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몇 주 전에 쿠팡을 통해서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전 50% 할인 티켓을 구매했다.
그런 사이트가 있다는 걸 언니가 알려줘서 그날 알았는데, 원 어 데이 쇼핑몰이었던 것이다. 21일까지 소비해야 했던 티켓이어서 내친 김에 친한 언니와 함께 다녀왔다. 2시에 도슨트가 있어서 한 시 반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12시에 집을 나섰다. 남부 터미널 역에 도착한 것은 1시 12분이었는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습관적으로 예술의 전당으로 향하는 초록 버스에 올랐다. 거기서 두 정거장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곧 보자고 전화 통화도 했는데, 내가 탄 버스는 서초11번 마을버스였다. 아, 나의 삽질 투어가 시작된 것이다. ㅜ.ㅜ
보통의 초록색 지선 버스는 내가 예상했던 것처럼 두 정거장을 더 올라가서 예술의 전당 맞은편에 나를 내려놓았겠지만, 내가 탄 마을버스는 막 예술의 전당을 거쳐서 내려온 버스였다. 버스가 출발해서야 그 사실을 알았고, 어차피 마을버스 구간이야 그리 길지 않으니 한 바퀴 돌아서 예술의 전당으로 가려니 싶었다. 그런데 이 버스가 서초역과 강남역을 지나서 다시 왔던 구간을 되돌아온 것까진 좋았는데, 남부 터미널에서 예술의 전당으로 바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다시 서초역이던가, 암튼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를 더 돌아가는 노선인 게 아닌가. 버스에서 내렸다. 길을 건너서 한 정거장만 더 갈 생각으로 아무 버스를 탔는데, 이 버스는 직진을 하지 않고 P턴을 하는 게 아닌가. 오, 갓! 그래서 결국! 일찌감치 도착했던 나는, 추운 날에 종종 걸음으로 뛰어서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때마침 2시가 되자 민방위 훈련 사이렌이 울렸고, 혹여라도 길까지 통제할까 봐 와장창 달려야 했다. 다행히 2시 3분에 예술의 전당 골인. 이 무슨 삽질 대마왕인가. 사진전 보기도 전에 이미 탈진. 터얼썩!
도슨트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못 본 사진을 건너 뛰고 옆의 방으로 갔건만, 그 시간대 도슨트를 맡은 분은 설명이 좀... 별로였다. 아마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지 많이 버벅거리는... 결국 우리는 시작 지점으로 가서 우리끼리 차분히 감상하기로 했다. 아, 이 사진전! 오기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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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구성은 4단계이다. 초반엔 풍경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의 축제인가요?'라고 묻는, 신의 작품이 아니고는 이런 것이 나올 수 없다고 감탄을 내뱉게 만드는 사진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게다가 해상도는 어찌나 훌륭한지, 이런 사진을 찍은 카메라는 집 한 채 값은 우습게 뛰어넘을 것 같았다. 낙마 사고라도 나면 몸이 부러질지언정 카메라부터 살려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만큼.
위의 사진은 영국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주 헤브리디스 제도 중심부의 스카이 섬에 위치한 구릉 지대다. 얼마나 맑으면 구름까지 저리 비칠까. 저런 풍경에 인간이 서 있으면 그게 곧 옥의 티가 될 것만 같다.
핀란드 오울랑카 국립공원의 가문비나무. 신비로움 그 자체다. 요정들이 날아다닐 것만 같고 마법사가 나무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나무도 눈도 별빛도 모두 곱기만 하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데스밸리 국립공원의 '레이스트랙' 지역이란다. 바위들이 움직이는데 최고 320kg까지 움직인다고 한다. 하지만 왜 저 돌들이 움직이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경이롭고 신기하다.
남아메리카의 알티플라노 고원의 플라밍고 떼. 마치 종이학을 모래 위에 꽂아놓은 느낌이다. 하나하나의 음표가 되어 반주에 맞춰 춤이라도 출 것만 같다. 세상에나...
남아메리카 알티플라노 고원의 살라르데우유니 소금평원이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빛일까.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태고적 신비로움처럼 보인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화이트 산맥의 가시삿갓소나무 고목이다. 무려 4천 년이나 살 수 있는 나무라고 하는데, 저 결을 보고 있자니 거의 용으로 승화하기 전의 이무기로 보인다.
사진이 좀 안 나오긴 했는데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음알마 염호다. 저 뜨거운 사막 안에 저리 맑고 깊어보이는 호수라니, 놀랍고 놀랍기만 하다.
중국 쓰촨성 고원 지대의 주자이거우 자연보고구역의 우화하이 호다.
어릴 적에 애청하던 밥 로스의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와호장룡을 찍었다고 해도 믿겠다.
두번째 전시 공간의 주제는 '이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드라마인가요?'다. 그야말로 야생의 속살을 파헤쳐 보는 느낌이랄까.
첫번째 전시실에서 너무 큰 감동을 보았고, 워낙 생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이번 전시관 사진은 무섭거나 징그럽게 느끼는 부분이 꽤 많았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는 귀여움은 이런 것!
클라운피시 한 마리의 저 땡그런 표정. 아, 니모라도 찾아줘야 할 것 같다.
세번째 전시관으로 가면 '우리 아이들은 더 이상 볼 수 없을 거예요!'다.
우리의 조상들은 보아왔지만 우리는 보지 못한, 혹은 우리는 겨우 보았지만 우리의 후손들은 보지 못할 기막힐 풍경들.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자연 환경들이 먹먹하게 펼쳐진다.
미국 유타 주 클리어크리크 강변의 협곡이다. 사진 상으론 아름답고 장엄하건만, 이 사진은 지속적인 가뭄의 끔찍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은 붉은 암벽의 흰 선까지 물이 차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전시 주제, '이 절망의 카운트다운을 멈출 수는 없을까요?'다. 짐작하겠지만 환경 파괴의 현주소다. 입이 딱 벌어지게끔 만들었던 환상적인 사진들이 이제는 묵직해진 가슴을 안고 숙연하게 봐야 하는, 혹은 함께 분개해야 하는 사진들로 변해버렸다.
미국 네바다 주 모하비 사막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오아시스가 아니다. 바로 골프장이다. 사막 식물만 겨우 버틸 수 있는 이곳 사막을 더 척박하게 만들고 있는 주범이다. 분노의 떨림으로 사진이 흔들렸다...;;;;;
탄자니아 마툼부루 마을에서 십대 소녀가 줄에 의지해 우물에서 흙탕물을 퍼 담고 있다. 무려 10시간이나 기다린 후에 얻은 차례였다. 다음 사람이 퍼갈 물이 우물 안에 고이려면 다시 1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물을 퍼가기 위해서 걸어야 했던 긴 여정, 그 길에서 당하는 폭력, 그리고 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교육의 기회. 그렇게까지 해서 얻은 물은 깨끗하지도 않고... 우리가 연대해야만 하는 무수한 이유를 사진 한 장에서도 이미 확인할 수 있었다.
아픈 다리를 두드리며 전시관을 나오니 어쩐지 다리만큼이나 눈도 뻑뻑하다. 이런 사진을 찍어주는 작가님들께 고마움을 느끼고, 이런 사진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났다는 것에도 감사했다.
바깥 복도의 벽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가 전시되어 있다. 알법한, 유명한 사진들이 많다.
(사진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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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퓰리처상 사진전에서 도록을 사지 않아 또 다시 도록 찾아 삽질 구만 리를 했던 경험을 되살려, 이번엔 두말 않고 도록부터 구입했다. 215장의 사진이 담긴 도록은 25,000원이다. 몇몇 사진만 추려낸 도록으로 6천원 짜리도 있다. 지방 전시도 예정되어 있으므로 도록은 인터넷으로 판매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현장에서 다 소비될 것 같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사진을 펼쳐 보는데 확실히 현장의 느낌만큼의 감동은 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전시관의 사진들은 모두 표면에 크리스털 코팅이 되어 있어서 눈부실만큼 선명했다. 가능하다면 가급적 직접 전시관으로 가서 사진들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퓰리쳐상 사진전과는 또 다른 감동과 먹먹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