기가 그리 수비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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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391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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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휴관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12쪽

날마다 설날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 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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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2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2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안함은 좌초입니다! - 오만가지 거짓말로 덮어버린 하나의 진실
신상철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12월
구판절판


한진중공업으로서는 가장 만만한 게 같은 계열사인 한진해운에서 발주한 선박이었다. 다른 회사 배에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우리 배에 대해서는 툭하면 자재를 바꾸고, 도면 무시하고, 심지어는 계약서나 사양서 내역과는 전혀 다른 설비를 장착해놓고도 막무가내로 버팅기기 일쑤였다.

- 56쪽

함수가 가라앉지 않았다는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다면 함수에 부표를 설치하여 확보했어야 하고 이미 구조된 인원 외에 추가 생존자 확인을 위해 잠수사를 긴급 투입했어야 할 시간을 아무 대책 없이 날려 버린 과오를 범한 것이 된다(실제로 함수에 있던 대원은 모두 구조된 것으로 발표했으나 함수가 최종 인양된 4월 24일 함수에서 사망 대원 1명이 발견되었다).

- 70쪽

천안함 함수는 사고 이후 16시간 22분간이나 가라앉지 않고 있었고, 국방부가 가라앉은 것으로 발표한 시각 이후로도 무려 13시간이나 더 떠 있었다. 국방부는 이런 훤한 거짓말을 통해 뭘 감추고 싶었던 걸까?

- 71쪽

전장 87m의 거대한 배에서 반파된 35m 길이의 함미가 사고 지점 반경 200m 내에, 그것도 수심이 40m에 불과한 곳에 가라앉아 있는데 찾지 못하다가 어선의 도움을 받은 해경의 첩보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 게다가 그 첩보마저 한동안 묵살해버렸다는 것이 쉬 납득이 가는지? 이렇듯 국방부와 해군이 침몰한 천안함을 기를 쓰고 찾지 않으려 한, 그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숨기려한 이유는 뭘까? 무슨 다른 일이 벌어져 그러고 있었던 걸까?

- 75쪽

선박이 좌초하면 반드시 선체에 그 흔적이 남게 된다. 따라서 나는 “천안함이 인양되는 순간 천안함 좌초 여부는 확실하게 가릴 수 있다”고 단언했다. 아이들이 뛰어 놀다가 넘어져도 상처가 남게 마련인데 하물며 1200t의 육중한 선박이 육지에 부딪혔는데 흔적이 없을 리 있겠는가.

- 105쪽

상륙선 등 의도적인 목적을 갖지 않은 선박이 운항 과실이나 천재지변 등으로 인하여 육지(해저지반)에 얹히는 것을 ‘좌초’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로 ‘배가 암초에 얹힘’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대개 ‘단단하고 날카로운 바위에 얹히는 경우’만 연상하게 마련인데 부드러운 뻘밭에 얹히는 것도 좌초다.

- 106쪽

침수가 시작되었다면 좌초된 상태에서 선박을 빼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다. 차라리 좌초된 상태대로 있다면 흙이나 모래가 손상 부위를 막아줘 해수 유입이 상당히 지연될 수 있지만, 좌초된 선박을 빼내게 되면 그 순간부터 수압이 더 세어져 손상 부위로 해수가 급격히 침투하게 된다.

- 113쪽

그런데도 항해장교는 왜 좌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함선을 빼내려 했을까? 참으로 불가해한 의문이지만 유추하건대 야간에 선박이 저수심에 얹혀버린 데 따른 심리적 압박감과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그랬지 싶다. 한편으로는 암초에 부딪힌 것이 아니라 모래톱을 파고 들어간 비교적 부드러운 좌초였으므로 별 손상을 입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 후진으로 빠져나가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항해장교가 좌초 상태에서 가장 먼저 취했어야 할 조치는 함장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러면 함장이 함교로 달려와 확인한 후 함대에 보고하여 구조를 요청함과 아울러 기관장에게 지시하여 보수요원으로 하여금 선저에 심각한 파공은 없는지, 침수가 발생했다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여 그에 따른 합당한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그랬다면 한 사람의 희생도 없었고 배도 무사했을 것이다.

- 113쪽

만약 천안함이 온전한 상태에서 갑자기 반파되었다면 함미는 몇 시간 아니 최소한 수십 분 정도라도 떠 있었어야 한다. 당시 대원들이 격실 내 생존해 있었다면 격실 밀폐로 공기 부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을 것까지 감안할 때 수십 분 정도는 가라앉지 않고 버텼어야 한다는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함미는 불과 3분여 만에 가라앉았다.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바로 천안함이 반파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침수가 진행된 상태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반파와 동시에 엄청난 해수가 유입되면서 함미의 잔존부력을 급속하게 없애버렸다는 결론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 117쪽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 백령도는 서해 5도(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의 하나로, 어떻게 우리 땅이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 인천에서 대략 180km, 쾌속정으로 약 4시간 반 거리다.

- 125쪽

이 해역에서는 바로 별표 위에 있는 저수심 지역은 등대 혹은 해상부표를 설치하여 야간에도 불빛으로 경고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 그리고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의 협수로 역시 유사한 해양교통 안전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천안함 사건에서 우리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백령도 인근 해역에서의 해군 초계임무는 지속될 것이며, 22척의 우리 초계함 역시 같은 해역에서 같은 작전에 투입되어 같은 활동을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실을 밝히는 일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넘어 동일한 사고를 막기 위한 현실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절박한 요청이다.

- 130쪽

기본적으로 피로파괴는 상선(화물선)에서 많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늘 화물을 실었다 풀었다 하기 때문에 엄청난 하중의 변화가 수시로 발생하고 그로 인해 선체 강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피로도가 누적되고 그것이 어느 순간 균열을 일으켜 선체를 절단시키는 손상까지 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군함의 경우 탑재된 중량의 변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통상 군함이 피로파괴로 침몰했다는 사례는 해난사고 역사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 133쪽

합조단 발표 내용을 요약하면 “탄약고·연료탱크 에 손상이 없고 전선 피복상태가 양호하므로 내부폭발 아니며, 선저에 긁힌 흔적이 없고 소나 돔 상태가 양호하므로 좌초가 아니며, 절단면이 복잡하게 변형되어 있으므로 피로파괴가 아니며, 선체 내·외부에 폭발에 의한 그을음이나 열에 의해 녹은 흔적이 전혀 없고 파공된 부분도 없으니 비접촉폭발”이라는 것이다.

- 138쪽

참수리 357호는 연평해전에서 북한 경비정의 포격을 받고 침몰했다. 따라서 ‘좌초가 아니라 포격에 의한 침몰’이다. 함선이 좌초하지 않았을 경우 선저 상태가 어떠한지를 참수리 357호가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천안함) 선체가 가라앉아 해저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다 보니 바닥에 손상이 생겼다는 합조단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참수리 357호가 잘 대변하고 있다. 참수리 357호는 천안함과 마찬가지로 서해 조류가 거센 해역에 가라앉았으며 20여 일간 침몰해 있던 천안함보다 훨씬 더 긴 53일간이나 물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 139쪽

“배에 폭발로 인한 직접적인 손상은 전혀 없는데 어뢰 폭발로 인한 침몰”이라는 합조단의 발표는 어떤 사람이 “몸에 화상으로 인한 상처는 전혀 없는데 화상으로 사망했다”는 논리나 다름없다.

- 140쪽

미디어오늘이 알파잠수 이종인 대표와 인터뷰하여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일본의 진주만 공습 때 가라앉은 배에서 찾은 실종자 시체 상태를 증언한 책을 보면 건진 시체의 모습은 대부분 목이 날아가 있다고 나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직접적인 폭발에 노출되지 않았더라도 선체외판에 전해지는 충격파만으로도 선내에 있는 사람들의 목이 절단될 수 있을 만큼의 압력이 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 144쪽

천연가스 버스에는 각 탱크당 120리터의 압축천연가스가 주입된 8개의 연료탱크가 실려 있다. 8개 중 하나가 폭발했을 뿐인데도 버스 유리창이 모두 박살나고 인근 상가 유리창까지 깨졌다. 그런데 360kgTNT 어뢰가 폭발한 천안함은 어떤가? 형광등이 멀쩡했다.

- 146쪽

(알파잠수 이종인 대표 문답)
폭발이 있으면 그 파편이 사람을 쳐서 다치는 걸로 생각하기들 쉬운데 그게 아니다. 일단 폭발이란 ‘단시간에 일어나는 산화작용’이다. 그게 뭐냐면 많은 양의 열이 나고, 큰소리를 내고, 그 다음은 기체의 팽창이다. 그 세 가지 현상이 동시에 발생하는 게 폭발이다. 어떤 밀폐된 공간에서 어떤 조건을 주면 폭발하게 되고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생명체, 생명체 중에서도 포유류는 허파를 갖고 호흡을 하는데 짧은 시간 내에 허파까지 공기가 도달하게 되고, 그러면 허파가 터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다시 빠져나오는 반작용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때 인체구조는 반사적으로 닫혀버린다. 숨이 딱 멈추면 목이 경직되는 것처럼 인체가 경직되어 닫히는 현상. 그렇게 되면 그 압력으로 인해 코피가 터지는 것은 기본이고 심할 경우 목이 날아가는 손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 실제 현상은 진주만 폭격 때 많이 발생했는데 구조하러 들어간 미군 잠수부가 들어갔다가 기절했다고 회고록에 쓴 걸 봤다. 시신들이 모두 목이 떨어진 채 둥둥 떠 있었던 거다. 격실 안에 있었는데...
- 161쪽

천안함 사고 이후, 군대를 다녀온 중장년이라면 다들 ‘물고기 떼죽음 현상’ 여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수류탄과 같은 아주 소박한 폭약으로 물고기를 잡아본 가락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수류탄 한 발만 까 넣으면 그 일대 물고기들이 다 하얗게 배를 뒤집고 물에 떴다.” 그런데 수류탄 하나의 화약량은 60~100gTNT에 불과하다. 천안함을 작살냈다는 어뢰가 360kgTNT이니 수류탄 3600~6000발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규모와 같다는 뜻이다. 그런 폭발을 얻어맞고도 물고기 한 마리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니.

- 166쪽

천안함 사고 직후부터 국방부와 해군이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수색과 구조를 하고자 했던 것은 천안함 함수도, 함미도 아닌 바로 그 제3의 부표가 설치된 지점에 침몰한 ‘제3국의 미상함’이었다. 국방부는 사고 다음날 해경이 함미를 발견하여 통보했음에도 묵살했고, 함수의 경우 무려 16시간 22분간이나 가라앉지 않고 떠 있었음에도 부표조차 설치하지 않고 방치해두면서 기자회견에서는 계속 수색하고 있다는 거짓 발표를 했다.

- 187쪽

하지만 만약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고 이 사건을 국정조사나 특검으로 속도를 낸다면 진실을 밝히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 195쪽

어쩔 수 없이 MB정권 들어 이런 저런 사건으로 조사를 받아야 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경찰이나 검찰 수사관들 혹은 검사들의 태도와 조사하는 방식을 비교해보게 되는데 대부분 예의를 갖추는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위압적이고 필요 이상으로 무뚝뚝해 보이려 애쓰는 모습들이 한결 같았다. 그러나 최창호 검사는 달랐다. 나는 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그렇게 상쾌한 마음으로 조사를 받아보긴 처음이었다.

- 197쪽

재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난 후엔 재판정에 공판검사가 나오기 때문에 최 검사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어느 날 로비에서 수사관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최 검사의 안부를 물었더니 지방검찰청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고 한다. 정기인사 발령일 수도 있겠지만 대검차장의 눈밖에 난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해 마음 한편이 아릿했다.

- 202쪽

천안함 사건으로 감사를 받아 징계 대상에 포함된 비운의 사나이들을 제외하고 천안함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대부분의 군 고위 인사들은 징계 대상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진급을 하거나 영전을 하는 행운을 누렸다.

-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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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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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려 깊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려 깊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미소였다. 영원히 변치 않을 듯한 확신을 내비치는, 평생 가도 네댓 번밖에는 만날 수 없는 보기 드문 미소 말이다. 한순간 외부 세계를 대면하고 있는-또는 대면하고 있는 듯한- 미소였고, 또한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으며 당신에게 온 정신을 쏟겠다고 맹세하는 듯한 미소였다. 당신이 이해받고 싶은 만큼 당신을 이해하고 있고, 당신이 스스로 믿는 만큼 당신을 믿고 있으며, 당신이 전달하고 싶어 하는 최상의 호의적인 인상을 분명히 전달받았노라고 말해 주는 그런 미소였던 것이다.

-76쪽

나는 그와 악수를 했다. 악수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은 일처럼 보였다. 갑자기 어린아이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51쪽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맑게 갠 날 아침에......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253쪽

(작품해설 김욱동)
1910년대 미국의 삶을 이해하려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1900)를 읽어야 하고 1930년대 미국의 삶을 이해하려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1939)를 읽어야 하듯이, 1920년대 미국이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야 한다. 재즈와 찰스턴 춤과 자동차가 상징하는 1920년대 미국의 사회 현실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은 유럽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특히 상류계층에게는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최적의 시대였다.
-259쪽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의 그늘에는 도덕적 타락과 부패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톰 뷰캐넌과 개츠비가 타고 다니는 번쩍거리는 고급 승용차, 개츠비가 주말마다 벌이는 사치스러운 파티와 마치 ‘불빛을 쫓는 부나비처럼’ 환락과 쾌락을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 톰과 데이지가 보여 주는 도덕적 혼란과 무질서와 무책임은 바로 전쟁이 끝난 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방황하던 이 무렵의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피츠제럴드의 한 단편 소설의 제목 그대로 이 무렵의 미국은 말하자면 ‘현대판 바빌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톰의 저택이나 개츠비의 파티처럼 겉으로는 우아하고 고상하며 화려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 보면 탐욕과 이기와 정신적 공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259쪽

에클버그라는 안과 의사가 세워 놓은 광고탑은 전통적인 神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들은 전통적인 종교를 밀어내고 바로 그 자리에 자본주의와 상업주의라는 새로운 신을 세워 놓았다. 한때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미국의 꿈’은 이제 과육을 빼낸 오렌지나 레몬처럼 껍질만 남은 채 쓰레기 계곡처럼 악취를 풍기고 있으며 안과 의사의 광고탑처럼 상업주의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271쪽

피츠제럴드는 이 작품의 제목을 두고 무척이나 고심하였다. ‘쓰레기 계곡과 백만장자들’,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 ‘웨스트에그로 가는 길’,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등 여러 제목을 염두에 두었지만 그 가운데에는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흰색’이라는 제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흰색’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미국을 상징하는 성조기의 색깔이다. 작가가 이 소설을 어떤 식으로든지 미국과 관련시키려고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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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3-06-04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9쪽에 비문 있다.

나는 그녀의 과거 애정 행각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사실을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다. >>> 사실을 표정을;;;;;
 
지식 e - 시즌 8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8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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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 바꾼 역사’에 일생을 바친 아흔다섯 노학자가 자서전에 남긴 마지막 구절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포기해선 안 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에릭 홉스봄 1917-2012

- 19쪽

성장호르몬 결핍증을 앓던 13세의 메시를 세계적인 축구스타로 키운 것은 FC바르셀로나의 힘이었다.
“우리는 축구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동료애와 우정, 헌신 등 축구의 가치를 가르친다. 그것이 바르셀로나의 축구 철학이다.”-FC바르셀로나 유소년아카데미 이반 비뇰 코치
조합원들이 운영하는 클럽 이상의 클럽 FC바르셀로나
세계 유일의 협동조합 축구팀
- 30쪽

FC바르셀로나의 숙적은 레알 마드리드. 두 팀은 정치·역사·민족적 기반은 물론 선수 영입과 운영 방침에서도 대척. FC바르셀로나는 '칸테라’를 통해 선수를 수급. 스페인어로 ‘채석장’이라는 뜻의 칸테라는 유소년 팀을 운영하면서 유망한 선수를 발굴하여 팀의 주력으로 길러내는 제도. 어린 시절부터 호흡을 맞춘 선수들로 팀을 꾸리기 때문에 단단한 조직력을 구축하는 데 유리. 짧고 정확한 패스를 주고받으며 공을 점유하는 바르셀로나 특유의 플레이 ‘티키타카’의 동력. 2011년 현재 FC바르셀로나의 베스트11 가운데 리오넬 메시, 세스크 파브레가스, 사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등 절반 이상이 칸테라 출신. 반면 레알 마드리드는 ‘갈락티코’고수. 스페인어로 ‘은하수’라는 뜻의 갈락티코는 외부에서 스타플레이어 영입하는 제도. 2000년 루이스 피구를 시작으로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데이비드 베컴 등을 끌어오면서 ‘지구대표팀’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레알 마드리드는 2009년 역대 최고 이적료 9천만 유로를 지불하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입단시켰다. 2011년 현재 레알 마드리드의 베스트11은 이케르 카시야스를 제외하고 갈락티코 출신.- 32쪽

일찍이 무역과 산업으로 번성했던 카탈루냐는 국세가 기울면서 18세기 에스파냐 왕국에 복속되었다. 이후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꾸준히 분리·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1932년 자치권을 획득하지만, 1936년 스페인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프랑코 정권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간다. 3년 동안 스페인 내전을 치르고 1939년 집권한 프랑코 정권은 반프랑코 전선의 선봉이었던 바르셀로나를 철저히 탄압했다. 카탈루냐의 자치권은 박탈되었고 고유의 언어와 관습, 문화는 전면 금지되었다. ‘카탈루냐의 심장’ FC바르셀로나도 수난을 겪었다. 조합원들이 선출한 클럽 회장은 친정부인사로 바뀌었고 로고에 박혀 있던 카탈루냐 국기도 삭제되었다. 카탈루냐어인 팀명은 스페인어로 교체되어, 1974년 프랑코 정권이 종식될 때까지 FC바르셀로나가 아닌 CF바르셀로나로 뛰어야 했다.

- 33쪽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대결은 축구경기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카탈루냐의 수도이자 프랑코 파시즘 정권에 맞선 자유의 성지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수도이자 프랑코 정권의 근간이었던 마드리드, 이 두 지역을 연고로 하는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격돌은 사실상 카탈루냐와 스페인의 대리전과 다름없다. FC바르셀로나의 슬로건이 ‘MES QUE UN CLUB'(클럽 그 이상)인 이유다.

- 34쪽

오늘날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세계적인 기업(혹은 단체)은 FC바르셀로나, 썬키스트, AP통신 등이 있으며, 한국에서는 한 살림, 서울 우유, 성미산마을이 대표적이다. (...) 그러나 협동조합 운동가 김기섭은, 오늘날 한국의 협동조합이 과연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협동조합은 결사체이자 사업체로서 상생과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데, 한국의 협동조합은 결사체로서이 성격을 심각하게 이탈해서 경쟁력 강화, 소비자 주권 등의 시장자본주의 용어는 물론이고 주식회사의 성장·개발방식을 도입하고, 협동조합들끼리 바로 이웃에 매장을 여는 등 경쟁체제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서민들이 상부상조하는 신용조합으로 발전하던 신용협동조합은 1980년대 접어들어 ‘자본주의적 경영합리화’를 앞세우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인수합병을 통해 거대 금융기관으로 변모를 꾀했고, 그 결과 1997년 8월 조합원수 500만 명, 1,700개 지점까지 규모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거대화된 신용협동조합은 직후에 불어닥친 국제구제금융 아래 줄줄이 문을 닫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해 기사회생한 신용협동조합은 제2금융기관으로 제도화되었다.- 37쪽

과거 빅브라더는 시민을 규율에 포함하기 위해 통제를 시행했다. 감옥과 정신병원에 격리된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교정을 통한 ‘정상’에의 복귀가 전제되어 있었고, 노숙자와 범죄자는 산업예비군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빅 브라더는 소비하지 못하는 이들을 쓰레기로 취급하면서 생산적인 시민들로부터 격리한다. 시민들은 ‘잉여’가 자신의 공간으로 스며들지 모르는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배제를 위한 감시에 찬동한다. 우범지역보다 부유층 밀집지역에 더 많이 설치돼 있는 CCTV는 바우만의 분석에 무게를 싣는다.

- 50쪽

줄리어스 시저 사망 이틀 후
원로원 회의의 판결
암살자
마커스 브루투스
무죄
amnestia!
잊어버리자!
“로마의 정의를 위해서
브루투스의 행위를 잊어버리고
문제 삼지 말자!“
Amnesty 사면
‘잊어버린다’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
전쟁이 끊이지 않은 로마제국시대
권력에 물들어간 사면제도
황제가 전쟁영웅에게
하루 동안 부여했던 특별한 권력
‘사면권’
“전쟁포로들을 죽이거나 사면할 수 있도록 허한다.”
- 64쪽

일반사면이 민심수습용으로 수행된다면 특정 범죄인을 지목하는 특별사면은 정치적 목적성을 띤다. 이승만 정권은 15차례, 박정희 정권은 24차례에 걸쳐 특별사면과 특별감형을 남발하며 사면권을 정권유지수단으로 활용했다. 문민정부에 들어서면서 사면권은 ‘정치적 거래’라는 더욱 왜곡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여론의 강력한 반대에도 김영삼 정부는 ‘율곡비리사건’ ‘동화은행사건’에 연루된 청와대 고위관계자 등 부패사범들을 특별사면했다. 김대중 정부는 ‘12·12와 5·18사건’ ‘전두환·노태우 비자금사건’ 관련자들을 ‘지역과 국민대화합’을 이유로 특별사면했다. 노무현 정부는 대기업총수들을 ‘경제살리기’라는 명분으로 특별사면했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비슷한 사면은 계속되었다. 반면 정치적·종교적 교의, 생존권 투쟁 등으로 감옥에 갇힌 양심수는 사면대상에서 철저히 제외되었다. 1993년 9월 23일 이후 민가협이 매주 목요집회를 여는 이유다.

- 70쪽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는 1961년 영국 런던에서 출범한 비정부 인권기구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한 술집에서 ‘자유를 위해 건배’했다는 이유로 학생 두 명이 7년형을 선고받자, 노동변호사 피터 베넨슨은 권력에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저항연대를 결성했다. 목표는 세계 각국의 양심수들을 사면하는 것으로 기금마련과 편지보내기 운동을 통해 구체화했다. 개인에게서 시작된 활동은 곧 27개 이상 국가, 18개 지부, 850개의 그룹으로 확산되었다. ‘양심수’라는 말은 국제통용어가 되었고 엠네스티의 상징 ‘철조망에 둘러싸인 촛불’은 희망과 자유를 대변했다. 1962년부터 10년 동안 앰네스티가 사면운동을 펼친 4,000명의 양심수 가운데 2,000명이 석방되었다.

- 72쪽

1973년 피노체트가 군사정변으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후 군사독재 정부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76년 3월 24일 육군사령관 호르헤 비델라는 아르헨티나가 페론 대통령 사망 후 경제위기, 정파 간 내분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비델라 정권은 군사평의회를 구성하여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와 정당, 노동조합 활동을 중지했다. 또한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남미 군사독재정부들과 연합하여 ‘콘도르 작전’을 수행했다. 콘도르 작전은 표면적으로 ‘사회주의 무장세력 축출’을 내세웠으나 실제목적은 반정부세력 제거에 있었다. 이에 따라 비델라는 ‘더러운 전쟁’을 전개하여 아르헨티나 군부세력에 반대하는 좌파운동가, 지식인, 예술가, 페론주의자들을 무차별 납치하고 살해했다. 끌려간 사람들은 전국 600여 개 비밀수용소에 수감되어 강간, 폭행, 고문당했고 사망자는 바다에 버려졌다. 더러운 전쟁으로 살해·실종된 사람은 공식적으로 1만 3,000명이지만 인권단체는 3만여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80쪽

군부독재가 끝나고 1983년 들어선 라울 알폰신 민간정부는 비델라를 비롯한 군부인사 370여 명에게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989년 라울 정부를 이어받은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국민화합’을 명분으로 이들을 모두 특별사면하고 군부정권 부역인사들에 대한 사면법을 제정했다.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좌파정부가 사면법을 폐기하면서 군부지도자들을 다시 법정에 올랐고, 2010년 아르헨티나 법원은 비델라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 82쪽

1995년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인사들을 불구속기소했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1996년 1월 내란과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함께 제5공화국 비리수사를 진행했따. 199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12월 22일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대화합’의 명분으로 특별사면되었다. 납부한 추징금은 532억 원이고 나머지 1,673억 원은 “통장에 29만 원밖에 없어서” 미납했다. 2007년 1월 경남 합천군은 황강변 ‘새천년 생명의 숲’의 이름을 일해공원으로 바꾸었다. 일해는 전두환 대통령의 아호다. 2012년 2월 서울 상암동에 박정희기념관이 개관했다. 총 220억 원의 공사비 중 200억 원이 국고보조금이다.

- 84쪽

고급 피아노 한 대가 12만 원이던 시절, 18만 3,600원짜리 백과사전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한창기의 ‘세일즈 전사’ 중 한 명이자 훗날 웅진그룹을 창설한 윤석금 회장은 “그는 세일즈맨들에게 단순히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교육사업 종사자이자 교육사절이라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회고했다. 브리태니커 한국 지사는 2년 만에 판매원을 250명으로 늘렸고, 전성기 그 수는 1,500명까지 불어났다.

- 92쪽

여섯 글자 한글 제호를 쓰고, 최초로 한글 전용 가로쓰기를 시도한 『뿌리깊은 나무』는 모든 금기를 위배했다. 창간호 표지에는 농부의 얼룩진 손톱이 클로즈업 되어 있었고, 180쪽짜리 얇은 책자는 한국 최초의 아트디렉터 이상철이 설계한 타이포와 이미지로 가득했다. 부록도 없고 특집도 없었다. 순한글 맛을 살려야 한다면서 모든 필자의 글을 교정하는 바람에 종종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본문 디자인에는 예민하게 굴면서도 정작 차례는 한 가지 서체로 무뚝뚝하게 편집했고, 국판 일색인 판형 속에서 홀로 사륙배판을 고집했다. ‘인텔리’를 대상으로 한 다른 잡지와 달리 『뿌리깊은 나무』의 독자는 민중이었고, 민중이 읽는 잡지는 편안하고 친숙한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의 것을 팔아 만든 가장 ‘한국적인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정기구독자는 6만 5,000명을 헤아렸다. 『신동아』 정기구독자가 2만 명이던 때였다.

- 94쪽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발전’을 선결목표로 내세우고 사회적 역량을 집중했다. 빠르게 진행되는 근대화 속에서 한국적인 것은 곧 ‘배척해야 할 ’ ‘시대착오적인’ ‘추한 것’으로 격하되어 사라졌다. 한국인들은 달라지는 살림살이에 뿌듯해하면서도 “나/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의문을 품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민족문화’와 ‘민족주체성’을 내세워 이순신, 세종대왕을 찬양하는 일을 국책사업으로 추진, 출판과 방송에서 외래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대대적인 우리말 정화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강준만 교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군사작전’식으로 추진된 ‘우리 것 사랑하기’는 실은 ‘우리 것’에 대한 모독이었다. 박정희식 히스테리만 계속되었더라면 ‘우리 것’은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절하한다. 그러면서 “한창기의 ‘우리 것 사랑하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박정희의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강요할 힘도 없었지만, 강요할 꿈조차 꾸지 않았다. 계몽도 아니었고 설교도 아니었다. 그는 세련된 포장과 알멩이로 ‘우리 것’의 값어치를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고 분석했다.
- 96쪽

‘다양하고 복합적인 내용을 싣는 정기간행물’로서 잡지는 1731년 영국의 “Gentleman's magazine"에 기원한다. 이후 잡지는 주관적인 관점으로 문학, 정치, 전기, 비평 등을 다루면서 객관성을 견지하는 신문과 차별화하며 세를 불렸다. 잡지가 18세기 유럽에서 성행한 데는 정치적인 문제가 자리한다. 왕정국가의 절대권력이 신문을 통제하자 그 반발과 대안으로 잡지가 호명된 것이다. 문화의 첨병이었던 잡지는 당대의 첨예한 이슈를 아우르며 정치적 해방구이자 무기로서 역할을 자임했다.(magazine은 ‘무기(화약)고’를 뜻하기도 한다.)

- 98쪽

정책에 대한 목표와 실현방법, 실현에 필요한 기한과 재정조달 방법 등을 명시하는 매니페스토는 무책임한 공약 남발을 원천봉쇄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유권자에게 약속하여 책임감 있는 선거문화 정착을 목적으로 한다. 선거 전에는 국민이 정당이나 정치가를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당선 후에는 정치가나 정당이 공약을 확실히 지키고 있는가를 평가하고 검증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일반 선거공약과 다르다.

- 142쪽

한국의 매니페스토는 고질적인 병폐로 지목돼왔던 돈봉투선거, 연고선거, 중상모략·허위비방 선거, 이미지·바람몰이 선거, 선전·선동 선거의 대안으로서 2006년 5·31 지방선거에 도입되었다. 이후 수차례 선거에서 활용되었으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매니페스토가 10여 장에 불과해 완성도가 떨어지는데다, 수많은 후보들의 출마로 인해서 한 명 한 명의 매니페스토를 읽어볼 여력이 없었다는 분석이다. 참공약을 알리고 유권자들의 정치참여를 유도하려는 의지가 박약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일례로, 2006년 국회 예·결산특별위원회는 2007년 매니페스토 지원예산 20억 원 가운데 19억 원을 삭감하고 1억 원만을 편성해 구설에 올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공약실천율도 낮다. 2012년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는 18대 국회의원의 공약완료율이 35.1%에 불과하고, 국회의원 중 18.3%는 공약이행에 대한 정보공개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 145쪽

탐사보도는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라는 명제 하에 사건의 이면을 적극적으로 파헤치는 언론보도 방식으로, 19세기 미국에서 유행한 폭로기사muckraking 정신을 계승한다. ‘배설물’이라는 뜻의 muck, '갈퀴질‘이라는 의미의 raking이 결합한 영어단어가 암시하듯이, 권력과 자본의 부정, 부패, 비리, 위선을 파헤쳐 폭로, 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154쪽

프로퍼블리카는 미국 뉴욕의 비영리 탐사전문 온라인 언론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40여 년간 운영해오던 투자회사 골든웨스트파이낸셜을 매각해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게 된 샌들러 부부는 2007년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월스트리트저널을 인수하자 사표를 제출한 월스트리트저널 편집국장 폴 스타이거에게 자본과 권력에 독점적인 언론사를 제안한다. 해마다 1,000만 달러(약 110억 원)를 제공하되 어떤 논조의 무슨 기사를 쓰든 관여하지 않겠다는 전제였다. 이에 폴 스타이거는 전·현직기자 30여 명과 함께 프로퍼블리카를 설립했다. 프로퍼블리카가 ‘비영리 탐사전문’ 매체로 존립할 수 있는 배경이다.

- 155쪽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계통 없이 국토를 파헤치던 시절 고국을 떠났지만, 수십 년이 흐른 후에도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는 여전히 ‘재개발’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지우고, 약자를 밀어내고, 삶을 갈아 엎는 방식으로 개발되었다. 정기용은 이러한 논리로 추인된 한국의 근대사를 ‘죽음과 학살의 시간’으로 규정했다. “건축과 도시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삶을 조직하고 사회를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에 공학이 아니라 인문학·철학으로 분류되어야”하며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정기용은 1986년 건축사무소 ‘기용건축’을 세우고 올바른 집짓기, 올바른 공간을 구성하는 일에 매진했다.

- 167쪽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는 대장암으로 죽음을 앞둔 정기용의 일상에 밀착하면서 평생에 걸친 건축철학과 고민을 탐색한다. 이에 따르면 계원조형예술대학교, 효자동 사랑방, 서울 동숭동 무애빌딩 등 흙에 기반한 여러 건축물들을 세우면서 그가 가장 염두에 둔 것은 ‘공공성’이다. “사유지 안에 세워지는 건축은 동시에 지구 위에 구축되는 건축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건축은 그 태생이 공공적”이기 때문이다. 정기용에게 건축은 하나의 독립된 대상이라기보다는 환경과 어우러져 풍경의 일부를 이루며 그곳의 역사, 문화, 사용자의 편의와 정서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하는 구체적 사물이다. 여기서 건축가의 역할은 다양한 현대적 삶을 이해하고, 조절하고 판단하고, 공간이 주는 상상력을 구체화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노동을 조율하여 “원래 거기 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해내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정기용이 말하는 ‘감응의 건축’이다.

- 168쪽

2007년 9월 유력 일간지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고향 김해에 호화저택을 지었다고 보도했다. “노무현 랜드” “노무현 타운” “아방궁” 등의 수식어가 붙은 제목과 함께 기사는 몇 주에 걸쳐 반복 게재되었다. 김해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를 설계한 건축가는 정기용이다.

- 169쪽

한국어 명칭이 붙은 최초의 소행성은 ‘관륵’(소행성번호4963). 관륵은 일본에 달력과 천문학, 지질학 등 선진문물을 전달한 백제의 고승이자 천문학자로, 1993년 도쿄천문대학 교수 후루카와 기이치로가 “과거 일제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사과하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 1997년 천문학자 와타나베 가즈오는 기이치로 박사의 자문을 받아 7365 소행성을 ‘세종’이라고 명명. 이밖에 일본에서 발견하여 한국어 이름을 붙인 소행성은 조경철(4976), 서현섭(6210), 나일성(8895), 전상운(9871), 광주(12252) 등. 한국에서 발견한 소행성에 최초의 승인이 떨어진 때는 2001년. 아마추어 천문가 이태형이 1998년 휴전선 부근에서 발견한 소행성은 2001년 ‘통일’(23880)이라는 이름으로 승인. 2000년 보현산천문대에서 발견한 다섯 개의 소행성 최무선(63145), 이천(63156), 장영실(68719), 이순지(72021), 허준(72059)도 2004년에 승인을 받았고, 홍대용은 2001년 보현산천문대에서 발견하여 2005년 최종 승인. 소행성 이름은 한국과학사에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과학자 14명을 출생연도 순으로 붙였으며, 김정호(95016), 이원철(99503), 유방택(106817)도 등록되어 있다.- 180쪽

1949년 5월 이문원 등 반민특위위원 세 명이 남로당 연루혐의로 체포되었다. 6월 6일에는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의 지휘하에 50여 명의 경찰이 특위를 습격했다. 6월 중순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노일환, 서용길이 구속되었고, 26일 백범 김구가 피살당했다. 일련의 사건 속에서 급격히 위축된 반민특위는 10월 해체했다. 이후 40여 년 동안 거론조차 되지 못했던 친일청산 문제는 2005년 1월 27일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안’ 공포와 함께 재점화되었다. 특별법을 근거로 2005년 5월 31일 ‘제2의 반민특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고,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발족해 친일파의 재산환수를 시도했으나 여러 반대와 한계에 부딪혔다.

- 188쪽

특별법 제정 당시 김주현 행정부차관은 “조사대상의 후손들이 반발해 국민적 갈등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면서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내일신문 편집국장 박태견은 ”‘국민적 갈등’은 친일인맥이 지난 50년간 줄기차게 주장해온 반대논리였다. 하지만 김차관도 시인했듯 진짜 반대이유는 ‘후손들의 반발’이다. 친일후손들은 양의 개념으로 보면 한줌밖에 안 된다. 그러나 기득권이라는 권력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친일연구자 임종국에 따르면, 제1공화국 각료의 34.5%, 제2공화국 각료의 60%가 친일전력자였고, 제3공화국도 비슷한 추세를 보였다.

- 189쪽

당시 한국이 해외입양을 통해서 벌어들인 돈은 매해 2,000~4,000만 달러로 추정된다. 기업이 100만 달러 수출만 해도 훈장을 받던 시절, 정부는 소외계층 자녀를 해외입양 보냄으로써 사회복지 비용을 줄이고, 벌어들인 돈은 경제에 재투자하며 경기르 f부양했다. 한국에 ‘고아수출국’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이유다.

- 231쪽

OECD 회원국으로 ‘격상’된 오늘날까지 한국의 해외입양은 계속 된다. 미국 국무부 통계에 따르면, 2011년 한국은 736명을 미국으로 입양 보내 중국(2,589명), 에티오피아(1,726명), 러시아(970명)에 이어 4위(누적 통계 1위)를 차지했다.

- 232쪽

구한말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외세의 침략이 계속되면서 조선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살 길을 찾아 떠나는 유민의 수는 점차 증가했다. 땅을 버리고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국경을 넘어 중국 동북 지방(만주)과 러시아, 시베리아 등지로 나아갔다. 수량이 적을 때의 두만강은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얕았고, 그나마도 겨울철에는 얼어붙는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만주로 향하는 국경경비도 상대적으로 허술했고, 특히 강 건너에는 농사짓기에 적합한 토질의 땅과, 경작에 충분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할 수 있는 평원과 계곡이 위치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 268쪽

방문취업제가 외국인노동자의 가족 동반을 불허하는 상황에서 부모가 한국행을 택한 가정의 이혼율은 25%에 육박한다. ‘한 자녀 갖기 풍조’가 만연하여 신생아수는 10년 전에 비해 1/4로 줄었다. 연변 조선족의 둘째자녀 출생수는 연 900명을 밑돈다. 아이가 없으니 민족학교가 문을 닫고, 민족학교가 없으니 아이를 한족학교에 보내는 악순환 속에서 역사와 언어에 대한 교육도 부실해지고 있다. 2009년 길림성 조선족 언어사용 실태조사를 보면, 초등학생 62.5%, 중고등학생 48%가 한글을 전혀 모른다. 여기에 중국에서 살려면 중국말을 잘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조선족사회 학부모들 사이에 큰 호응을 얻으면서 민족학교와 한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전망이다.
- 271쪽

김봉섭 재외동포재단 조사연구팀장은 조선족들이 생활터전에서도 돈벌이를 할 수 있도록 산업 인프라를 확충하고, 한국 기업이 동북3성으로 거점을 옮기는 것을 적극 검토하자고 제안한다. 특히 청소년을 위해 언어와 학교교육을 지원하고, 해외체류중인 조선족들이 한인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정책을 계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인하대학 정치외교학과 이진경 교수의 말마따나 조선족 대다수가 자신을 ‘중국인’으로 인식하고 있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시도도 잘 먹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략은 한계를 보인다. 조선족교회 담임목사 서경석은 “이스라엘에서는 피가 1/4만 섞여도 자국인으로 간주하는데 우리는 부모 중 한 명이라도 국적자가 아니면 법적으로 이방인”이라면서 “한족 며느리나 사위에게도 법적·제도적 혜택을 줘 이들을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밖에도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정치적·문화적 해법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상황과 여성과 아이가 없는 현실에서 그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 271쪽

2011년 3월 한국노동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제조업 생산·기능직의 경우 조선족 근로자가 1% 증가할 때 내국인의 실업전환확률(취업자가 일자리를 잃을 확률)은 0.003%에 불과하다. 삼성경제연구소 최홍 수석연구원은 “조선족 근로자들이 다른 외국인 근로자보다 국내 고용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은 높지만 그렇다고 조선족이 점유하던 일자리를 내국인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조선족에 대해 단순히 노동시장 잠식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동포의 법적지위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선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 273쪽

자살생존자는 미국 자살예방협회가 발간한 『자살유가족을 위한 핸드북』에서 자살한 유가족을 지칭한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받는 정신적 충격이 강제수용소 경험과 맞먹는다고 판단하여 붙인 이름이다.

- 280쪽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감내해야 하는 슬픔에 대해 죽음을 방치했다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원망, 혐오감은 자살생존자들을 괴롭힌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자살생존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발화하지 못한다. 서울시 자살예방센터 박재영 사무관은 “유가족 스스로가 도움을 청하고 뭔가 요구하는 게 필요한데 사회적으로 자기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말한다.

- 281쪽

자살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 차는 크다. 태평양전쟁 당시 ‘천황을 위해’ 적함에 돌진하던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외치며 산화한 한국의 전태일처럼, 동양에서 자살은 종종 대의명분을 위한 ‘숭고한 자기희생’으로 상찬되었다. 반면 서양은 씻을 수 없는 죄악이자 절대적 금기로 자살을 취급했다. 기독교 사상은 가롯 유다의 죄목 중 예수를 판 것보다 자살에 더 무게를 두었다. 독일의 저술가 게르트 미슐러가 언급했듯 “자살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건만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는 ‘국민 만들기’에 혈안이 된 국가는 이를 금기시했다.”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된 사람을 지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탓이다.

- 282쪽

오랫동안 폭력문제를 연구해온 미국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은 통계를 분석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1900~2007년까지 미국 정부가 발표한 자료를 들여다보았더니 살인과 자살 등 ‘폭력치사’는 늘 함께 증가하거나 감소했으며, 급증하는 시기와 급감하는 시기도 번갈아 나타났다. 폭력치사가 급증한 세 번은 모두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와 겹치며 급감하는 세 번은 모두 민주당 대통령 집권기다. 이 같은 결과는 각 당의 정책에서 기인한다. 공화당이 추구하는 정책은 사람들을 강력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시킨다. 열등감과 패배감을 조장하고, 타인을 경멸하도록 부추기며, 불평등을 찬미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실했을 때, 특히 해고를 당했을 때 극도의 수치와 모멸감을 느끼고, 수치와 모멸감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폭력치사 발생확률이 높아진다. 길리건은 폭력치사의 주요인으로 실업, 불황, 불평등을 꼽으면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를 일러준다.

- 283쪽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한국의 자살사망자 수는 1만 5,566명이다. 2006년 대비 50% 늘었다.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31.2명으로 OECD 평균자살률(11.3명)의 세 배다. 20대 사망원인의 44.9%가 자살이며 비율은 고령일수록 높아진다. 2009년 노인 자살사망자는 5,051명이고, 75세 이상은 OECD 국가의 약 8.3배다.

- 284쪽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의 핵심은 ‘죽음각인’, 즉 죽음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데에 있다. 살아서 죽음에 이르렀던 자로서 PTSD 환자들은 일상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하다. PTSD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다. 하여 와락의 최우선과제는 ‘일상의 복원’이고, 그 중심에는 ‘밥’이 있다. “엄마가 따뜻한 밥을 해주듯이 기본적인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이 와락의 생각이다.

- 284쪽

18대 대선이 끝나고 이틀 후인 2012년 12월 21일,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현대중공업 노동자 이운남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2일에는 서울인권센터 청년활동가 최경남이, 25일에는 한국외대노조지부장 이호일이 자살했다.

- 285쪽

불안정한 노동은 빈곤을, 빈곤은 해체를, 해체는 고독을, 고독은 다시 가난을 낳는다. 고독사는 결국 가난의 문제이다. ‘고독한 빈곤’은 나이가 많을수록, 남성보다는 여성에게서 더욱 첨예해진다. 노인 1인 가구의 상대빈곤율(중위소득 대비 50% 이하 비율)은 76.6%로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다.

- 295쪽

죽음이 일상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위생관념’이 보편화한 근대 이후였다. 인류는 문명화과정에서 ‘활기찬 삶’의 대척점에 있던 ‘부패하고 냄새나는 죽음’을 위생학적으로 격리하고 제거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죽음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사회 생활의 배후로 밀려나 악취 없이 신속하게, 죽음의 병상에서 무덤으로 너무도 완벽하게 기술적으로 처리되기에 이르렀다.” 죽음의 고독이다.

- 295쪽

PHS(Pioneer Human Services)의 모토는 패자부활이다. 택배 직원의 평균학력은 초등학교 6학년이고, 영어가 서툴거나 알코올중독에 빠진 사람이 90%다. 이렇게 PHS에서 일하며 기술과 영어를 배우는 이들이 연간 1만 2,000여 명이다. 워싱턴주립대학 연구 결과, PHS를 거친 사람들의 2년 이내 재범률은 6.4%다. 정부의 교정사업 참가자들의 재범률은 23%다. 2006년 PHS 직원을 대상으로 알코올·약물테스트를 한 결과 1.1%가 양성반응이 나왔다. 미국 내 보통 사업장은 4.3%다. PHS의 경영철학은 팀 하로 수석 부회장의 말로 요약된다. “길거리에 나앉은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불균형한 구조의 산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균형을 되찾으려 합니다.”

- 319쪽

2010년 기업의 윤리적 책임을 연구·조사하는 국제적 싱크탱크 그룹 에티스피어 연구소는 윤리적 책임을 가장 잘 이행하고 있는 세계 100대 기업을 선정해 발표했다. 연구소는 연간수익 5,000만 달러 이상, 종업원 100명 이상의 300여 개 기업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20%) △기업 지배구조(10%) △기업 혁신능력 및 시민사회에 대한 공헌도(15%) △법률 준수여부 및 범죄기록 유무(20%) △윤리경영 프로그램 실시여부(15%)등 총 일곱 개 항목의 평가기준을 적용했다. 한국 기업은 단 한 곳도 선정되지 못했다.

- 323쪽

프랑스혁명은 정치혁명이자 교육혁명이었다. 1792년 철학자 콩도르세가 작성한 새로운 교육에 대한 보고서는 “진정한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 정치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교육”을 명시하는 한편, 헌법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개선하고 내면화할 수 있는 시민교육을 장려했다. 축제와 모임을 교육의 장으로 이용하고, 연대와 참여, 권리를 강조한 ‘평생시민교육’의 개념도 이때 고안되었다. 혁명정부의 교육제도는 당대에 이렇다 할 효과를 보지 못했다.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여 헌법을 제정하면서 역사는 퇴보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민으로서 활동할 권리와, 그런 활동에 대한 기대를 내용으로 하는 시민권이라는 혁명적 원칙은 프랑스 정치와 문화에 흡수되었다. 정치와 교육의 상관관계에 대한 인식도 공고해졌다. 이러한 성취는 제3공화국 교육개혁의 근간이 되어, 19세기 말 시민교육은 프랑스 학교의 항구적인 현실로 뿌리내렸다.

- 331쪽

프랑스혁명 정신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오늘날 국가와 권력, 민주주의와 시민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시민교육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청소년 탈선과 극심한 인종차별 문제에 시달렸던 영국은, 곰인형 테디베어를 이용한 ‘서클타임’을 학교수업으로 채택하여 배려와 민주적 의사소통 방식을 가르치고 있다. 재야에서는 누구나 토론과 학습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식인과 학자들이 장을 만든 ‘천막대학’을 운영한다. 스웨덴의 시민들은 평균 2~3개의 크고 작은 소모임에서 활동하며 가장 작은 단위에서의 민주주의를 직접 실천한다. 독일은 ‘나치 전체주의’를 거울삼아 어릴 때부터 자신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수용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다원적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있다. 10대 정치인과 20대 학생의원은 독일에서 낯선 풍경이 아니다.

- 332쪽

1968년 12월 5일 박정희 정권은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다. 철학자 박종홍이 기틀을 잡았고 ‘반공’과 ‘민족중흥’을 키워드로 하여,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를 양 날개로 삼은 박정희 정권의 이념과 직렬 연결했다. 국민교육헌장은 전국의 학교에 배포되어 교무실과 교실 앞에 내걸렸다.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서 학교는 국민교육헌장에 따라 학생들에게 멸사봉공의 자세로 국가에 충성할 것을 강요했다. 식민지시대교육시스템으로 획일주의의 상징이었던 교복과 교모, 삭발은 체제순응을 규율하는 기본수단이 되었다. (...) 발표 직후부터 “천황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고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강요했던 일제의 ‘교육칙어’를 그대로 본떴다”는 비판이 거셌던 국민교육헌장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폐기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수월성과 능률’에 초점을 맞춰 교육을 시장논리로 풀겠다는 내용의 ‘5·31 교육개혁’을 선언했다.

- 333쪽

다니엘 파울 슈레버가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으로 무너져가는 편집증자의 내면을 가시화한 것처럼, 『어느 자폐인 이야기』에서 그랜딘은 보통사람들과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독해하는 자폐인의 내면을 기술한다. 교회 가기 전 머리감기가 쇠골무로 문지르는 것처럼 싫었던 기억, 속옷 봉제선이 핀처럼 살갗을 찔렀던 느낌, 헤어드라이어 소리가 제트기 이륙하는 소리처럼 귀청을 뚫고, 전화벨 소리가 생각을 토막내고, 두 사람 이상이 하는 말은 이해할 수 없기에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이 짜증스럽던 심경. 자폐인의 언어, 사고, 감각체계를 설명하는 그랜딘의 덤덤한 자기고백은, ‘제멋대로 구는, 소통불능의,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자폐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다른’ 것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 342쪽

어린 시절 훈데르트바서의 운명을 이끈 건 ‘유대인’이라는 혈통이었다. 1929년 아버지가 전쟁중 사망한 후 유대인 어머니와 유년기를 보낸 훈데르트바서는,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면서 오베르 도나우스트라세에 있는 외가로 강제이주된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정책에 따라 외할머니와 친척 69명이 몰살당했다. 훈데르트바서 모자는 게토에 격리되었다. 게토를 둘러싼,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무채색 수직건물, 그 틈새를 기어이 비집고 자라는 푸르른 식물에서 훈데르트바서는 자연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보았다. 직선에 반대한 건축가, 순환의 나선형을 사랑한 미술가, 자연보호에 앞장선 생태주의자 훈데르트바서의 철학적 출밤점이다.

-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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