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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전 - The Front Lin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국전쟁과 분단을 소재로 해서 만든 영화중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많았다. 쉬리, 공동경비구역JSA,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 동막골, 의형제 등등. 이 중에서 가장 많은 관객몰이를 한 작품은 '태극기 휘날리며'이지만, 영화적으로 가장 촌스러웠다고 생각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동건의 눈빛은 기억에 남지만 그것이 곧 영화의 완성도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웃으면서 웃게 한 공동경비구역JSA와 웰컴투 동막골, 의형제 등이 모두 내게 좋은 감상을 남겼는데, 이제 여기에 '고지전'도 추가해야겠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에 조인하면서 중단되었다. 휴전협상은 무려 2년 반이나 끌었지만, 휴전 얘기가 나오기 전보다 휴전 협상 기간에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누군가는 협상 테이블에서 말로 싸웠다면, 그 기간 동안 전선에서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고지의 주인이 바뀌면서 삶과 죽음이 엎치락뒤치락 부대끼며 싸웠다. 문득,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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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사십칠 일간 계속되었다. 이십 일째부터 신병들이 투입되었는데, 칠 일 이상 살아 있으면 고참병이 되었다. 대원이 다섯 명 남은 중대장에게 연대장은 고지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돌격하라우!"
시화평 전투는 쌍방이 모두 손실을 돌보지 않고, 죽음으로써 삶을 제거하고 죽임으로써 죽음을 갚는 무한소모전이었는데, 그 전략적 득실관계는 지금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유해발굴단장 강중령은 전사戰史에 썼다. -15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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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953년 2월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출발한다. 방첩대 중위 강은표(신하균)는 상부로부터 동부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동부 전선 최전방 애록고지에서 중대장이 죽었는데 시신에서 아군 지휘관의 총알이 나왔기 때문이다.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그가 받은 임무였다. 애록고지로 가는 강은표의 심정은 복잡하다. 전쟁 초기 자신과 함께 북한군에 잡혔다가 실종된 절친한 친구 김수혁(고수)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도 그렇고, 당시 자신들을 잡고서 너희가 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싸우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라며, 이 싸움 일주일이면 끝난다고 호언장담했던 북한군 장교 현정윤(류승룡-목소리에서부터 카리스마가 좔좔 흘렀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면 끝난다던 싸움은 그 후로도 2년 이상을 끌었다. 우리가 왜 싸우고 있는지 지금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선뜻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애록고지 악어부대는 무척 수상한 곳이었다. 유약하기 짝이 없던 이등병 김수혁은 어느새 중위로 특진해 있었고 부대에서 실질적 리더가 되어 있었다. 뿐아니라 이제 스무살이 되었을까 말까한 어린 대위의 카리스마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영화 파수꾼에서 강렬하면서도 애처로운 눈빛을 선보였던 이제훈은 고지전에서도 특유의 눈빛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굳이 화보집 사진을 같이 보탠 것은 순전히 사심이 더해진 까닭!)
파수꾼에서도 그랬지만 상당한 동안인지라 나이보다 훨씬 어린 배역을 깊이있게 소화할 수 있는 장점을 가졌다. (역시 대세는 동안!)
영화 '시'에서 윤정희의 손자로 나왔던 뻔뻔한 중학생은 이 영화에서 열일곱의 말단병으로 나오는데 미성으로 부른 '전선야곡'이 청아하면서도 슬프게 들렸다.
1.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거운데
단잠을 못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아~ 그목소리 그리워
2.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속에 달려간 내고향 내집에는
정안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오
아~아~아~ 쓸어안고 싶었오
(나이가 실감나게 솜털이 보송보송하다.)
그밖에 장훈 감독의 세 영화에 모두 출연하며 씬스틸러의 역할을 해낸 고창석의 능청스런 연기와 류승수의 코믹 연기도 궁합이 잘 맞았다. 까메오라고 생각했던 김옥빈은 생각보다 비중 있는 역할이었고, 영화의 서늘함을 더하는 데에 큰 몫을 담당했다.
영화는 몇 차례나 극적인 순간이 등장하면서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첫번째는 애록고지를 탈환했을 때 인민군이 지하에 숨겨둔 편지와 술 등을 꺼내다가 강은표에게 들켰을 때였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얼마든지 인민군과 내통한다는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었고, 게다가 방첩대 출신 강은표가 목격했으니 손발이 후덜덜해지는 게 당연했다. 첫번째 고비는 그래도 유머러스하게 잘 넘어갔다. 워낙 고지의 주인이 자주 바뀌다 보니 서로 남쪽과 북쪽에 가족에게 편지를 대신 전해주면서 술과 담배를 나눴던 게 전말이었다.
두번째 고비는 열심히 싸워왔지만 현재로서는 정신줄을 놓은 군인이 지금 이곳을 아직도 포항전선이라고 착각하며 자기 부대원들을 찾으면서 등장한다. 여기서 앞서 칭찬했던 이제훈의 연기가 몹시 빛났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생존만이 최고의 전략으로 생각하는 병사들의 처절했던 과거가 등장하면서 수혁(고수)이 얘기했던 '지옥'의 참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세번째 최고의 고비이자 절정은 휴전 당일이었다. 모든 전쟁이 끝나는 순간, 그들의 지옥의 끝이 보이는 순간, 고향과 가족과 기다렸던 모든 따뜻하고 평화로운 것들이 떠오르는 그 순간에 들이닥쳤다. 이 부분의 내용은 한국전쟁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작가의 섬뜩한 상상력이 보태진 것이겠지만, 그 전쟁에서 무엇이 불가능했을까 싶은 마음에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로서는 영화를 본 날이 바로 휴전협정에 조인했던 그 날이었기 때문에 좀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왜 이 영화가 6월이 아닌 7월에 개봉한 것이 더 의미있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안개가 드리워지고 전선야곡이 서로의 진영에서 울려퍼질 때, '크리스마스 휴전'이 떠올랐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크리스마스에 기적처럼 벌어졌던 단 하루의 휴전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같이 낭만스러운 결말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어제는 서로에게 술과 담배를 나누던 사이였어도 오늘은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그들이었으니까.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왜 싸우는지 알았는데, 이제 3년을 피비린내 속에서 살았더니 누구도 왜 싸우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던 비참한 순간이 와버렸으니까...
고엽제 전우회라든가, 6.25참전용사 등등의 이름을 붙인 할아버지들이 가스통 들고 목에 핏대 올리시는 것을 보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한편으로는 연민도 느끼곤 했다. 전쟁을 텍스트로, 그리고 영상 이미지로 접한 우리 세대와, 전쟁을 피부로, 온 몸으로 느끼신 그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스펙트럼은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 연민으로 그분들에게 동의의 한 표를 던질 수는 없지만, 그분들도 피해자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게 꼬리를 따라가다 보면 전쟁에 누구보다 책임이 있었을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더 솟구친다. 그리고 이제는 함께 나누어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전쟁의 기억을 전쟁으로 덮을 수는 없는 노릇.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분노와 응징이 아닌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평화의 길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