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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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가 돌아왔다. 단편 18편을 두 권의 책으로 묶어서 '더블'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LP 같은 느낌으로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만들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책을 내놓을 수는 없는 터, 두 권의 책은 값도 두배로 뛰고 출판사의 모험도 그만큼 커졌을 텐데, 박민규라는 이름 석자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side A,B로 나뉘어 있고, 일러스트 Book도 한 권 끼어 있다. 얇은 책자에는 각각의 단편이 어떤 의미로 씌어졌는지를 짧게 설명한다.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그림과 함께. 하나하나의 단편을 어떤 사람과 연관지으며 읽는다는 건 무척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그 대상은 부모가 되기도 했고, 인류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놀라운 인물일 수도 있고, 불특정 대다수가 될 수도 있다. 우리들은 모두 그 중 하나에는 끼어들게 된다. 그러니까 이 책은, 결국 독자를 위한 것이 된다. 반가운 선물이다. 

워낙 다양한 매체에 소개된 다양한 작품들이다 보니 모두가 제 각각의 색깔을 갖고 있다. 때로 어떤 작품은 너무 4차원 적이어서 평범한 독자로서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도 있었다. 그렇지만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은 유머와 진지함이라는 것! 뭔가 슬픈 얘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유머를 놓지 않고,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한숨이 곳곳에 있었다. 그래서 이 책들은 가벼우면서도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첫번째 단편 '근처'는 미국의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에게 주기 위해 썼다고 했다. 1949년에 태어나 1984년 암으로 사망했던 그는 2004년 세상에 나타나 자신은 사실 죽지 않았음을 DNA와 혈액, 그리고 지문을 통해 입증하고 팬들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이런 소개글을 읽고서 작품을 읽는데, 그렇다고 딱 그 인물과 뭔가 관련이 있는 내용이 나오지도 않는다. '근처'의 주인공은  간암 말기 환자다.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돌아오는 그는 '20년' 전에 친구들과 묻었던 타임캡슐을 파낸다. 바로 이 '20년'이 이 작품의 집필 동기와 만나는 대목이다. 무려 20년이 지났고, 세월은 사람을 깎아 놓았고,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고독한 사내에게 사랑이라는 사치가 얼마나 적나라하게 다가오는지, 현실보다 더 리얼한 느낌이었다.  

나 많이 늙었지? 문득 얼굴을 숙인 순임이 물었다. 글쎄, 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나이 든 소녀를 위한 마땅한 표현이 나는 떠오르지 않았다. 늙었다, 와는 다른, 그러나 늙었다 근처의 그 어떤.

늙었다기보다는, 지친 느낌이었다. – 32쪽

줄바꿈은 이제 박민규 작가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지난 번 작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참 신선하다고 느꼈는데, 이번엔 거기에 작은 크기의 글씨가 따옴표를 대신하며 출연했다. 

 

두번째 단편 '누런 강 배 한 척'은 작고하신 작가의 아버지를 위해 씌어졌다. 한 번도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말을 드린 적이 없었던 작가는 이제 와 겨우 한 편의 소설이라니... 형사입건의 대상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특유의 너스레를 떤다. side A에는 아버지를 위한 단편이, side B에는 어머니를 위한 단편이 각각 하나씩 실렸는데 두 작품 모두 치매 노인이 등장한다. 실제로 작가의 어머님은 치매를 앓고 계시고 현재 요양원에 계시다고 한다. 다른 작품들도 다 좋았지만 이 두 작품은 더욱 두드러지게 현실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와서 참으로 먹먹했다.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자 시아버지에게 건강검진을 당부한 며느리는 이상 없고 백 살까지도 살겠더라는 의사의 소견에 반색을 한다. 오래오래 사셔야죠... 라고 말을 하는 며느리의 그 말이 누가 뭐래도 진심임을 작품 속 시아버지도, 독자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바쁘게 살아온 인생의 말년을 기다리고 있는 정년퇴임한 노인. 그에게 아마도 기대되어지는 수명 30년은 반가움이 아닌 막막함의 대상이었다.  

차차 대소변도 못 가릴 아내가 무거운 짐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아내에겐 그래서 감사한 심정이다. 젊었을 때의 잘못을 보상할 기회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더는 살고 싶지 않다.

더는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견디기 힘든 것은 고통이나 불편함이 아니다. 자식에게서 받는 소외감이나 배신감도 아니다. 이제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데,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며 삼십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소하고 뻔한, 괴롭고 슬픈 하루하루를 똑같은 속도로 더디게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인생을 알고 나면,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게 된다. 몰라서 고생을 견디고, 몰라서 사랑을 하고, 몰라서 자식에 연연하고, 몰라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걸까?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서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 실은 누구라도,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 65쪽

더 이상 아무 것도 궁금하지 않은 인생, 더 이상 알아갈 게 없는 인생이라니...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그의 고백이 배부른 투정으로 들리지 않는다. 머뭇거리지 않고 인생을 종료시키기로 결심한 그 여정 길을 독자는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심각한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작가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지레 짐작으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 뒷 이야기를 호기심으로 기다리시라. 

세번째 단편 '굿바이, 제플린'. 비행선을 발명한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을 위해 씌어진 것이란다. 비행선이야말로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수송수단이라고 작가는 굳게 믿고 있다.
뭔가 낭만을 갖게 하는 멋진 제목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던가. 대형마트 광고를 위해서 제작한 거대한 풍선 비행선이 그만 줄이 끊어져 하늘로 날아가버리고, 이벤트 회사의 직원들은 자동차로 풍선을 따라간다. 애가 끓은 사장은 전화기가 불이 나도록 연락을 하고, 그때마다 교회 목사님께 기도를 받으러 왔다고 하고, 다음 날은 새벽 기도를 간다고 했다. 그의 절박함을 웃음으로 받아들여서 미안하다만 그게 박민규식 유머를 대하는 독자의 예의이리라.   

''이란 작품은 SF의 대가 아서 C. 클라크를 위해 씌어졌다. 70년 간 글을 써왔다는 거장 앞에서 7년 간 글을 써 온 작가가 무릎을 꿇지 않을 도리란 없다는 생각엔 나 역시 동의한다. 서기 2387년 미래의 지구. 사상 최고의 지진이 해저에서 발생했고, 19251미터 깊이의 해구가 생겨났다. 그 심연까지 도달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 호기심을 넘어선 갈망을 무모했고, 그래서 위험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인간이지... 싶은 동의랄까. 

다섯 번째 작품 '끝까지 이럴래?'는 구글의 창시자 래리 페이지와 서지 브린에게 주기 위해 씌어졌다고 한다. 왜?라고 그들이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다는 작가의 당돌함은 짓궂으면서 대견하다. 지구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있는 오늘. 그러니까 내일이 남아 있는 유일한 오늘 아래층 사는 남자와 위층 사는 남자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대체 뭘 두고서 '끝까지 이럴래?'라고 말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지구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오늘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호기심은 멈출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캐릭터를 설명하는 작가의 문학점 솜씨를 보시라.  

바짝 쳐올린 뒤통수에는 크라이슬러 닷지가 차량충돌실험을 해도 좋을 만큼 두툼한 살덩이가 얹혀 있었다. 속 시원히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 애덤스는 활짝 방문까지 열어 보였다. 좁은 거실과 두 칸의 방... 어둑한 집 전체가 늙어가는 남자의 팬티 속처럼 시들하고 볼품없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할지라도, 타고난 유머 감각은 비켜가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오늘 뭘 해야 하나 잠깐 생각해 보았다. 어이 없게도, '위기의 주부들'을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시즌 4부터 보질 못했는데 무척 궁금했던 터여서 말이지... 

이어지는 단편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는 '선인장 포자'란 연작 소설의 일부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선인장 포자가 책으로 묶일 때 다시 한번 수록될 작품이기도 하다. 사무엘 베케트에게 주기 위해 씌어진 작품인지라 등장 인물의 이름은 '고'와 '도'다. 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도 등장한다. 아무 설명 없이 느닷없이 주어진 수상하고 위험한 상황. 요란스럽게 사이렌이 울리는 가운데 묵찌빠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서술에서 마구 웃었다. 이어지는 긴 고요함을 설명할 때는 '세계 묵찌빠 챔피언의 묵! 같은 정적'이라고 한다. 뿐인가.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이렇게 표현한다. '여기서 지낸 시간을 생각해봐. 아브라함의 기저귀를 갈다 왔는데 이젠 예수가 태어날 시간이야.' 누가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로 주욱 이어지는 성경의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면 이 문장의 우아한 유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읽는 것이 곧 작가의 4차원적 정신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이 들어서 한편으로 유쾌하고 한편으로 기이하기까지 했다.  

 

일곱 번째 작품은 '굿모닝 존웨인'.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영화 배우 존웨인 맞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를 위해 씌어진 것은 아니고 모든 '자부동'에 앉아 계신 분들을 위해 쓴 것이라 한다. 자부동이 무언가 찾아보니 방석이다. 지금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나는, 역시 해당 독자로구나.  

'축구도 잘해요'는 작가의 자전소설이다. 대체 왜 박민규는 문학을 하게 되었는지를, 그의 전생 마릴린 먼로와 그의 우주인 자식놈들 아르마딜로, 별들이 소근대는, 태권소년을 통해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유쾌, 상쾌, 통쾌가 마중을 나올 것이다.  

side A의 마지막 단편 '크로만, 운'은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 가난한 육체에 깃든 위대한 정신이라는 표현이 어쩐지 숙연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렇지만 작품은 '물리학'이라는 단어가 내게 주는 만큼의 두통을 얹어 주었다. 아, 난해해라.  

side B로 넘어가 보자. 첫번째 작품 '낮잠'은 작가의 어머니를 위해 씌어진 작품이며 허진호 감독에 의해 한 편의 연극으로 재탄생되기도 했단다. 몰래 혼자 공연장을 찾았다가 어둠 속에서 울고 나온 작가님을 생각하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의 어머니를 위한 작품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작품의 내용이 충분히 심금을 울렸다. '숲이라는 벼루를 다 갈아버린 듯 창밖은 오로지 묵(墨)하고 묵(默)하다.'라는 표현처럼 먹먹한 기분.  

'루디'는 버락 오바마 이후에 나타날 미합중국 대통령을 위해 씌어진 글이라 소개했다. 지구는 사실 사공이 많은 배가 아니라는 작가의 항변은 둘째 치더라도, 무척 느닷없는 전개였고 그래서 충격적인 결말의 글이었다. 대체로 블랙 코미디의 느낌이 많은 글들이지만 그 중에서 무척 '센' 느낌이랄까. 

 

이라는 글자를 네 개 포개어 놓은 제목을 가진 다음 작품은 '더블'에서 내가 가장 폭소를 날렸던 작품이다. 무협지를 좀 읽었다든지, 무협 영화를 좀 보았다든지, 하여간 그 세계의 '언어'가 낯설지 않은 독자라면 내가 빵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코미디로 받아들이면 다소 곤란하다. 눈물 빠지게 웃다가, 끝내 울음이 맺히게 되는 그런 글이랄까. 옮겨보면 이렇다.    

대형... 대의를 가져선 살 수 없는 세상이고, 대인은 어느 한 곳 설 자리가 없는 세상입니다. 대의가 없다니, 일국이 섰고 남아와 기개가 이리 들끓거늘 어찌 대의가 없을 수 있겠느냐? 아아... 한숨을 쉬며 천마가 말했다. 대의가 있다면... 서른 두 평 아파트입지요, 혹 기개를 품은 남아라면 쉰 평 정도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대형, 지금은

돈이 최곱니다 – 100쪽  

오로지 눈뿐인 세상이었다. 정치꾼이 된 동지도, 귀족노조가 된 후배도, 재벌의 뒤를 닦는 변호사 선배도, 고문후유증으로 여즉 노모가 대소변을 받아야 하는 친구도, 실은 독재가 그리웠던 이웃도, 잘살면 그만인 민족도, 여전히 건재한 친일 후손도, 그보다 더 건재한 발포 책임자도, 어쩌지 않고 어쩔 생각도 없는 대다수도, 실은 있지도 않았던 이념도, 있어도 소용없는 법도, 아빠도 2번 찍지그래? 하던 달도, 있지도 않았던 민주와 민중도, 그래서 모두가 이미테이션처럼 느껴지는 골짜기였다.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은... 무림은 실제로... 존재했던 겁니까? 쏟아지는 폭설을 바라보며 천마는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109쪽  

기천아! 하고 수저를 내려놓은 천수가 소릴 질렀다. 부르셨습니까? 뜨악하니 도제 하나가 방문을 연 것은 제법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였다. 들때밀 같은 표정으로 마당의 눈을 쓸던 바로 그 도제였다. 아까 내 전음을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어떤 전음 말이옵니까? 깻잎 말고 방앗잎을, 후추 말고 산초를 치라 일렀지 않았느냐. 머리를 긁적인 도제가 불콰해진 얼굴로 목소릴 울먹였다. 사부님... 그리 긴 전음을 도대체 언제쯤 들을 수 있다는 겁니까? 오년 수련에 오라 가라 간단한 전음도 들릴까 말까인데... 그리고 그런 말은요... 휴대폰으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예 어허, 고얀지고. 어느 안전이라고 네놈이... 내 오늘 세 분 무신께서 모이신다 그리도 일렀거늘! 울먹이던 도제가 결국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四룡께서 모이면 뭘요... 뭘... 정부라도 엎을 겁니까? 네 분이 힘 합치면 뭐... 삼성한테 이길 수 있습니까? – 112쪽 

무림을 주름잡았던 전설의 고수 네 명이 만났다. 대의가 무너진 세상이고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그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비행기보다 빠른 축지법을 쓰고, 하늘을 가르는 경공을 쓰고, 그렇게 바람마저도 제압하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건만, '삼성한테 이길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실컷 웃다가, 어느 순간 울어야 되는 걸까?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한국인>이란 직업을 가진 모두에게 주는 글이라는 작가의 설명이 가슴에 턱하니 와서 부딪힌다. 

이어지는 작품 '비치 보이스'는 '박주호'란 사람을 위해 쓴 글이라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다만, 초중고를 같이 졸업한 네 명의 친구들이, 무려 열 여섯 개 학원의 동창이기도 한 네 친구들이 동시입대를 앞두고서 찾아나선 해변가에서 벌어진 해프닝에 관한 내용이다. 그렇게 많은 수의 학원을 동시에 다니고, 22평 아파트에 살았던 그 아이들. 입대 직전 뭔가 해야겠다 싶어 고등학교 때의 원수같았던 선생을 찾아가서 패주기로 결심했는데, 막상 '취직 준비는 잘들 하고 있냐?'라는 질문 앞에 그만 힘이 쑥 빠져버린 아이들. 입대 전에 총각 딱지 떼겠다고 작정을 하고 계획을 짰지만 그 마저도 실패하는 아이들이었다. 

샤워를 할 때까지도 잔뜩 흥분해 있었는데, 글쎄 걔가 전에 사귀던 선배 얘길 하는 거야. 그래서 그 선배는 미국 국적을 가졌는데 군대 안 가도 된다더라, 라고 말이야. 제길 그 얘길 들으니 갑자기 자지가 죽지 뭐냐?

그 느낌을

알 것도 같았다. 어렸을 때 이웃 단지의 47평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단짝의 생일파티였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을 찾았다. 볼일을 잘 보고 물을 내리는데 아주 기분이 묘했다. 물, 소리가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우리집에선 콰, 하는 소음과 함께 맹렬한 소용돌이가 변기를 훑어내리는데 스와, 하는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잔잔히 맴을 돈 물이 변기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 느낌이 너무 묘해 나는 몇번이고 스와, 를 반복했다. 우와, 탄복을 하며 화장실을 나와서도 그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파티를 즐길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 125쪽

병역 문제만 나오면 한바탕 소란스러워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들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그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스와'하고 변기 물이 내려가는 집이 아닌 '콰'하는 소음에 익숙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법한 그 느낌.  

그래서, 작품을 읽는 동안 내내 따라다니는 한 가지 감정은 '연민'이었다. 그게 치매 걸린 노인이든, 학원과 학교만 반복해서 다니느라 바다가 처음이라고 말을 하는 서글픈 청춘이든, 서울 상공 위에 반경 10km 크기의 아스피린이 떠 있음에도 반복되는 직장 생활에 익숙해져야 하는 다음 작품의 주인공이든... 모두가 우리의 이야기였고 우리의 삶으로 다가왔다. 그 배경이 수백 년 뒤의 지구라 할지라도, 혹은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처럼 화성에서 차 세일즈를 하고 있는 상황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연민의 감정은 작가가 작품 속 인물들에게 투여하는 감정과도 통한다. 알퐁스 도데에게 바치는 작품 ''에서는 스테파네트 아가씨와는 극과 극의 여자가 등장하지만, 목동은 징역까지 살고 나와서 대리 운전으로 겨우 연명하는 청년으로 둔갑했지만   

누군가의 곁에 신이 없다면... 누군가의 곁에 인간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겠지. – 243쪽

라는 구절처럼, 기꺼이 신이 하지 못한 역할을 대신 해낼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인생의 막장에 몰려 아치 위에 올라가 자살을 하겠다고 예고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내려오는 순경도, 기원전 17,000년을 배경으로 하는 슬(膝)의 구석기인 우도 자신이 사냥해야 했던 코끼리를 향해 연민을 느꼈다. 

그렇게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또 연민을 받아 마땅한 인생살이의 모두에게 이 작품은 일종의 위로가 되지 않을까. 작가는 열정적으로 뜨거웠고, 쿨할만치 시원했고, 그리고 부지런했다. 제법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상복도 좀 있었고, 기대주란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듣는... 어찌 보면 행운아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그의 땀과 노력이 먼저 투신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한국 문단의 행운아이기도 하지만, 그런 작가의 독자로 살아가는 나는, 보다 행복한 행운아라 여긴다. 덕분에 참 많이 즐거웠고, 참 많이 위로 받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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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2-0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다 읽고 리뷰까지~~~~~~
난, 아직 손도 못댔어요.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요즘은 시간 내기가 어려웠어요.ㅜㅜ

마노아 2010-12-06 01:23   좋아요 0 | URL
첫번째 단편을 11월 초에 읽었는데 그후 못 읽다가 지난 주에 읽었어요. 읽을 책이 쌓였는데 할 일도 많고 그러네요.^^;;;

양철나무꾼 2010-12-06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민규에 대한 호오가 하도 엇갈려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님의 리뷰를 보니 '불끈~'인걸요.

전 두꺼운 책 잘 보는데, 연말이라서 그런가 두께가 좀 부답스럽기는 하지만요~^^

마노아 2010-12-06 02:13   좋아요 0 | URL
저는 박민규를 무척 좋아해요. 제 인생의 책 넘버5 안에는 '삼미 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꼭 들어가거든요.^^
두권 읽은 두께가 한 권으로 취급되는 게 살짝 불만이었는데 뭐 그쯤이야~ 했어요. 작품이 좋아서요.^^

비로그인 2010-12-0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마노아 2010-12-08 00:57   좋아요 0 | URL
우와.... 다음은 뭘까요? ^^

마녀고양이 2010-12-08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너무 오랜만이라, 일단 와락~ 안고 시작할까요?
그리고 생일 축하드려요!!

저는 사실 국내 작가 소설이 많이 망설여져요. 저랑 맞는 작가가 몇명 안 되거든요.
이 작품도 계속 망설이는데, 곡우님의 멋진 리뷰에 이어, 마노아님의 진짜 멋진 리뷰까지 접하니...
열심히 더 고민 중이고 조금씩 마음이 기울고 있어요. 읽어봐야겠어요.

마노아 2010-12-08 13:14   좋아요 0 | URL
우헤헷, 마녀고양이님 와락, 덥썩!!!
좀 전에 마고님 서재에 있다가 왔는데 여기서 다시 만나요.^^
축하 감사합니다. 우리 서로서로 축하 분위기에요~

전 이 책을 무척 재밌게 읽었어요. 어떤 작품은 너무 웃겨서 깔깔댔고, 어떤 작품은 너무 현실적이라 눈물이 날 것 같았고요. 이 작가를 앞으로도 쭈욱 좋아할 것 같아요.^^

같은하늘 2010-12-09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독특해서 눈길이 갔던 이 책~~~
역시...^^

마노아 2010-12-09 02:18   좋아요 0 | URL
독자는 편애모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