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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왕 이야기 2
임용한 지음 / 혜안 / 1999년 11월
평점 :
조선 국왕 이야기 1.2편을 사두고 오래 묵혀 두었는데이번에 필요하게 되어서 2권을 먼저 읽었다. 성종부터 인종까지 네 임금을 다루고 있는데 인종은 워낙 치세가 짧아서 거의 세 임금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전체 분량이 370여 쪽인데 무척 자세하게 기술한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몹시' 다르다는 거였다. 가장 인기있는 역사 저술가로는 이덕일씨가 먼저 떠오르는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좀 더 건조해지고, 남경태의 '종횡무진 한국사'를 읽으면 좀 시니컬한 느낌이 드는데, 그 중에서 이 책 '조선 국왕 이야기'가 가장 파격적으로 비판적이다. 이 책의 출간은 99년임에도.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혹은 정리되어 있던 조선사가 다시 재편집되는 기분이었다. 꽤 당황스러웠고 적응이 힘들었다. 차이가 벌어지는 까닭은 사료를 어떻게 취하는 가의 자세 때문일 것이다. 실록에 적혀 있는 것만 통으로 믿을 것인가, 야사의 기록을 많이 받아들일 것인가, 기타 다른 저작물들을 얼마만큼 반영하는가 등등. 모두들 여러 사료들을 걸러내고 받아들이는 작업을 했겠지만 유독 이 책은 많이 걷어내고 새롭게 해석했다.
모범군주로 유명했던 성종이 그 모범생 콤플렉스로 인해 치세 말년에는 짜증 덩어리로 변해가는 과정이 설득력 있었다. 물론 이것은 저자의 주장뿐 아니라 실록의 기록으로도 뒷받침 된다. 창업의 시기가 지나고 수성의 시기가 되자 조선 사회는 극도로 경직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난무하는 조정. 창경궁 통명전 앞의 샘물은 그 웃지 못할 증거다.
샘물이 넘쳐서 배수로 공사가 필요했는데 나무로 하자니 썩고 돌로 하자니 공사가 커져서 동파이프로 교체했다. 신하들이 벌떼처럼 덤벼들었다. 사치스럽다고. 후대 왕이 보고 배울까봐 걱정스럽다고. 결국 며칠을 못 버텨서 성종은 동파이프를 걷어내고 돌로 다시 공사를 메꿨다. 그 덕분에 담장 하나와 난간 하나를 헐어야 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성종은 신하들 앞에서 관을 다 깨부수었다. 성종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모범군주의 이미지를 벗겨내는 좀 더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여줬을 것도 같다.
이런 성종의 억눌린 제왕 시절, 그러나 포기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화려하고 부유한 군왕 시절은 그대로 연산군에게 반영된다. 세자 시절부터 줄곧 보아온 답답한 아버지의 모습, 무례하고 짜증나는 신하들의 행태. 연산군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신하들 위에 제대로 군림하는 임금을 꿈꾸는 건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으로 갑자기 광기를 일으켜 폭군으로 변신한 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동의한다. 연산군은 나름 차분하게 시간을 두고 계산을 해서 권력을 틀어쥐었다.확실히 그는 폭군스런 면모를 보였고 무엇보다도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폭정에 시달린 사람은 일반 백성이기보다 그동안 기득권을 쥔 채 안하무인이었던 양반 관료들이었다. 뜻밖에도 연산군은 이복동생 진성대군(훗날의 중종)을 핍박한 사례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무관심했달까. 연산군의 실책을 부풀리고 과장하기에 혈안이 된 실록의 기록자들도 인정한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라는 책에서 파악한 연산군의 심리 분석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 책의 저자가 이 책을 참고했을지도...^^
가장 쇼킹했던 것이 중종이었다. 중종에 대한 생각은 형님 연산군을 반면교사 삼아 조심조심 정치를 했고, 반정 세력에 휘둘려 왕권을 키우기 위해 조광조를 등용했던, 분주하게 많이 움직였지만 제자리 걸음으로 해놓은 게 아무 것도 없는... 뭐 그런 흐리멍텅 우유부단한 이미지가 가득이었는데 저자는 그게 속임수라고 말을 한다. 우유부단하게 행세했던 것도, 모든 책임을 대신들에게 미뤘던 것도 모두 극도의 계산된 정치적 테크닉이라는 것. 물론, 판단의 근거들을 제시한다. 읽다 보니 소름 끼쳤다. 그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그는 당대인은 물론 후대인들까지 몇 백년이나 걸쳐서 속여온 것이 된다. 굉장히 드라마틱하기도 하지만 결코 드라마는 아닌 사실들. 저자의 분석들은 모두 설득력 있었다.
이쯤 되니 몰입의 속도가 빨라진다. 사진도 그리 많지 않고 폰트도 오래된 책이라 촌스럽고, 여러모로 디자인은 참 후졌는데 책의 내용이 주는 지적 만족감이 압도적이었다. 더불어 매 순간 느끼게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찔하기까지 했다.
책을 덮으면서 의아했다. 이 책이 99년도에 출간되었고, 인종 이후에도 조선의 임금은 열 다섯이나 더 남았는데 왜 후속권은 아니 나온 것일까? 혹시 이 책 내고서 파장이 너무 커서 욕을 먹었나? 그런 걸로 붓을 꺾을 것 같진 않아 보이지만 아무튼 수상하고 걱정스럽다. 뒷 내용이 너무 궁금하다. 그의 비판적 시각에 비쳐진 선조와 광해군, 숙종, 영조, 정조, 고종 등등... 보고 싶은 인물이 너무 많은데 말이다.
동 저자의 '전쟁과 역사'를 구입해 두길 잘했다. 일단 다른 책으로라도 갈증을 좀 달래야겠다. 저자님은 반성(!)하시고 꼭 후속 편 빠른 시일 내에 써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