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홍대에서 친구와 만났고, 친구는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갔고, 저녁에 공연이 예정되어 있던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공연 장소가 상상마당이었는데 그 바람에 상상마당에서 하는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에서 카모메 식당을 떠올렸는데 역시나 같은 감독 작품이었다.
어려서부터 고양이가 늘 따라오는 삶을 살았던 묘생 사요코 선생! 본업은 따로 있지만 부업으로 외로운 사람들에게 고양이를 빌려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외로운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이고 고양이와 부대끼며 사는 삶 속엔 이야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정말로 외로운 건 사요코 자신이다. 올해는 반드시 기필코 어찌 됐든 결혼하는 게 꿈인 그녀의 연애 사업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런지...
영화는 반복과 고조의 기법을 쓰면서 진행해 가는데 나름의 율동성이 있고, 적절한 개그와 적절한 감동을 잘 섞어 주었다.
사요코의 집이 참 마음에 든다. 작아 보이지만 알차게 다 있는 작은 숲속 궁전 같다. 자연이 고스란히 집으로 들어온 느낌에 무엇보다도 자유분방한 느낌을 준다. 제법 엽기적인 성격의 사요코하고도 아주 잘 어울린다. 저 알찬 공간을 홀로 다 차지하고 있어서 부러운가보다.
고양이 빌려준다고 스피커로 외치고 다니는 장면이다. 누구도 소화할 수 없는 놀라운 패션감각을 자랑한다. 근데 저게 어울린다. 대단해!!!
영화 말미에 나오는 애니메이션까지 꼭 다 봐야 한다. 하일라이트는 거기에 있다. 마지막까지 깔깔깔 웃고 나오게 만드는 유쾌 상쾌 통쾌 영화다.
★★★★
8. 베를린
류승완 감독은 이 작품을 천만 관객 동원할 수 있는 포부를 갖고 만들었을까? 주변에서 그렇게 띄워주긴 한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7번 방의 선물이 천만 등극 영화가 되긴 했지만...
영화는 볼만했다. 워낙 액션이 훌륭한 감독이고, 배우들도 빼어나니까. 그래도 좀 약했던 것 같기는 하다. 첩보 영화에서 한 획을 그은 영화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으니 말이다. 한석규의 캐릭터는 좀 겉돌았다. '빨갱이'라는 단어에 경기 일으키는 정보 요원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잘 설명되지 않았고, 그런 인물이 지나치게 감성적인 것 같아서 또 설득력이 약했다. 하정우가 가장 멋있었던 것은 호텔 욕실에서 벌어진 총격씬이었는데, 아내 전지현을 온몸으로 감싸며 머리도 손으로 누르며 보호하는 장면이었다. 이런 역할이 무척 잘 어울리는 배우다. 근데 이 좁은 욕실에서 전지현 같은 가느다란 체격이 아니면 같이 총맞아 죽는겨? 그 심각한 상황에 난 그런 생각이나 할 뿐이고....;;;
가장 의외의 성공은 전지현이었다. 연기가 좋았다. 천만 관객 동원한 '도둑들'에서의 연기는 많이 아쉬웠는데, 톤을 많이 다운시킨 이 영화에서는 분위기도 있었고 연기도 차분하니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대사가 적으니 오히려 연기에 더 몰입이 되었달까. 그녀의 트렌치 코트가 크게 인기를 끌었다는 후문인데, 역시 전지현이 입어서 이쁜 게 아닐까???
초반에 대사도 잘 안 들리고 좀 성의없이 이야기를 쳐내는 것 같아서 몰입이 안 되었다. 내용의 전개도 흐름상 때려맞추는 거지 정확하게 설명하거나 표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이 정도로 '대충' 얘기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을 거란 성의없는 느낌?
감독 류승완의 부인이 제작사의 대표인데 성이 강씨란다. 그래서 제작사의 이름이 '외유내강'이라고... 이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든다.^^ 감독의 동생 류승범의 연기는 좋아 보였다. 얄짤 없는 악역 캐릭터를 그려내고 싶다고 했는데, 정말 잘 어울렸다. 이 개성 넘치는 얼굴 덕분에 뭘 맡겨도 잘 어울리는 배우가 되었다. 배우 안 했으면 뭐가 됐을까 궁금한 배우이기도 하다.
★★★☆
9. 남쪽으로 튀어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이 '남쪽으로 튀어'였다. 원작이 워낙 재밌고 출연 배우들도 훌륭해서 이 영화가 크게 히트를 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찮았다. 주변에 재밌다고 많이 말했지만 그 말 듣고 보러 가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왜 그렇게 안 끌렸을까나??
바다 사진이 멋져서 하나 올려본다. 김윤석은 이 작품의 아빠 역할에 무척 잘 어울린다. 국가의 강제적 체제와 강요하는 시스템을 거부하고 심지어 문명마저도 코웃음 치며 거절할 수 있는 배포를 가진 인물로 분했다. 원작에서는 사춘기 소년 아들이 주인공이지만 영화에서는 아빠 중심으로 흘러간다. 적절히 심각하고 적당히 웃기면서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신나게 본 영화지만 끝맛이 씁쓸한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국정원 직원이 민간인 사찰에 대해 사과하며 내부 고발을 하는 기자회견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가 있었지만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왔던가. 하아, 남쪽으로 튀고 싶은 심정이다.
김윤석의 딸을 사모하는 선생님 역으로 나온 배우는 '착한 남자'에서 눈도장을 찍은 배우다. 드라마 볼 때도 김태우와 엄청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둘이 형제다. 김태우가 형이고, 김태훈은 동생... 형은 좀 느끼해 보이는데 동생 쪽이 난 더 마음에 든다. 호호호...ㅎㅎㅎ
★★★★
10. 문라이즈 킹덤
이 날도 약속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시간 대가 맞는 영화를 고르다 보니 우연히 이 작품과 마주쳤다. 사전 정보도 없었고 기대하는 바도 없었지만 영화는 순수하게 재밌고 유쾌했다.
12살 소년과 소녀가 깜쪽같이 사라졌다. 스카웃 대원이었던 소년은 완벽하게 야영 준비를 한 채 떠나서 소녀와의 밀월(?) 여행이 가능해 보였다. 소녀의 집에서도 소녀를 찾고, 스카웃 야영지에서도 소년을 찾느라 뉴 펜잔스 섬이 발칵 뒤집힌다. 어른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소녀와 소년은 무척 심각하게 서로를 사랑하고 심지어 결혼까지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의 이런 반응을 주변 사람들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해서 이들의 사랑을 응원하는 이들이 동원되면서 이야기는 점점 커지고 사건도 커다랗게 번지고 만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미쟝센'에 있다. 네모나고 네모난 공간 속의 또 공간. 망원경을 동원해서 멀리 보이는 풍경을 가까이 당기는 기법도 자주 사용한다. 몹시 '연극적인'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익숙하지 않고 낯설지만 묘하게 잘 어울려서 그냥 다 수긍하며 이해하게 되는 그런 느낌의 영화다. 유명 배우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평소 맡던 배역들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여서 이 또한 신선했다. 다들 개런티는 제대로 받고 출연한 것일까???
남자 주인공인데 국카스텐의 하현우를 떠올리게 해서 재밌었다. 하현우의 개구진 모습과도 잘 어울린다. ^^
하나하나 의미를 뜯어보면서 비판하며 보기엔 피곤하고, 그저 즐기면서 마음 편히 보면 스스로가 순수해질 것만 같은 예쁜 영화다. 지금 우리 집에는 심지어 포스터도 붙어 있다. 색감이 마음에 들어서. 포스터의 아이들 표정도 아주 심각하다. 그래, 그 나이엔 어른들 보기에 별 거 아니어도 본인들은 늘 심각하지... ^^
★★★★
11. 서칭 포 슈가맨
이 영화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보고 싶어서 찾아간 필름포럼. 아주 작은 극장인데 독립영화 많이 해주고 티켓도 저렴한 편(1관은 주말 구분 없이 8천원, 2관은 6천원)이어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나는 왜 한국 영화라고 생각하고 갔을까?
아메리카 원주민 핏줄이어서 우리나라 사람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얼핏 보면 정말 우리나라 사람 같지 않나?
● 본고장 미국: 음반 판매 6장,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운의 가수!
● 반대편 남아공: 밀리언셀러 히트가수, ‘엘비스’보다 유명한 슈퍼스타!
70년대 초, 우연히 남아공으로 흘러 들어온 ‘슈가맨’의 앨범은 지난 수십 년간 가장 큰 사랑을 받으며 최고의 히트를 기록한다. 하지만 ‘슈가맨’은 단 두 장의 앨범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신비의 가수! 전설의 ‘슈가맨’을 둘러싸고 갖가지 소문만 무성한 가운데, 두 명의 열성 팬이 진실을 밝히고자 그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단서라고는 오직 그의 노래 가사뿐! 기발한 추적 끝에 ‘슈가맨’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과 마주하게 되는데...!(네이버 영화 줄거리다.)
비운의 가수 슈가맨은 라이브 무대에서 분신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하여간에 몹시 불우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게 남아공에서 그의 음악을 추앙하는 팬들이 알고 있는 공통 정보였다. 그러나 진실은 정 반대에 있었으니...
나오는 노래도 좋고, 천재 뮤지션이 이렇게 빛도 못보고 갔구나 싶어 안타까운 마음을 주체못할 때에 반전처럼 찾아온 후반부 이야기에 관객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이쿠, 이런 이야기가! 슈가맨의 숨은 이야기도 즐겁고, 그가 인생을 마주하는 자세도 마음에 들었다. 흡사 삼미슈퍼스타즈의 정신이 떠올랐달까. 그러니까 박민규 작품 말하는 거다.
음악영화는 영혼의 구원 같다. 뮤직 네버 스탑을 보았을 때처럼 감동의 환희가 찾아왔다. 이 영화는 다큐 자체가 픽션보다 더 극적이었고, 결말은 해피엔딩보다도 더 완벽했다. 이런 영화, 참 좋다. 정말 좋다.
★★★★★
12. 더 헌트
이 영화를 몹시 보고 싶었는데 시간대가 안 맞아서 계속 못 보다가 설 연휴 때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칭 포 슈가맨을 보았던 필름 포럼에서 보았는데, 완벽한 영화와 극장에 옥의 티가 있다면, 바로 2관 위층의 레스토랑이다. 조용히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윗층 의자 끄는 소리, 발자국 소리가 수시로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그래도 어려운 독립영화 전용관을 생각하면 그 정도야 감수해야 하지만, 그래도 무척 정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 이 영화를 보는 데에 있어서 무척이나 아쉬운 대목이다.
이 어린 꼬마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얘길 했는데, 누가 그 이야기를 아이의 거짓말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아이의 오빠와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나눈 대화를 듣고, 그네들이 장난으로 보여준 사진을 실제처럼 재구성한 일일 거라고, 그 누가 짐작할 수 있었을까. 아이 역시 자신이 홧김에 내뱉은 말이 한 사람의 인생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은 정말 순식간에 벌어졌고, 작은 공동체로 이루어진 마을에서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되어 대부분의 사람을 감염시켰다. 그 희생자는 우리 중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로얄 어페어에서 관심을 갖게 된 메즈 미켈슨은 이 영화에서도 제대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크리스마스 2부 예배당에서 보여준 이 남자의 텅빈 얼굴과 눈물이라니...
아이는 너무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데, 만약 내가 아이의 엄마라고 해도 당연히 지목된 남자를 의심했을 것이다. 허투루 넘길 수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제3자들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심히 유감이었다. 특히나 마트에서 폭력까지 휘두른 사람들... 소문은 소문을 낳고 억측을 생산하고 억울한 피해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런데 그 광기 어린 투석형의 자리에서 자유롭기란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래 그 사람 전부터 좀 수상했었어.... 라며 뒤늦은 의심에 명분과 면죄부를 주려 하지 않을까.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무겁고도 진지하다. 우리가 있는 이 자리 어디에서든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사냥꾼은 당신이 될 수도 있고, 당신이 바로 사냥감이 될 수도 있다.
★★★★★
13. 분노의 윤리학
좋아하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제훈, 조진웅, 곽도원, 문소리, 그리고 김태훈까지... 출연진들이 참 마음에 든다.
한 여자가 죽었다. 그녀를 직접 죽인 놈도 있고, 그녀를 내내 도청한 사람도 있고, 그녀를 착취하던 놈도 있고, 그녀와 바람에 빠진 놈도 있고, 네 명의 남자가 하나같이 그녀에게는 나쁜 사람들인데 서로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고 우기고 있다.
다들 연기 잘하는 배우들인데 특히 조진웅이 가장 좋았다. 캐릭터가 일단 재밌고, 제일 나쁜 놈이면서 제일 웃긴 놈 역을 적절히 소화해냈다.
조진웅의 입을 빌려서 나오는 '분노의 신'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몹시 그럴 싸하게 들리기도 했고.
영화는 시간을 겹치면서 교차 편집이 많이 됐는데 그때마다 울리던 음악도 귀를 잡아끌었다. 초반에는 반복의 간격이 길었는데 뒤로 갈수록 그 주기가 짧아지면서 리듬감마저 느끼게 했다.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영화였는데, 생각보다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나 보다. 난 꽤 재밌게 보았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이제훈은 파파로티도 있고, 군대 가기 전에 영화를 많이 찍었네... 부지런도 하지....
★★★★
14. 비러브드
친구와 함께 본 영화다. 사전 정보 전혀 없이 보았는데 좀 독특한 영화였다 뮤지컬 영화도 아니지만 주인공들이 노래 부르는 장면이 꽤 많이 나왔다. 이를테면 인도영화스러운 느낌이랄까? 물론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진정 사랑의 나라 프랑스이고, 사랑의 도시 파리던가. 엄마가 창녀로 일하다가 자신을 낳았다고 담담히 말을 하는 딸이 있고, 그 딸을 사랑하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의 어머니에게 창녀 시절 일을 알고 있다고 말을 하고, 그걸 들으면서도 거리낄 게 전혀 없는 엄마라니, 대한민국에선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여자가 꽂힌 남자는 하필 동성애자이고, 그 동성애자는 애인이 따로 있지만 그럼에도 자기에게 빠진 여자와 잘 수도 있는.... 참 난해하고도 알 수 없는 관계들이다. 게다가 영화는 왜 이리 긴지... 자다 깨도 자다 깨도 도무지 끝은 보이지 않고... 분명 여자가 비행기 탄 것 까지는 보았는데, 자다 깨보디 여자의 무덤이 보이네. 헐.....
까뜨린느 드뇌브는 무척 유명한 배우로 알고 있다.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정작 출연작은 알고 있는 게 없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젊었을 적 모습은 알지 못한 채 중년이 되어 몸도 어느 정도 불어 있는 모습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게 왠지 좀 서글펐다.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이긴 한데 시간의 적나라함이 너무 역력해서 말이다. 아마 내가 그녀의 가장 젊고 예뻤을 적 모습도 알았더라면 그 간격은 더 컸을 테지? 아무튼... 영화는 난해하고 힘들었다. 노래는 듣기 좋았지만...
딸 베라 역의 배우는 얼굴에 엄청 큰 사마귀와 점이 있는데 영화 보는 내내 그게 무척 신경 쓰였다. 신기하게도, 외국 배우들은 얼굴에 좀 심하다 싶은 사마귀나 점이 있다 하더라도 딱히 그걸 제거하지는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남자 배우든 여자 배우든 말이다. 우리나라라면 코끝의 섹시해 보이는 점 등이 아니라면 가차 없이 없앨 것 같은데 말이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것일까? 미적 기준이 너무 정형화된 까닭에 놀라워하는 것일까. 아무튼 신기신기....
★★☆
15. 신세계
신세계의 줄거리를 보고는 대뜸 무간도가 떠올랐다.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디파티드와 함께. 무간도가 워낙 큰 성공을 보았기 때문에 삼탕을 하나 보다 했는데, 인터뷰를 보니 전혀 다른 매력을 느낄 거라고 자신만만해 한다. 그리고 그 자신만만함은 근거가 있음을, 영화를 보고 알아차렸다. 이 작품, 재밌다!
이정재는 사실 늘 멋있는 배우였다. 연기도 부족하지 않았고. 그래도 베스트라 꼽을 작품이 좀 아쉬웠다. 이십 년 가까이 지났는데 아직도 모래시계 보디가드를 추억하긴 좀 그렇지 않은가. 이 작품은 아주 잘 맞는 슈트처럼 그의 연기를 빛나게 해주었다. 이중첩자의 불안감과 고뇌도 잘 표현했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도 공감하게 만들었다.
황정민과 연변 거지들이 촌스럽게 나오면 나올수록 이정재의 수트빨은 더더더 빛나고 말았다. 소지섭 같은 탄탄 근육이 아닌 꽤 마른 듯한 몸에서 떨어지는 양복선이 어딘가 좀 애처롭게도 만들고...
무간도와 비슷한 설정이지만 거기서 한발자국 나간 연출로 느껴졌다. 다만 NG라면 송지효인데, 이렇게 연기를 못해도 늘 주연인 게 신기하단 말이지... 국어책 읽는 그 목소리는 어째 답이 없다. 캐릭터도 목숨 걸고 지킬 무언가가 보이지 않아서 역시 설득력도 부족하고....
최민식의 연기도 자주 보던 분위기여서 특별할 게 없지만 황정민은 압권이었다. 이정재가 비쥬얼에서 압권이었다면 황정민은 역시 연기로 갑이다. 어이쿠, 욕도 입에 쩍쩍 붙고 브라더~하고 외치면 괜히 마음 한쪽이 찡하더란 말이지....
영화가 첫 씬부터 무척 하드한 피범벅이어서 좀 힘들긴 한데,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괜찮았다. 다 제거했다고 여겼는데 마지막에 하나 남은 숨은 패를 찾지 못하고 영화가 끝나는 것도 여운을 준다. 세상에 완전범죄란 없는 법(이라고 믿고 싶은...)
★★★★★
16. 스토커
2월은 날도 부족한데 기어이 10편의 영화를 찍고 말았다. 연휴가 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마음 속에 바람 잘 날이 없어서 영화라도 보면서 좀 눌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감정이 아주 치닫던 날에 본 영화 스토커다.
분노의 윤리학에 등장하는 그 '스토커'를 상상했는데, 이 작품에서의 스토커는 주인공 이름의 '성'에 해당한다.
엄마 역의 니콜 키드먼. 워낙 장신에다가 굽도 있을 테니 더더 크게 나오겠지만, 박감독님 뒤의 배우까지 해서 다들 너무 커주시네...
삼촌 찰리 역의 배우다. 팔이 긴 것인가 피아노가 작은 것인가!! 배우들이 있고 있는 옷의 색깔마저도 각각의 상징을 담고 있는, 뚜렷한 색깔을 보여주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조카 인디아를 시선으로 따라가는 삼촌 역을 무서울 정도로 잘 표현해 냈다. 따라다니는 스토커를 연상시킬 만큼.
고혹적인 니콜 키드먼! 스토커 가에 흐르는 핏줄을 엄마는 이해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다. 그러니 외롭고 점점 더 겉돌 수밖에 없다.
숲으로 둘러싸인 스토커 저택. 온 집을 빙 둘러싸며 뚫려 있는 수많은 창문이 오히려 이 집을 더 폐쇄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관음증적 시선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창밖을 돌면서 집안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자주 잡아주었는데 그 불편한 시선은 엄청난 긴장감을 만들어 냈다.
호주 출신의 배우 미아 바시코프스카는 무척 신선한 얼굴이었다. 인형같이 예쁜 건 아닌데 좀 신비로운 분위기도 있고, 차가운 얼굴 안에 뜨거운 기운을 숨긴 캐릭터를 섬뜩할 정도로 잘 잡아냈다. 원래 금발인데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서 감독은 엄마의 머리카락이 아닌 삼촌의 머리카락 색으로 가발을 쓰게 했다고 한다. 삼촌이 금발 머리가 어울리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고...ㅎㅎㅎ
프로필을 보니 '레스트리스'의 여주인공이었다. 전작을 내가 본 게 있구나. 그때도 시한부 인생을 사는 독특한 매력의 소녀 역을 맡았는데, 역시 이 배우는 어딘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매력을 품고 있는 듯하다. 어쩐지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클론 역을 맡았던 배두나도 떠오른다.
영화에서 가장 절정으로 치달았던 것은 인디아가 삼촌 찰리의 접근 목적을 알아차리는 장면이었는데, 이 중요한 순간에서 나는 전화가 왔고 받질 못했다. 기다리던 전화가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내가 찾던 전화였으면 어쩌지? 나가서 받을까? 마구마구 고민하고 있는데 집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찾던 전화가 맞나 봐! 못 받아서 집으로 했나봐. 이 전화를 받아야 해! 이렇게 생각이 널을 뛰니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다. 일단 몸을 숙이고 밖으로 나갔는데, 그게 출구가 아니라 창고였다. 어두컴컴한 그곳에서는 심지어 전화기 안테나도 안 잡힌다. 아, 무서운 공간으로 내 발로 들어왔어...ㅜ.ㅜ 다시 문을 열고 나가서 반대편 출구로 나갔다. 그리고 바로 엄마한테 전화를 해보니, 엄마가 집에 없냐고 궁금해서 전화했다는 반응... 그러니까, 앞서 내가 못 받은 전화는 내가 기다리던 전화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뭘 물어보는 전화였을 뿐... 하아, 이 전화 소동 때문에 나는 영화를 십분이나 잘라먹었고, 가장 중요한 대목도 놓쳐버렸다. 어쩔껴....... 다시 보고 싶다. 흑...ㅜ.ㅜ
마음에 드는 포스터다. 영화에서 시각과 청각이 유난히 발달한 스토커 가문의 음산한 분위기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위쪽 포스터는 잘렸는데 아래쪽에 비친 사진에서 위의 사진들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 아, 찰리의 피흘리는 모습이 무척 섬뜩하다.
이 포스터도 음산하고 섬뜩하고, 그야말로 영화 분위기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진다. 누가 만들었는지 참 감각적이네.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은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들이 무척 선명하다. 영화를 볼 때는 잘 모르다가도 나중에 되짚어 보며 상기해 보고는 무릎을 탁탁 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박쥐가 상을 받기도 했지만, 이 영화는 아예 외국 배우들만으로 찍었는데, 해외에서는 어떤 반응을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
★★★★★
공연이랑 전시회 다녀온 이야기도 쓸 생각이었는데 너무 길어져서 일단 여기서 맺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