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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02년 대선 투표 결과를 기다리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대놓고 홍보는 못해도 브리 자를 들어 보이며 2번 찍자고 마구 꼬시던 나날들의 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 당선 확정 문구를 확인한 순간 눈물이 났다. 살면서 그렇게 정치인을 응원해본 적이 없었고, 지지하던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 그렇게 기쁠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그는 퇴임한 대통령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는 더 인기가 많아졌다. 5년 내내 너무 욕을 많이 먹어서 안쓰럽기까지 했던 그가, 이제 그 소박한 모습 그대로 고향 땅에 기대어 편히 살았으면 싶었다.
그런데,
2009년 5월 23일, 돌연 그가 죽어버렸다. 충격이었다. 그것이 자연사가 아니었고 사고도 아니었고 자살이었기 때문에 더 끔찍했다. 그가 죽음의 길로 떠나는 여정을, 국민들은 거의 생중계로, 실시간으로 맞닥뜨렸다. 고양이도 쥐를 사냥할 때 저리 구석으로 몰지는 않을 것 같은데, 불과 얼마 전까지 대통령 자리에 있었던 사람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몰아간 대한민국의 현실이 섬뜩하리만치 무서웠다. 무엇보다 그가 가여웠다.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흘렀더랬다.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울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 앞에서 우왕좌왕했다. 그의 분향소에 꼬리를 물고 사람들이 찾아왔고, 국민장이 치러지는 동안의 그 수많은 인파, 그리고 봉하로 이어지는 추모 행렬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가 죽은 뒤에 많은 책들이 쏟아졌다. 생전에 준비하고 있던 책들도 있었고, 사후에 준비된 책들도 있었다. 많은 책들 중에서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 책이 나왔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생전에 원고 작업을 거의 해두었던 터였기에 '자서전'이란 이름이 무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출생해서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뛰어든 이야기는 '여보 나좀 도와줘'와 상당 부분 겹치지만 여전히 지루하지 않게 읽혔다. 그밖의 대통령의 자리에서 수행했던 많은 일들에 대한 고백과 퇴임 후의 이야기도 모두 그의 육성으로 들린다. 아직도 TV를 틀면 자연스럽게 나올 것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가난에 대한 설움을 온 몸으로 새기며 성장했던 인물이다. 대학을 가지 않고도 사법고시를 붙은 놀라운 이력을 가졌지만 그 무리 속에서는 여전히 미운 오리 새끼같은 존재였다. 판사가 되어보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알아서 굽실거리는 사람들,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도 알았고, 나름 그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부림사건'을 맡기 전까지는...
고되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훌륭한 판검사 혹은 변호사가 되어 약자를 보호해주는 인물...은 아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도 세속적인 가치를 아는 인물이었는데 독재 정권 하에서 죄없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죄인으로 둔갑하는 상황과 정면으로 맞닥뜨리자 그 안에 녹아 있던 연민이 폭발했다. 욱하는 성미가 있었던 그는 화끈한 느낌의 인권 변호사로 거듭났고,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동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87년 6월이 되었다. 뜨거웠던 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라는 열매를 거머쥐었지만, 그 단맛을 마신 것은 엉뚱하게도 노태우였다. 양김은 분열하였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다. 많은 피를 흘렸던 87년 항쟁이 그런 식으로 소화되는 것을 누군들 참혹한 심정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 와중에 김영삼 총재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는다. 그렇게 88년에 국회의원이 되면서 그는 정치인이 되었다. 연이어 청문회 스타로 발돋움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도 각인된 이름이 되었다.
3당합당할 때는 또 어땠는가. 모두가 비겁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주먹 불끈 쥐고 "이견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합시다."라고 외쳤던 인물. 이 장면을 나중에 TV에서 보면서 피가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쇼맨쉽이 아니라, 진정성,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되고 다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참으로 많은 고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편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진절머리나는 지역구도를 타파하고자 가능성도 없는 지역구에서 몇 번이나 선거를 치렀고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경선 과정의 험난함도 만만치 않았다. 보수 언론은 또 얼마나 그를 뒤흔들어 놓았던가. 그때마다 '원칙과 소신'을 외치며 물러서지 않던 그는 마침내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해프닝도 참 많았다. 대통령 후보가 미국 한 번 방문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측근들이 불안해 했던 것이다.
기나긴 논란 끝에 미국 방문 문제를 정리했다. "갈 일이 있으면 간다. 일이 없어도 한가하면 갈 수 있다. 그러나 바쁜데 일도 없으면서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 갈 일도 없고 바쁘기도 해서 결국 미국을 가지 않은 채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이 일을 겪으면서 우리 나라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미국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일수록 더 그랬다.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국민들이 대통령 후보가 미국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것을 불안하게 여긴다는 근거 없는 불안감.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이런 것에 휘둘려 일도 없이 사진 찍으려고 미국에 가는 것은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187쪽
버지니아 총기 난사 사건이 생각난다. 당시 살해범 조승희가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기에 사람들은 그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에 무언가 불똥이 튈까 봐 전전긍긍했다. 오히려 이상하게 본 건 미국쪽이었다. 그 사건은 '그들'의 문제였지 대한민국의 일이 아닌데도 우리는 얼마나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가.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만날 때의 비교되는 사진이 오래오래 인터넷을 달구기도 했다. 슬픈 자화상이다.
대통령 선거 전날 정몽준 의원이 후보 지지를 철회했었다. 하루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벌어진 날벼락이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도 책 속에 언급되어 있다. 정몽준은 당시 권력분점을 문서로 보장받으려고 했다. 거절하자 구두 약속이라도 원했다.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측근들은 비공개 약속이라도 해주는 게 어떻겠냐고 설득했지만 그것도 거절했다. 거짓 술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실패한 대통령이 되느니 차라리 실패한 대통령 후보로 남겠다는 게 그의 의지였다. 여전히 원칙과 소신이다. 남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들이대는 그의 기준 말이다.
결국 후보 단일화는 되었고 같이 유세장을 돌았다. 나중에 들으니 정몽준은 둘이 유세할 때 다른 정치인을 단상에 올리지 않기로 양해를 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에서처럼 선거운동 마지막 날에 그동안 함께 수고한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정동영과 추미애 의원을 단상에 올렸다. 구겨지는 정몽준 대표의 얼굴. 이것이 폭탄의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 그가 후보 지지를 철회한 것은 오히려 국민들의 뇌관을 건드렸다. 동정표가 쏟아진 것이다. '정몽준, 노무현을 버렸다'는 제목의 조선일보 1면 기사 역시 양날의 칼이 되었다. 참으로 극적인 순간들이었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야당과 보수 신문들의 협공을 받아야 했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제목 아래 얼마나 닥달을 당했던가.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던 야당도 나빴지만 더 나빴던 것은 언론이었다.
20년 정치를 하는 동안 언론과는 늘 불편한 관계였다. 정치인과 언론은 어느 정도 관계가 불편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신문들은 ‘특별하게’ 불편한 관계였다. 그들은 임기 내내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했다. 나는 그 신문들과 끝없이 싸웠다. 그들은 몇 백만 부의 발행부수로 표현되는 막강한 미디어의 힘으로 나를 공격했다. 논리의 힘, 사실의 힘, 진실의 힘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싸움에서 대통령의 권력을 무기로 쓰지 않았다. 국민이 언론과 싸우는 데 쓰라고 그 권력을 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인의 권리, 시민의 권리만 가지고 싸웠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믿었기에, 패배했지만 끝까지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독재 시대 그 신문들은 국가 권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정부가 준 보도지침을 충실하게 따랐고, 그 대가로 여러 가지 특권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려고 눈물겹게 노력하고 희생을 감수한 기자들이 그 시대 언론의 역사를 빛나게 했지만, 이 신문사들은 부당한 기득권의 성벽 안에서 정치 권력과 유착했다. 그런데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정치 권력의 지배에서 벗어난 보수신문들은 시장 권력과 유착되었고 그 자신이 새로운 사회적 권력이 되었다.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언론 자유의 과실을 먹으면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권력이 된 것이다. – 276쪽
권위주의를 벗어던진 대통령은 근사하지만, 그가 내던진 권위를 엉뚱하게 그의 정적들이 겹쳐 입었다. 대통령이 만년필을 쓰지 않고 플러스 펜을 쓴다는 것까지 트집 잡아 비아냥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난뱅이 상고 출신의 대통령이라니, 언감생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의 방해와 모략과 저주는 치열할 지경이었다.
대통령 노무현의 모든 행보가 다 박수받을 만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어느 누구라고 그런 길을 갈 수 있을까. 양극화가 심화되었지만 그 한 사람의 탓으로 몰아붙이기에는 지나치다. 전 세계적 흐름이었으니까. 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박정희 때부터 이미 준비했던 것이라고 한다. 서울, 정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지 않은가. 전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이라크 파병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의 이야기를 한 번은 들어보자.
이라크 파병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서 파병한 것이다. 때로는 뻔히 알면서도 오류의 기록을 역사에 남겨야 하는 대통령 자리, 참으로 어렵고 무거웠다.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보내기는 했지만 최선을 다해 효과적인 외교를 했다. 애초 미국의 요구는 1만 명 이상의 전투병력 파견이었다. 청와대 안보팀과 국방부는 최소 7,000명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참모들이 파병 자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론은 전투병 3,000명을 보내되 비전투 임무를 주는 것이었다. 이런 절충적 해법을 찾고 미국의 양해를 구하는 데서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파병 반대운동이 큰 의지가 되었다. 시민사회의 강력한 반대운동과 매우 비판적인 국민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도 이런 수준의 파병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 245쪽
시민 한 사람과 대통령으로서의 선택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것이 일치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노력할 뿐. 그나마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저 정도 수준에서 그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 크게, 더 많이 반대하고 그리하여서 그것을 지지 세력으로 만들어 주었더라면 조금 더 힘낼 수도 있었을 텐데, 국민의 책임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남북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 때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었다. 아무래도 '효과' 측면에서. 저들이 불안해 하고 있으니 먼저 신뢰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얘기에 한숨이 나왔다. 남북관계. 이렇게나 멀어져 버리고, 이렇게나 힘들어져 버렸는데... 과연 저 위에서 '정치'라는 것을 하는 인물들은 '평화'를 바라기는 하는 것일까? '평화'라고 쓰고 읽기는 '전쟁'이라고 읽는 것은 아닌지......
재임 시절, 그는 권력기관을 자신의 정보 기관으로 전락시키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었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야 마땅했고, 그랬기에 지켰다. 검찰 개혁을 위해서 애썼지만 검찰은 바뀌지 않았다. 과거 독재 정권 하에서 온갖 비리와 인권 탄압에 앞장섰으면서도 과거사 정리와 그에 대한 반성을 끝까지 거부했던 자들이다. 드라마 '대물'을 보면서 하도야 검사를 마구 응원하게 된다. 저런 사람이 검찰 안에서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내부로부터 개혁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서 국세청을 동원한 적 없고, 국정원을 움직인 일도 없건만, 그가 퇴임한 이후 그는 말도 못할 수모를 그들로부터 당해야 했다. 측극의 목을 죄어오는 것이 그로서는 더 큰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그의 임기 말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우리는 못볼 꼴을 참 많이도 보았다.
지난 시기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교체와 같은 민주주의 가치, 역사의 정통성, 권위주의 해체, 법치주의의 실현, 사회의 공정성과 투명성, 그런 것들이 주제가 되었다. 2002년 대선에서도 이회창 후보가 ‘반듯한 사회’를 주장했고 나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 ‘떳떳한 국민, 당당한 나라’와 같은 가치를 선거구호로 내걸고 선거전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것이 잘못되었다”, “무엇을 바로잡고 발전시키겠다”, “무엇을 개혁하겠다”, 이런 것이 없었다. 국가의 주요 과제, 예컨대 남북관계나 평화 정책과 같은 문제들이 전혀 쟁점이 되지 않았다. 토론회에서도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고, 그렇게 진행은 되었지만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 없이 다 그냥 넘어갔다. “경제 잘하는 솜씨 좋은 대통령이다.” 이런 주장만 들렸다. 지도자의 도덕성 검증도 흐지부지 지나갔다.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와 역사의 중요 과제가 제출되고 국민과 함께 토론하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새 정부가 그 과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그런 과정이 아예 생략되고 말았다. – 292쪽
대선 후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건, 어떤 비리가 감춰져 있건 상관없이 무조건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오죽하면 그럴까... 라고 이해하기에는 용납이 되질 않았다. 사실, 묻고 싶었다. 그래서, 살림살이 많이 나아지셨나요?
새해 예산안을 보고 기겁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후안무치일 수가. 형님 예산은 뭐고 영부인 예산은 또 뭔가. 밥 굶는 학생들 식비 하나 대주지 않고 강바닥만 파겠다고 하는 이런 나라를, 과연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환멸이 쌓이고, 불신만 높아가고, 좌절만 깊어간다. 그렇게 더 정치에 눈을 감게 만들고, 내 앞가림 하기에 급급하게 만드는 게 저들의 수작같은데, 그 수작에 놀아나지 않고 살기가, 너무 힘이 든다. 전직 대통령도 자살할 수 있는 미친 나라라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솟는다.
그가 죽었을 때, 그가 죽임 당했을 때, 분노와 두려움으로 오래오래 떨어야 했다. 꼭 그렇게 가야만 했을까, 원망이 들기도 했다. 그가 절망한 세상이 우리 모두의 절망 같아서 막막하고 먹먹하기만 했는데, 책을 보면서 오히려 조금은 기운이 난다. 그는 죽음 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지만, 그것이 완벽한 포기와 절망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연민의 실타래와 분노의 불덩이를 지니고 살았던 그는, 반칙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대한민국을 그런 믿음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 믿음이 국민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한, 노무현이 대통령일지라도 그 시대는 ‘노무현 시대’일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다 이루지 못했던 꿈을 마저 이루기 위해 전직 대통령으로서 시민으로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가 그 꿈을 모욕하고 짓밟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는 생명을 버렸다. 그가 생명을 던진 그 자리에, 이제 ‘사람 사는 세상’의 꿈만 혼자 남았다.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이 그렇게 살아 있는 한, 그를 영영 떠나보내지는 못할 것 같다.– 351쪽
이 책을 정리한 유시민의 글이다. 그가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 그거 정말 우리 모두의 꿈 아니던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던, 열정이 가득했던 한 사내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꿈꾸고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 사는 세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만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던, 제법 괜찮았던 대통령을 한때 가진 적이 있었다. 참으로 순박하고 소박했던, 자연인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온통 피와 눈물로 얼룩진 현대사에 그런 인물 하나 새겨놓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지금은 고마운 기분이 든다. 그가 꾸었던 꿈을 함께 꿈꾸는 더 많은 사람들을 남겨놓았으니, 그는 할만큼 했다. 이제는, 부디 편히 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