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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1 - 개정판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9년 7월
평점 :
해마다 올해의 책이 있는 것처럼 올해의 드라마도 꼽아봤다. 2007년도에는 한성별곡을, 2008년도에는 일지매가, 2009년도에는 미남이시네요? 그리고 2010년에는 성균관 스캔들이 있었다. 원작이 워낙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방송 전에 보지 않았다. 원작을 능가하는 드라마를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제 드라마를 먼저 본 나는 드디어 원작을 찾아 읽게 되었고 둘 모두 멋지다는 평범한 결론을 내려버렸다. 각자 매력 포인트가 다르긴 하지만.
익히 알려진대로 이 이야기는 졸지에 성균관 유생이 되어버린 남장 여인 김윤희의 파란만장한 성균관 생활기이다.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남정네들과 함께 '잘금 4인방'으로 불리지만 이 책 1권에서는 아직 '잘금'의 ㅈ도 등장하지 않았다. 드라마에선 이선준이 김윤식의 실력을 알아보고 성균관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끔 다리를 놓았지만, 원작에서는 김윤희가 자청에서 사수 노릇도 하고 거벽 자리도 알아보는 모습이 나온다. 그녀의 빈궁한 가세를 생각할 때 이쪽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굶어 죽나, 들켜 죽나 매한가지인 노릇이니.
캐릭터들을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컸다. 드라마에서 뭘 극대화시켰는지, 어떤 점을 강조했는지 비교할 수 있고, 이 책에서는 어떤 점이 강점으로 드러나는지 찾아보느라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먼저 이선준. 박유천이 연기한 드라마의 이선준은 워낙 법도를 중시하는지라 상당히 까칠했다. 김윤식과도 투닥거리고 으르렁거리는 장면도 초반에 꽤 많았다. 게다가 외관에서 보다시피 꽃미남이긴 하지만 육체파는 아니었다. 그런데 원작에서 묘사하는 이선준은 잘 생겼고 게다가 건장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무척이나 상냥한 사람이어서 처음 마주친 그 순간부터 이리 착한 사내가!라는 감탄사를 내놓게 했다.
"모든 인간은 제가각 삶의 추를 가슴에 달고 있습니다. 추의 무게도 사람마다 제각각이지요. 나이가 어리다 하여 나이가 많은 이들보다 반드시 가벼운 삶의 무게를 지닌 것이 아니니, 눈물을 흘려선 안 된다는 법도 없습니다." -71쪽
소과 초시에서 처음 만났는데 먼저 시권을 제출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이 내버리면 늦게 쓰고 있던 윤식이 초조해할까봐 배려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 더불어 자신의 그런 배려를 포장하지 않고 자신이라면 그럴 것 같다고 말하는 겸손함까지. 기억나는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때 나랑 같이 밥을 먹던 내 짝꿍은 무척 밥 먹는 속도가 느려서 빨리 먹던 나는 속도를 맞추느라 일부러 밥을 조금씩 남겨 놓았다. 미리 다 먹고 젓가락 내려놓으면 천천히 먹던 그 친구가 밥 먹을 때 불편할 것 같아서. 그런데 이 친구가 내가 일부러 천천히 먹는 것을 모르고 자기 밥 그만 먹겠다고 일어나는 게 아닌가. 아씨, 나는 밥 남길 생각 없었는데, 후다닥 먹어치우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스윽 스쳐간다. 오래 됐지만 왠지 울컥!
드라마에서 걸오가 처음 등장하는 씬이 참 멋있었다. 위험에 처한 윤희 낭자를 도와줬고, 험한 꼴을 볼까봐 눈을 가리고 상대를 제압했던 아주 멋진 장면! 많은 팬들이 거기서부터 걸오앓이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명장면이 원작에서 사실은 이선준의 것이었다. 오옷, 캐릭터가 차별화되니 이리 멋진 장면도 나눠쓰게 되는구나!
윤희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은 사실 드라마에서 아주 멋지게 옷을 차려입었다. 훌륭한 원작 덕분이지만 그것을 시각화하고 입체적으로 만든 공로가 분명 있다. 그래도 주인공 윤희의 캐릭터는 아무래도 원작의 섬세함을 다 담아내지 못했던 듯하다. 뭐랄까. 그녀의 감정 곡선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양새가 정말 눈앞에 그려졌다. 내가 그녀였더라도 그랬을 것 같은 이심전심.
초시 합격 발표를 보러 여자 옷 차림으로 나섰다가 이선준과 마주쳤을 때 재빨리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그 손길이 애처로왔다. 작아져서 팔목이 보이는 짧은 저고리, 상투를 투느라 짧아진 머리카락을 숨기느라 애써 선택한 새앙머리를 쓰개 치마로 급히 가리는 모습 등등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감추지 못한 낡은 치마의 빛바랜 색이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가난해도 의젓했던 윤희였지만 마음을 빼앗긴 상대 앞에서 아름답게 보이고픈 것은 당연한 욕망이니까.
성균관에 들어가서 그녀는 내내 불안해했다. 여자인 것이 들통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랬음에도 같은 중이방을 쓰는 이선준 앞에서는 자꾸 여자의 모습과 본능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그걸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혹여 자신이 여자라는 것이 들통나면 그 불똥이 튈까 봐 이선준만은 제가 여자라는 걸 가장 모르기를 바라면서도, 그 앞에 여자로 설 수 없고 남자의 외피를 입고 있다는 것에 그녀는 자주 설움을 느낀다. 그러다가 윤식의 누이 윤희의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면 저도 모르게 선준 앞에서 그녀를 멋지게 포장을 하게 된다. 못하는 바느질 솜씨도 좋다고 떠벌리고 심성도 곱다고 제 입으로 자랑한다. 더불어 누이의 이름을 빌려 자신이 선준에게 느낀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은 슬프면서 아름다웠다. 아, 그 마음이 얼마나 요동쳤을까나.
아직 1권만 보았기 때문에 몇 번 등장하지 않은 부용화 캐릭터는 진심을 잘 모르겠다. 양갓집 정숙한 규수로 나오는데 드라마에서는 깨방정 철딱서니 귀여운 아가씨로 등장해서 혹시 원작 소설도 그같은 본심이 있는 건지, 아님 정말 얌전한 처자인지 아직 모르겠다. 아무튼 부용화가 등장하는 바람에 윤희의 더듬이가 아주 예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남장을 하고 있어도 속이 여자인데 감까지 느려질 리가 없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선준과 오래 함께 있을 수 없는 처지였다. 남장 노릇하고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집안을 생각한다면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지방관 관직에 머물려 도성을 떠나 있어야 할 몸이었다. 그러니 매 순간 순간이 소중했고, 지금 이 순간을 방해받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자신도 반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더욱! 그래서 일부러 서운하게 돌아서고, 그게 미안해서 다시 되돌아 보고, 그랬다가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더 큰 좌절을 느끼는 그녀는 천상 사랑에 빠진 처자. 이 책이 로맨스 소설이니까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미묘한 심리 묘사들과 상황 전개가 매끄럽고 자연스러워서 몰입감이 점점 커진다.
드라마는 시각적인 요소를 위해 사실 고증에 있어서 많이 양보하거나 포기하고 넘어갈 때가 많아 보인다. 그런 면에서 책은 훨씬 더 당당하고 자유롭다. 이를테면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밥상 없이 바닥에 전포 펼쳐 놓고 상을 대신하는 모습 등등 말이다. 드라마에선 모두 독상을 받았는데 성균관에서 그 많은 학생들에게 상을 제공하진 못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사실감을 부여하는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드라마에서는 정조 임금의 캐릭터와 박사 정약용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원작 1권에서는 정조의 출연 분량이 너무 적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도 처음으로 김윤식을 만난 장면에서 그를 다독이는 모습은 내가 기대하는 정조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너는 학문에만 전념하여 하루라도 빨리 대과에 급제해 나에게로 오라. 내 너의 미려한 용모를 기억하고 있겠노라."
김윤식 행세를 하고 있는 윤희에게는 날벼락이고 사정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참 재밌는 장면이다. '나에게 오라'는 전제 군주가 할 수 있는 요구가 당당해 보였다. 그건 순전히 정조 임금을 향한 나의 편애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더 좋다.
아우 김윤식의 마음씀씀이도 잘 표현해 주었다. 누이가 성균관에 가 있는 동안 제가 여자 옷을 입고 누이 행세를 하겠다는 말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패였음에도 대견해 보였다. 때는 조선시대니까.
초선의 캐릭터는 또 어떻던가. 아직 1권만 본 내가 드라마처럼 그녀가 숨겨진 살수일지는 알 수 없지만(현재까지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허영끼 많고 욕심도 많은 기녀임에도 나름의 품은 설움들과 진정성 느껴지는 연모의 감정이 잘 살아 있다. 이제껏 그녀를 칭찬하던 사내들이 늘 외모에 치중되어 말한 것에 비해 윤희가 그녀의 그림 솜씨를 칭찬한 것이 기뻤던 것이다. 양반들의 허세 쩌는 행동거지가 충분히 그려진다. 저보다 잘난 기생도 있을 수 있건만 어디 인정 한 번 해봤겠는가.
드라마에서는 걸오가 한문으로 벽서를 썼는데 원작에서는 처음부터 언문으로 벽서를 썼다.
"딴 나라 글자를 딴 나라 말처럼 엮은 시가 무슨 시겠냐? 시는 감정을 담는 그릇인데, 남의 글자로 무슨 감정을 얼마나 담는다고. 그건 우리의 감정이 아니다." -401쪽
왜곡된 우리의 영어 교육과 우리 말, 우리 역사에 대한 천시가 생각나서 한숨이 나왔다. 그런 마음이니 작가도 걸오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주인공 윤희가 미모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글씨에 재능이 있고 학문을 탐하는 마음을 가진 것도 반갑다. 그녀가 말한 대로 여인에게 배움의 기회가 닫혀 있던 시공간 안에서 비록 동생의 이름을 빌려서 하는 공부지만, 성균관에서 거관수학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목숨을 걸만큼 위험하기는 하지만 독자는 이미 그녀의 행복한 결말을 알고 있으니 걱정은 접자. 처음으로 갖게 되는 스승님이 가슴을 벅차게 하고,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는 동생을 위해 열심히 필사를 하는 그녀의 부지런하고 착한 손이 아름답기만 하다.
로맨스 소설답게 유건의 끈 하나에도, 잠든 머리의 상투가 얼굴을 할퀴는 장면 하나에도 미묘한 떨림과 긴장감을 동반시킨다. 그모습을 연출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읽어내는 것이 즐겁다. 동시에 성균관 유생답게 학문과 정책을 가지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장면도 근사하다. 노론과 소론, 남인, 게다가 무당무파를 주장하는 여림까지 한데 어우러진 그들의 뒤로 '탕평비'가 배경으로 서 있는 장면에서 1권이 끝난다. 당파 싸움이 치열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그것을 한껏 비틀고 사용해서 멋진 연출을 하는 작가의 감각이 눈부시다.
"난 변화를 시키려는 게 아니라, 단지 비난만 하고 끝내는 무능은 저지르고 싶지 않을 뿐이오. 세상에는 완벽한 정책은 없소. 보다 나은 정책이 있을 뿐이지. 그러니 그 어떤 정책이라도 비난이 따를 수밖에 없소. 그 비난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조선을 위한 정책을 알고 싶소. 진심으로." -249쪽 이선준
"나라의 돈을 풀어 가난을 구제한다고 대수는 아니지요. 그저 돈만을 나눠 주면 이 나라의 백성은 모두 거지가 될 것이고, 그 돈으로 일거리를 만들어 준다면 이 나라의 백성은 모두 일꾼이 될 것입니다. 이 땅에는 농부들만 있는 게 아님에도, 가난을 구제하고자 나서는 방법이 죄다 거지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 (김윤희)
"일거리를 만들어 준다고? 글쎄다, 이놈의 신분 아래에 묶여서는 그도 힘들지 않겠나? 누구나 천한 일거리는 하지 않으려고 할 터이니 말일세. 신분을 철폐하는 것도 문젤세. 지금 신분 철폐를 외치는 이들도 실상은 신분 철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신분 상승을 바라는 것이거든. 이름 없는 한낱 작은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제각각 서열을 만들고, 동네 어린 꼬마들조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위와 아래를 만들어 놓지 않는가. 지금의 신분 체계를 무너뜨린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또다시 새로운 신분제도를 만들어 위와 아래를 둘걸세. 그것이 본능이야. 만약에 돈이 곧 신분이 되는 세상이 오면 어떨 것 같나? 난 그것도 비참한 건 매한가지일 듯싶으이." (구용하) -419쪽
시대적 배경을 18세기 후반으로 잡은 것은 아주 현명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고 신분제도가 흔들리고 있는 때, 개혁의 꿈을 안고 있는 군주가 화합정책을 쓰려고 애쓰고 있던 그 모든 조건들이 작품 속에서 하고 싶은 말들을 맘껏 뱉을 수 있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 2부에 해당하는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에서는 좀 더 매섭고 구체적인 정책 비판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로맨스는 빠뜨리지 않고.
순식간에 읽었는데, 그래도 더 읽을 거리가 3권이나 남아 있어서 흐뭇하다. 오랜만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재미난 소설을 만났다. 덕분에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