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보물로 지정예고된 황현, 이성윤, 서직수의 초상화.(왼쪽부터)

조선후기 우국지사 황현,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를 비롯해 철종 어진(御眞·임금 초상화), 세자 시절의 영조, 조선 후기 대표 서예가 이광사 등 내로라 하는 역사적 인물들을 그린 초상화가 문화재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11일 ‘철종 어진’ 등 19건의 초상화와 ‘이성윤 공시교서 및 일괄 유물’ 1건 등 모두 20건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이들 초상화는 문화재청이 지난해 10월부터 올 1월까지 공모를 통해 접수된 125건의 초상화 가운데 예술적·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인정받은 유물들이다.

-예술적·역사적 가치 평가-

우리 미술사에서 초상화는 그저 인간의 형상을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주인공의 구체적인 생김새나 당시의 사회적 지위 등 외형적인 모습을 담아내지만 더 강조되고, 중시한 것은 인물 내면의 정신세계다. 고집스러운 입술, 형형한 눈, 한올 한올 섬세하게 그려낸 수염 등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240호)이 대표적이다. 미술사학자인 안휘준 문화재위원장은 “우리나라 초상화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는다”며 “이는 인물을 그저 닮게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성격이나 교양 등 그 사람의 정신까지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 초상화 유물들은 감상용으로 주로 그려진 서양과 달리 주인공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상, 미적 감각까지 녹아 있다. 뛰어난 묘사는 회화사적으로 의미가 크고, 실제 생존한 인물을 담았다는 면에서 역사적 자료로도 귀중하다. 또 당시의 복식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복식사 연구에도 필수적이다.

이날 보물로 지정예고된 초상화 중 상당수는 소수의 전문연구자들에게만 알려졌을 뿐 그동안 일반에게는 거의 공개되지 않은 것들이다. 20세기 전반의 대표적 초상화가인 채용신의 ‘황현 초상’(1911년)은 우리 초상화의 전통을 잇는 마지막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또 18세기 말~19세기 초 그려진 ‘조씨 삼형제 초상’은 여러 사람들을 한 화면에 담은 유일한 초상화로 인정 받고 있다.

18세기말 조계·조두·조강 형제를 한 화폭에 그린 ‘조씨 삼형제 초상화’.

-“성격등 인물·내면 표현”-

‘서직수 초상’(1796년)은 합작품이다. 얼굴은 18세기 최고의 초상화가인 이명기가, 몸은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 서양식 음영법이 들어간 의복·돗자리, 섬세한 선은 김홍도의 또다른 화법을 보여준다. 세자 시절 영조를 그린 ‘연잉군 초상’, ‘철종 어진’은 한국전쟁 당시 화면이 일부 소실됐으나 작품의 수준이나 어진이 극소수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외에도 ‘유숙 초상 및 관련 교지’ ‘심환지’ ‘김유’ ‘이시방’ ‘이채’ ‘강이오’ ‘심득경’ ‘오재순’ 초상화 등이 있다. 또 ‘채제공 초상’은 기존 작품 외에 3점이 더 확인·추가됐고, ‘이성윤 초상’의 확인 과정에서 밝혀진 ‘이성윤 위성 공신교서’는 교서의 양식과 문체연구 등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들 초상화는 예고 기간을 거쳐 12월 보물 지정이 최종 확정된다.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오주석 선생님의 "한국의 美 특강"에서도 조선시대 "초상화"를 그리는 의미가 나왔었죠.  단순히 그림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품까지도 옮겨 그린다고.  그래서 젊은 사람은 초상화를 그리지 않는다고요.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고...

기사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옮겨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친일파 재산환수 작업이 본격화된 가운데 친일파 후손들이 이미 상당수 재산을 제3자에게 매각·처분한 사실이 10일 경향신문 취재결과 드러났다. 일부 친일파 후손은 재산 매각 후 일본에 귀화하거나 해외로 이민, 이 땅을 떠난 사실도 함께 밝혀졌다. 이에 따라 지난달 18일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의 친일파재산 국고 환수작업에 난항이 예상된다.

한일합방 때 조약 체결에 찬성한 매국노 7인 중 한 명인 조중응은 일제로부터 챙긴 경기 남양주시 등지의 70여만㎡의 땅을 소유했다. 조중응은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일했으며, 조사위의 직권조사 대상 400명에 포함돼 있다. 조중응 소유 땅은 손녀 조모씨가 단독 상속했다.

손녀 조씨는 이후 상속받은 땅을 1963년부터 2000년까지 최소 7명 이상의 제3자에게 매각한 것으로 확인됐다. 매국노 조중응의 후손들은 1969~1981년 사이 조씨를 제외하고 모두 일본에 귀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내에 남은 조씨의 재산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 대지 1,784㎡,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일본문화원’ 대지와 건물뿐이다. 이 일본문화원 소유주는 ㄱ주식회사로 손녀 조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일본문화원이 친일파 후손에게 임대료를 내고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ㄱ주식회사 관계자는 “일본문화원 건물은 조부(조중응)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환수대상이 아닌 걸로 알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환수가 불투명한 재산인 것이다.

일제 때인 1939~43년에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 400명 직권조사 대상에 포함된 친일파 정교원의 후손 역시 대부분의 재산을 매각한 상태다. 정교원은 경북 성주군 등 전국 각지에 총 8만5천여평의 토지 및 임야를 소유했다. 정교원의 후손은 이 부동산을 모두 매각한 뒤 지난 5월 미국으로 이민갔다. 취재결과 정교원의 후손은 심지어 95년 경기 평택시 토지를 매각하면서 발생한 양도소득세 2천1백만원을 관할 세무서에 체납한 사실도 밝혀졌다.

‘겨울연가’로 유명해진 강원 춘천시의 남이섬이 대표적 친일파인 민영휘의 증손자 민모씨 소유인 사실도 확인됐다. 민영휘는 당시 중추원 의장을 지냈고,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서울 휘문고 설립자이기도 하다. 1966년 경춘관광개발로 시작한 남이섬은 민영휘 손자가 1994년 ‘주식회사 남이섬’으로 명의를 변경, 대표이사를 지냈으며 현재는 증손자가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민영휘의 재산은 이미 조사위의 조사개시 결정이 내려진 상태이지만 주식회사 형태인 남이섬은 ‘선의의’ 다른 주주들 때문에 국고 귀속이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밖에 400명의 직권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친일파들의 재산 환수는 더욱 어려울 전망이다. 재산조사위는 ‘매국노, 작위 수여자, 중의원, 중추원 참의’ 4개의 범주로 우선 조사대상을 설정한 상태다. 여기에 포함 안 된 친일파 후손은 법망을 피해 조사가 시작되기 전 미리 재산을 매각할 우려가 높다. 예컨대 1943년 평남 강동군수 등을 지낸 윤덕명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1차 명단에 수록 예정인 친일파이지만 재산조사 대상에는 누락돼 언제라도 이들 후손은 재산을 제3자에게 팔아넘길 수 있다. 실제로 윤덕명 후손들은 강원도청의 지적전산망 열람을 통해 찾지 못한 땅이 남아있는지 확인해간 사실이 밝혀졌다.

〈임지선기자 vision@kyunghyang.com〉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

진작에 해야할 일을 몇 십 년 뒤에 하니 삐거걱, 그나마 이제라도 하겠다니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역시 삐거걱. 진짜 싫다ㅡ.ㅡ;;;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쿠키사회]대부분 초등학교가 개학한 1일 아침, 어머니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등교한 장용훈군(10·대구 시지초등 3년)은 다른 때보다 훨씬 설레는 모습이었다. 2학기 등교 첫날 용훈이는 교실로 곧장 가는 대신 급식실로 향했다. 방학 기간 중 만들어진 급식실 옆의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다. 용훈이가 버튼을 누르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어머니 장영화씨(39)와 용훈이가 동시에 탄성을 지른다.

"엄마, 진짜 엘리베이터예요." 휠체어에 탄 용훈이가 환호하는 옆에서, 어머니 장씨는 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고 무던히도 애쓴 지난 1년여의 감회가 새로운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용훈이는 태어나자마자 세균감염으로 뇌를 다쳐 어릴 적부터 휠체어를 타고 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초등 3학년이 되면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1∼2학년 때는 특수한 상황이 고려돼 1층 교실에서 수업을 모두 받을 수 있었지만, 3학년 과정의 컴퓨터와 과학 수업은 모두 3층에서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장씨의 걱정은 깊어갔다. 장애를 가진 아들이 사회에서 제몫을 하려면 엄마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믿어온 장씨는 아들이 3학년으로 올라가기 1년 전부터 이런 고민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장씨는 지난해 4월 어느 날 1층 급식실에서 배식을 받아 식판을 들고 4층으로 올라가던 한 아이가 식판을 엎지르는 상황을 목격한다.

순간 장씨는 '아, 이거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장씨는 당장 학교측에 급식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급식도 원활해지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 이동에 도움이 된다며 이를 제안했다. 그러나 학교측은 급식용 엘리베이터 이용은 아이들의 안전사고 부담이 될 수 있다며 신중히 판단하자고 답했다.

그러는 동안 장씨는 직접 엘리베이터 회사를 방문, 급식과 승객 이동을 겸하는 엘리베이터 설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겸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학교를 답사하기도 했다. 또 교육청별로 연간 엘리베이터 1∼2대를 설치할 예산이 나온다는 걸알고 엘리베이터 설치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이때부터 장씨는 학교와 해당교육청, 대구시교육청을 뛰어다녔다.

이 과정에서 장씨는 장애인 특수교육진흥법을 꼼꼼히 뒤져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특수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특수교육 기관의 설치, 운영 및 특수교육을 위한 시설 설비의 확충, 정비에 드는 경비를 예산의 범위 안에서 우선적으로 지급해야 한다(제3조 제1항과 제2항)'는 조항을 찾아냈다. 장씨는 이를 관련기관에 제시하며, 아들의 교육권을 위해 밤낮없이 뛰었다.

지금도 장씨는 '학교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는 교육청의 전화를 받던 날을 기억한다. 지난해 7월, 용훈이는 보행을 방해하는 다리 꼬임을 풀기 위해서 다리를 절단하고 다시 접합하는 대수술을 했다.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힘든 수술이었다. 그 후 운동이나 치료를 할 때마다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용훈이가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다. 아픈 아들을 병실에 뉘어놓고 온갖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운데 울린 한 통의 전화는 장씨가 우리 사회에 대해 희망을 갖도록 만들었다.

"아픈 아이가 있는 학교상황을 이해해 엘리베이터 설치를 결정해 주신 동부교육청과 대구시교육청 관계자, 시교육위원님들, 또 학교선생님 어느 누구 한 분 고맙지 않은 분들이 없어요.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함께 걱정해 준 엄마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아이들 교육권이나 이동권, 편의시설은 개선돼야 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와 가정의 입장을 우리 사회가 더 깊이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지금 장씨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평등한 기회와 권리를 찾고 누릴 수 있도록 경산·시지지역 엄마들과 매월 한 차례 모임을 갖고 있다. 장씨의 희망은 장애를 겪는 아이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우리 사회의 장애물을 허무는 것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제휴사/영남일보 글·사진=최경화 객원기자

***

정말 모정의 승리군요. 그보단 아는 게 힘이랄까.  미리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그들을 위한 도움을 미리 생각해서 준비해주면 더 좋은 거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가 사업을 시작한 지 15년 만에 시신기증 신청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다. 한때 의대생들의 해부 실습용 시신이 부족해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최근 몇년새 기증자가 줄을 이으면서 신청을 중단한 것.

장기기증운동본부는 올 상반기까지 5만7천7백12명의 사후시신 기증 신청자를 받았다. 이 중 1.8%인 1,067명은 이미 시신을 기증했다.

장기기증운동본부 관계자는 10일 “지난 7월부터 시신기증 신청을 받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운동본부에 따르면 현재 서울과 경기지역 의과대학의 시신보관용 냉동고는 포화상태다. 운동본부는 이에 따라 기증된 시신이 들어오면 의과대학들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필요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생전에 기증의사를 밝혔던 고인이 끝내 기증할 곳을 찾지 못해 기증을 불가피하게 포기하는 경우까지 나오고 있다. 장기기증운동본부 관계자는 “유가족 중에는 고인의 뜻을 지키지 못했다며 고소를 하겠다는 분들도 있어 난처하다”면서 “최대한 기증할 곳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기증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또 다른 원인은 대학에서 시신을 장기 보관할 냉동고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냉동고가 부족한 대학들은 기증을 많이 받을 수 없을 뿐더러, 실습할 때도 시신 1구당 학생 수십명이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황인찬기자〉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감당이 안 되어서란 얘기군. 이런 기사보다 "장기 기증" 포화상태!  뭐 이런 기사가 나와야 좋은 건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달콤한책 2006-09-1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감당이 안 된다는 소리네요...

마노아 2006-09-11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답한 얘기죠.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세상이라니ㅡ.ㅡ;;;
 

고흐가 그린 풍경 속을 거닐다
 
[오마이뉴스 2006-09-04 17:14]    
 

 

***

 

 

  정말 근사하네요.  고흐와 그의 동생이 나눈 편지글, 몹시 인상깊게 보았는데, 저 사진들을 보니 왠지 애틋함이 느껴져요.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가 대접받고, 그들의 창작 행위가 존중되는 세상이었음 합니다.   어제 감동 물씬 공연 보고서 정신도 거기 두고온 마노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