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 Bleak Nigh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 고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엄마가 없던 아이였으니 이제 집에 남은 것은 아빠 뿐이지요. 아버지는 슬프고 답답합니다. 아이가 왜 그렇게 가버렸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까요. 아이의 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합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절친한 친구가 두 명 눈에 들어옵니다. 그 친구들을 만나려고 해보니 한 명은 사고가 있기 일주일 전 쯤에 전학을 갔고, 다른 한 명은 학교를 그만 두고 통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전학 간 친구는 장례식에는 나타났더랬지요. 그 친구의 이름은 희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아들 기태와 친구가 되었고, 기태가 중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는 동윤이란 아이인데 이 아이는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요. 기태의 죽음에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걸까요. 아버지는 어떡해서든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분주하고, 이제는 연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옛 정을 무시 못해 그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희준이가 동윤이를 찾아냅니다. 

 

왼쪽부터 학교 짱인 기태,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동윤(짱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싸움 좀 하는 녀석 같았습니다.), 그리고 많이 소심한 희준이까지.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자꾸 오가면서 그들 사이의 이야기를 파고듭니다. 그 장면 전환이 몹시 자연스러워서 하나로 이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친구네 집에서 밤을 지새우며 놀기도 하고, 여자 친구들과 함께 합동 데이트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사랑의 작대기가 서로에게 통한 게 아니었거든요. 희준이가 좋아한 건 오른쪽 끝에서 두번째 여학생이었는데 이 여자애는 기태에게 마음이 있네요. 기태는 여자 아이의 고백을 거절하고 희준이랑 연결시켜 주려고 나름 애를 쓰지만 희준이는 마음이 불편하기만 합니다.  

남학생들이기에 그렇기도 하거니와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능력이 거기까지 밖에 되질 못해서 기태와 희준이는 자꾸 삐걱이며 엇나갑니다.      

-이러지 말자.
-뭘?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이제 그만하자고.
-뭘 그만해?

기태는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서 풀어보려고 하지만 희준은 좀처럼 굳어진 얼굴을 펴지 못하고,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 받으면 기태는 울컥해서 주먹부터 날립니다. 이러니, 두 사람의 화해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결국 기태를 따르는 친구들과 더불어 집단으로 린치를 가하고 희준은 전학 수속을 밟습니다. 기태는 다시 희준의 마음을 돌이켜보려고, 그들의 우정이 이렇게 끝날 리 없다고 허무한 노력들을 해봅니다. 하지만 희준이 그 마음을 받아줄 리가 없지요. 그동안 쌓였던 악감정들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지난 2년 간 쌓아온 우정이라는 이름을 한 순간에 날려버립니다. 기태는 꽤 충격을 받습니다.   

이번엔 동윤이 얘기를 해보지요. 동윤이가 기태와 어긋나기 시작하게 된 것도 여학생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둘 사이에선 상당한 오해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오해였을 것 같지만, 상황이 그렇게 믿어지게 만들었고, 분노는 앞뒤를 모두 잘라내고 중학교 시절부터 누적되어온 우정을 한 순간에 엎어버립니다.  

 

희준이 때와 똑같습니다. 분명 기태가 잘못을 했고, 사과를 했지만 상대방은 풀어지지 못합니다. 극한으로 치달은 감정은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쏟아내게 하고 학교 짱으로 군림하며 주먹과 폭언을 일삼아 온 기태라는 인물을 뒤흔듭니다. 아마 몰랐을 겁니다. 기태라는 아이는 보기와 달리 많이 외롭고 예민하고 섬세한 친구였습니다. 자기보다 안정적인 집과 부모님을 가진 친구들과 달리 위태위태로운 아이였지요. 짱 행세를 하며 친구들과 우루루 몰려다니며 어른들 싫어하는 행동들도 제법 하고 다니는 녀석이지만 그 행동들의 근본에는 언제나 결핍이 자리했습니다. 그렇게라도 자기를 인정해주고 알아봐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정은 일방적인 게 아니고, 친구라는 것도 결코 폭력 위에서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었지요. 기태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차리는 것에 미숙했고, 진심을 표현하는 것은 더 부실했습니다. 키만큼 주먹만큼 성장하지 못한 그 속의 어린아이는 제 생명의 중함과 남겨질 아버지의 슬픔과, 평생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친구들의 마음 따위는 읽히지 않았겠지요. 십대 청소년의 예민하고 섬세한 상처와 성장은 어쩐지 여학생의 느낌이 강하건만, 감독은 선입견을 뒤집고 남학생 위에 그 분위기를 씌웠습니다. 더구나 폭력에 길들여져 있는 아이를 내세워서 말이지요. 영화를 보면서 '수컷'이란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저렇게 힘으로 제 영역을 표시하고, 그 힘에 복종하고, 그 힘에 기대어서 사는 종족을 말입니다. 동물적 본능과 감정을 잠시 눌러두고 차분히 서로의 말에 귀기울이는 법을 아이들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깨우치지도 못했습니다. 성장 과정과 사회화를 통해서 자연스레 체득되었어야 했는데, 이 아이들에게는 그 기회가 오기도 전에 시련이 너무 빨리 찾아와버렸군요.  

 

배우들이 연기를 참 잘했습니다. 기태 역을 맡은 배우는 28세인데 18세 청소년의 느낌을 잘 잡아냈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김수현과도 무척 겹쳤는데 프로필을 보니 일일드라마 '세자매'에서 조안의 동생 역을 했던 그 친구군요. 그 순둥이에서 눈빛으로 사람 죽이는 짱 역할을 해내다니 역시 배우의 얼굴은 극과 극을 달리는 신기를 보여줍니다. 오른쪽의 동윤이는 자꾸 안재환을 떠올리게 해서 좀 착잡했습니다.  

기태의 아버지 역할은 조성하 씨였어요. 출연하는지 몰랐는데 첫 장면에서 나와서 무척 흥분이 되었지요. 이 영화는 평이 좋다는 것만 알았지 줄거리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조성하 씨 나온다고 반가워한 게 금방 무색해졌습니다. 내용이 많이 아팠기 때문이지요. 

 

그늘진 아버지의 모습에 이보다 더 어울릴 얼굴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다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합니다. 이순재 씨가 야동 순재로 분했을 때의 파격미 같은 것 말이지요. 

다시 아이들 얘기로 돌아가볼까요.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라지만, 누군가에게는 몹시 호된 기억으로 남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조차도 스스로 수습하고 헤쳐 나가야 함을 깨달으며 그 아이들이 어른으로 변해가겠지요. 저도 저만할 때에 친구 때문에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해 받은 게 억울했고, 진심이 전달되지 않아서 서러웠고, 기대어 위로받을 데가 없어서 또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반이었고, 스스로 이겨내는 게 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청소년들도 그럴 수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점점 더 이 사회가 각박해져 가고 아이들 안에서도 자본주의와 권력이 금을 그어놓고 있으니까요. 단순 비교로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정서적으로는 훨씬 메말라 있는 이 아이들은 대체 누가 지킬 수 있는 걸까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파수꾼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이...  

그런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그런 아이들을 점점 방치하는 어른들만 많아지는 것 같아서, 그런 어른에 자꾸 합류해가는 것 같아서 부끄럽고 불편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참으로,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눈물이 더 많아진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지켜야 할 게 많은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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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건축학개론-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from 그대가, 그대를 2012-03-26 23:44 
    서른 다섯 승민은 야근과 밤샘을 밥먹듯하는 건축 사무실에 근무한다. 여전히 밤을 새서 피곤에 찌들어 있던 어느 날, 미모의 여성이 자신을 찾아와 말을 건다. 누구...세요? 하고 묻는 그에게 그녀는 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냐는 얼굴로 자신을 소개한다. 스무살 대학 새내기 시절 첫사랑 그녀와 다시 만난 순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나운서 시험에 몇 차례 떨어지고 의사 남편 만나서 결혼을 했다던 그녀가 제주도의 고향 집에 집을 짓고 싶다고 건축을 의뢰한다
 
 
후애(厚愛) 2011-03-1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보고싶어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마노아 2011-03-12 11:17   좋아요 0 | URL
요즘 괜찮은 독립영화가 많이 나와서 참 즐거워요.
후애 님도 주말 즐겁고 따뜻하게 보내셔요.^^

2011-03-12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2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3-1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세상이라는 점 공감합니다.
영화 참 쓸쓸하니 이쁘네요. 독립 영화라서 일산에서 개봉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싶은게 아쉽군요. ㅠㅠ

마노아님은 참 좋은 영화 많이 보셔여. 부럽당~

마노아 2011-03-13 01:05   좋아요 0 | URL
일산이 문화특수가 좋은 동네이긴 한데 상업적으로 치우쳤나봐요. 몹시 아쉬운 부분이에요.
울 동네 정말 외졌는데 다행히 독립영화관이 있어요. 다행이에요.^^;;;

hnine 2011-03-12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런 영화를 보면 어쩔줄을 모르겠어요. 너무 오래가서 보기도 겁날 정도...
여기 대전에선 큰 극장에선 안하고 예술영화만 상영하는 소극장에서 하더군요. 집에서 한시간 걸려 가야하는...ㅠㅠ

마노아 2011-03-13 01:06   좋아요 0 | URL
청소년 이야기에 관심이 많으신 hnine님이라면 잔상이 더 오래갈 것 같아요.
어휴, 그렇게 멀리까지 가야하군요...ㅜ.ㅜ

Mephistopheles 2011-03-13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봐야지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던 영화...더불어 에니멀 타운도 봐야지 봐야지 하고 있는 영화.

마노아 2011-03-13 16:39   좋아요 0 | URL
아, 그 영화는 소재가 너무 무거워서 쉽게 도전이 되질 않네요..ㅜ.ㅜ

순오기 2011-03-1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수꾼이 이런 영화였군요~ 우리 동네 영화관에 걸리려나??

마노아 2011-03-15 14:33   좋아요 0 | URL
알라딘 입소문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영화 참 괜찮았어요.^^

꿈꾸는섬 2011-03-15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수꾼, 얘긴 들었는데 내용은 전혀 몰랐거든요. 마노아님 글 읽고나니 마음이 짠하네요.
독립영화라 우리 동네 상영관에선 볼 수 없겠어요.ㅜㅜ

마노아 2011-03-15 23:38   좋아요 0 | URL
독립영화 중에는 꽤 대중적인 느낌으로 만들었는데 다양한 곳에서 상영이 되질 않아서 안타까워요.
여러모로 짠한 우리 아이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