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포로 아크파크 1 : 기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4월
절판


무척 독특한 만화다.
근미래이지만 어쩐지 더욱 퇴보한 것 같은 복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한 가상 국가를 배경으로 ‘유머부’에 근무하는 공무원 ‘쥘리우스 코랑탱 아크파크’가 주인공이다.
자신이 관료제의 일부이지만 그 틀을 벗어나는 즉시 처벌받고, 또 관료주의에 이용당하는 비극적인 모습을 씁쓸하고 황당한 유머로 녹여낸 풍자의 수작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림은 아크파크가 등장하는 첫 장면이다.
누구 없냐고 큰 소리로 불러보는데 들려오는 대답이 수상쩍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다.
그런데 그 인물이 자꾸 입체적으로 변한다.
세상에, 게다가 바닥도 변한다.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구로 바뀌어버리고, 그 바람에 아크파크는 멀리 멀리 떠밀려 나간다. 어디로? 설마 지구 밖으로??
이크! 꿈이었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잠에서 깬 아크파크.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한다. 같은 층에 사는 썰렁한 영감의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뒤로 한 채 사람들로 꽉 찬 거리를 뚫고 그가 근무하는 '유머부 청사'에 도달한다.
그리고 만화에서 찢어놓은 듯한 그림이 들어있는 우편물을 받는다. 자신이 그려져 있는 그 만화에는 '기원'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그가 사는 세상에서는 '기원'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에게 대체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유머 회의실에서는 한참 판결을 내리는 중이다.
유머스런 글을 읽어본 뒤 이 개그를 통과시킬 것인지 아닌지를 투표에 붙인다.
썰렁한 유머는 4배 차이로 기각되고 만다.
그리고 이따 아크바크 씨는 수상쩍은 메모를 발견한다.
내일 오후 3시까지 펴보지 말라는 메시지.
뭔가 놀라운 일이 시작될 것만 같다.

혼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아크바크 씨는 오랜 친구이자 문제 해결사인 달랑베르 형제를 찾아간다.
'기원'이란 말이 흥미를 끌었고, 3시에 개봉하라고 했던 봉투를 혼자 여는 것이 겁났기 때문이다.

달랑베르 형제의 집은 독특하다. 가구들이 납작하고 모두 벽쪽으로 바짝 붙어 있다. 까닭은 이어서 나온다.
정확히 3시가 되어서 봉투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만화책에서 찢어놓은 듯한 종이가 나오고 자신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게다가 방금 전에 있었던 장면이 그대로 실려 있으니 모인 친구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가 우리가 할 말과 행동을 달 알고 있다고 상상해 보니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이어지는 그림이 이 작품에서 가장 웃기고 시니컬했던 부분이다.
승강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재발리 유리잔과 식기, 의자를 치워야 했다.
남은 시간은 고작 18초. 그 안에 의자를 모조리 접어서 욕조 아래에 집어 넣고, 음식들을 찬장 아래로 쌓는다.
달랑베르 형제는 호흡이 착착 맞는다. 신의 솜씨로 그릇을 잡아서 차곡차곡 쌓는다.
탁자도 접고 양탄자도 둘둘 말아서 치우고 마지막으로 마루판을 해체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벽에 바짝 붙어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한다.
생활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느라 치르는 무서운 대가였다.
하루에 50~60번씩 엘리베이터가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이 짓을 반복한다니 엽기적이다. 과거에는 역의 코인로커 두 칸을 빌려서 살았다는 그들이니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양반이랄까.
집에 대한 집착과 한이 유난히 많은 한국인으로서 왠지 공감이 가면서 서글퍼진다.

승강기가 지나가고 한숨을 돌리던 아크파크는 편지 안에 또 편지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번엔 과거가 아니다. 앞으로 닥칠 일을 예고하고 있다.

며칠 동안은 회피해보려고 애도 써보았지만, 결국은 기시감을 느낀 그대로 진행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기시감은 아크파크만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찾아간 서점 주인도 책 속에서 이미 아크파크를 보았다는 게 아닌가.
그를 봤다는 책의 제목이 바로 '기원'이었다.
사전에도 없던 단어 기원!
운명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이 책 속에 담겨 있고, 책 속의 칸에 그 속의 칸에 또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이런 기법은 종종 발견하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데이비드 위즈너의 '시간 상자'에도 나오는데 물론 시간상으로 이 만화에서 더 먼저 쓰여진 기법이긴 하다.
아크파크가 펼쳐든 책은 29쪽 뒷부분은 찢겨나가고 없었다. 그 다음은 42쪽으로 끝이다. 이 책의 마지막도 42쪽이다. 한 권 분량으로는 무척 짧지만, 엄청 공들여 그림을 그린 것을 감안한다면, 또 심오한 세계관을 생각한다면 가볍지 않은 이야기이다.

이 책을 어떻게 구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서점 주인장.
그를 찾아 문을 통과하니 나온 것은 책으로 꽉 차버린 좁은 통로다.
책냄새는 기분 좋고, 책의 바다는 황홀할 것만 같지만, 이렇게 두렵고 놀라운 상황 속에서의 책은 무덤처럼 보이지 않을까.
지금 아크파크 씨는 자신의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을 것이다.
자신의 과거가 적혀 있는 책, 자신의 미래가 적혀 있는 책, 거기에 쓰인 대로 그대로 움직이는 자신이라니, 기괴하고 무섭다.
그 책의 다음 페이지를 열어보는 데에는 무한한 용기가 필요할 테니까.

다시 또 책의 시작 부분처럼 누구 없냐고 외치는 아크파크 씨. 꿈 속 상황이 비슷하게 재현되는 중이다.
그리고 나타난 남자는 아크파크라는 사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책 속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역시 무시무시한 책이다.
안내 받은 연구소에는 똑같이 가까머리를 하고 있는 인물들이 만화를 그리고 있다.
그곳에서 아크파크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차원 세계와는 다른 삼차원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여기서 이 책의 가장 독특한 상황이 연출된다.
창조자에 의해 찢겨나갈 수 있는 그들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창조자가 만들 수 있는 구멍을 정말로 보여준다.
작품의 연결 내용과 그림이 정확히 일치해서 책장을 펼치기 전까지는 책의 한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비교하기 위해서 뚫린 종이 너머로 키보드가 보이게 사진을 찍었다.
재밌게도, 뒷장에서도 뚫린 종이가 내용의 연결과 그림의 연출에 전혀 방해를 하지 않는다.
기막힌 설정이다. 작가는 아마도 천재였나보다.

그리고 아크파크 씨에게 전달된 또 다른 메시지.
43쪽의 비밀을 말하고 있건만 책은 42쪽이 끝이다.
43쪽이 궁금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다음 권을 읽어야 한다.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방법이 세련되었다.
마치 부조리극 연극을 보는 느낌으로 진행이 되는데 난해하면서 이해할 만하고, 이해하면서도 궁금하게 만든다.
과연 아크파크 씨는 자신의 기원을 제대로 찾아갈지 기대가 된다.
그에게 이런 혼란을 던진 최종 결정자가 분명 저 끝에 있지 않을까.
끝까지 같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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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1-05-18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찾아 읽는 마노아님도 천재에요!!
전 이런 책은 있는줄도 모르고 눈 앞에 있어도 일단 그림체에 경기가 일어 읽지 못할것 같아요;;;
근데 리뷰를 보니 참 호기심돋는 책이네요.
근미래인데 퇴보한듯한 분위기는 어쩐지 미야자키 하야오 할배의 작품들 같아요.

마노아 2011-05-19 08:50   좋아요 0 | URL
소개 받은 책이니 천재라는 칭찬은 과하십니다.^^ㅎㅎㅎ
그래픽 노블이 색감 대비가 강렬하고 글씨가 작고 많아서 읽는데 좀 어려웠는데 이 책은 그 점에 있어서는 좀 시원시원한 편이에요. 일단 짧고요.ㅋㅋㅋ
퇴보된 근미래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정말 잘 어울려요.
저는 바사라가 떠올랐답니다.^^

네꼬 2011-05-1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찾아 읽는 마노아님도 천재에요!! 라고 나도 말하려고 했는데.
마노아님은 정말 (여전히) 대단. (사진 넣어가면서도 어쩜 이렇게 쓸 말을 다 써요? 신기.)

마노아 2011-05-19 08:51   좋아요 0 | URL
이젠 사진이 없으면 할 말이 뭐였는지를 잊어먹는 것 같아요.
이것도 퇴보된 근미래일까요..;;;;;;

차좋아 2011-05-1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암의 대비가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내다니 멋져요. 인물들이 분명히 살아나는 느낌이네요.
부조리한 연극 한편 보고 싶었는데.... 이걸로 대신해야 겠어요^^

마노아 2011-05-19 12:47   좋아요 0 | URL
흑과 백만으로 이렇게 멋진 시각 효과를 준다는 것이 신기해요.
저도 부조리극을 보는 느낌이었답니다. 남은 시리즈 네 권도 기대 만빵이에요.^^

루쉰P 2011-05-1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카프카와 조지 오웰이 섞인 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이런 책 정말 정말 좋아하는데!! 마노아님 천재에 한 표더!

근데 또 프로필 사진 바뀌셨삼...ㅋ

마노아 2011-05-20 12:42   좋아요 0 | URL
주인공 이름을 거꾸로 하면 카프카가 되어요. 대단한 설정이에요.ㅎㅎㅎ
프로필 사진은 저의 바탕화면 사진과 동일합니다.
얼마든지 바꾸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컬러링이 전화 건 사람을 짜증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나름 자제하는 중이에요.^^ㅎㅎㅎ

굿바이 2011-05-2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훠~ 이거 바로 접수합니다. 아무래도 전집으로 사야겠어요. 주말이 신나지겠는걸요 :)

마노아 2011-05-20 16:43   좋아요 0 | URL
야금야금 먹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즐거운 주말을 이미 맡아 놓으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