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쓰다가 중단된 지 한 달이 더 지나버렸다. 짐 속에 수첩이 파묻혀 어디 있는지 찾지를 못해서 쓸수가 없었다.
그 사이 기억들은 산화되어 버리고...;;;; 

그래도 가물가물한 기억을 찾아서 좀 더 써보자. 

1월 28일 새벽.  

또 다시 아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물론 그 전에도 몇 차례나 전기장판이 뜨거워서 깼다 잠들기를 반복했지만. 

7시부터 9시까지는 움직이지 않은 채 조용한 시간을 즐겼다. pmp에 담아간 소설을 읽고 아침밥은 볶음밥 간택! 

친구는 시험 감독을 하러 학교로 갔고 나는 집에 남아 설거지를 한 뒤 이메일을 확인했다. 알라딘을 구경하는 대신 쾌도 홍길동을 두 편 감상하고 마르기르기스로 가기 위해 집을 홀로 나서는데 지하철 표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서 지하철 표를 하나 사기로 결심했는데 잔돈도 없는 게 아닌가. 갖고 있는 지폐는 단위가 너무 커서 괜히 말을 섞어야 할지도 모르게 생겼다. 말 섞는 게 문제가 아니라 섞을 말을 모르니 문제. 그래서 친구가 쓰지 말고 간직하라고 준 반짝 반짝 빛나는 1파운드 동전을 내밀고 표를 구입했다.  그러나 못 찾던 표는 개찰구를 통과하자마자 가방 속에서 나오고 말았다. 이럴수가!

계단을 올라가서 바로 왼쪽편으로 오는 지하철을 타라고 했는데 반대편만 계속 열차가 오고 내가 기다리는 쪽은 아니 오는 게 아닌가. 아아, 시간은 흘러가고 이를 어쩐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시 한 번 방향을 확인했다. 올라가자마자 왼쪽이 맞니? 친구가 맞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서도 여전히 오지 않는 지하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말하는 '왼쪽'과 친구가 말하는 '왼쪽'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올라가는 방향 바라보고서 왼쪽을 말했는데, 친구는 목적지 방향으로 180도 틀어서 왼쪽을 말한 듯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왼쪽은 정반대! 

결국 지하철 역을 서성이고 있는 경찰관에게 묻기로 했다. 어설픈 영어로 가고 싶은 곳을 말하고 친구가 생각한 방향의 '왼쪽'을 가리키며 '헤나?'하고 물으니 맞다고 한다. '헤나'는 '여기'란 뜻. '쇼크란(땡큐)'으로 답하고 지하철 탑승. 

아랍어라곤 두 단어 밖에 아니 나온거지만 나 혼자 현지인과 대화를 했다고 막 우쭐해지려는데, 이집트 아가씨가 자리를 양보한다. 앗, 곧 내리는데, 그래도 쇼크란~ 

기분이 좋아서 너무 흥분했나. 하마터면 역을 놓칠 뻔 했다. 부랴부랴 내려서 친구를 만났는데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이곳은 오후 4시면 거의 모든 관광지가 문을 닫는다. 관공서는 오후 1시나 2시면 문을 닫고. 설마 공무원들은 점심 먹고 퇴근하는 걸까??? 

일단 시간이 허락되는 만큼만 구경하기로 하고 인근을 돌았다. 애석하게도 내 카메라는 아예 작동을 안 했다. 이제부터 모든 사진은 다 친구 카메라로 찍은 것들이다.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수도사들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오래된 것도 있지만 꽤 최근의 무덤들도 있었다.
빽빽히 자리하고 있어서 좀 갑갑한 느낌이 들었던 곳. 



여기는 콥트 교회. 내부 양식이 성당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콥트 교회만 그런 게 아니라 친구가 다니는 한인 교회도 그랬다.전반적인 분위기가 이런 듯.  

오래된 교회였는데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평일에도 많은 이들이 드나들며 기도를 드렸다.   



섭섭해하시는 다락방님을 위해서 사진 한 컷 추가! 콥틱 교회를 나서면서 친구와 한 장씩 사진을 찍었다. 들고 있는 파카. 정말 더웠다..ㅜ.ㅜ



마기 역으로 장을 보기 위해 가는 길, 지하철 내부를 찍어보았다. 다양한 히잡이 예뻐보여서. 사진 찍는 게 실례일까 물었더니 친구는 괜찮다고 했다. 저들도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들도 동양인인 우리를 아주 신기하게 쳐다보니 쌤쌤이다. 그런데 사진이 흔들렸다ㅠ.ㅠ 히잡이 억압의 상징인 곳도 있지만 이집트에서의 히잡은 패션 아이콘이라고 한다. 확실히 히잡의 색깔과 디자인과 질감이 무척 다양했다. 뿐아니라 옷차림도 신발도. 전반적인 유행은 플랫 슈즈였지만 간혹 높은 힐을 신은 여자들도 있었다. 참, 콥트 교도들은 히잡을 쓰지 않는다. ㅎㅎ 



더운 지방이라서 그런지 과일이 무척 싸다. 채소도 엄청 싸고. 여름엔 더 환상이라고 하지만 겨울이라 이 정도다. 내가 먹어본 과일들은 대체로 별로였는데 친구는 여름에 먹고 반해버린 과일들을 일제히 칭송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그렇게 과일매니아인 줄 몰랐다.ㅎㅎㅎ 



유제품도 싸다. 우리나라에선 꽤 비쌀 법한 치즈도 여기선 아주 저렴하게 이용 가능했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맛으로.  

우유도 농도별로 팔았는데, 그래서 잘못 고르면 아주 흐리멍텅한 우유를 고를 수도 있다. 주의 요망! 



지하철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광고들. 요건 세제 광고다. 친구는 삼성 광고를 지하철 열차로 보았다는데 내가 있는 동안에는 못 마주쳤다. 다만 카이로 국제 공항 가는 도로 변에서 길을 가득 메운 광고는 꽤 여러 번 봤다. 생각해 보니 현지인이 삼성 짱이라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 적도 있었다. 이것 참 기쁘기도 하면서 씁쓸하기도 한 복잡한 기분... 

이날의 일정은 여행객답지 못했지만, 숙제를 해치우는 기분으로 보드카를 부탁했던 집사님 댁을 방문했다. 원래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사주신다고 했건만 집으로 부르니 조금 난감. 결국 이 집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한국식으로 먹는 것이야 기쁘지만 바깥 집사님은 그야말로 가부장적인 인물인지라 멀리서 온 생판 남인 내가 접시 나를 때도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신 게 조금 꼴불견..ㅎㅎㅎ 

커피를 마시면서 안주인 집사님의 이야기를 재밌게 들었다. 이분은 현지 가이드로 17년을 근무하신 분이다.
여러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여행 팁을 들었다.  

다시 마기 역으로 돌아가서 또 다른 집사님께 물김치를 얻어서 귀가.  

낮에는 너무 두껍게 입고 나가서 더워서 혼이 났고, 그래서 집에 들렀을 때 가볍게 바꿔 입었다가 밤중에 추워서 혼이 났다. 이래저래 여기선 날씨 비위 맞추는 게 제일 힘들었다. 

이날은 알제리와 이집트의 축구 시합이 있었는데 이집트 승! 

승리의 기쁨으로 밤새 어찌나 시끄럽던지 잠을 잘수가 없었다. 여긴 이슬람 국가라 술도 마시지 않는데 그들의 광기와 흥분은 상상을 초월한다. 여기에 술까지 들어가면 지구를 날려버리는 게 아닐까. 축구 시합이 있는 날에는 영사관에서 이메일로 연락이 온다고 한단다. 바깥 외출 자제하라고..ㅋㅋㅋ 

목요일이 그렇게 저물고 다음 날은 이곳의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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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4-18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재밌는데요.^^
과일은 중세시대의 어느 과일가게같은 느낌! 저 검붉은 것은 사과지요! 그렇죠?
그리고 전철 광고판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외계어인데...ㅋㅋㅋ

응, 마노님의 여행기는 내게 도움이 되요. 더 남았다면 계속 올려주세요 ^^
뭐랄까, 이로써 대리만족도 하고 있는 셈이니까요.(웃음)

마노아 2010-04-18 21:54   좋아요 0 | URL
헤헷, 독자가 있다니 기뻐요.^^ㅎㅎㅎ
검붉은 사자. 백설공주의 새엄마가 떠올라요.
아랍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대요. 근데 숫자는 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나.
그래서 버스 표지판 같은 경우 엄청 헷갈린다고 했어요.
아라비아 숫자로 써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더라구요. ㅡ,.ㅡ;;;

다락방 2010-04-18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바깥집사님..나도 꼴불견 2 ㅋㅋ

저 광고 보니 눈이 어지러워요. 대체 뭔말임. 저 글자 어디서 세제가 되는걸까 싶고 말이지요. 아 이 신비로운 외국어의 세계~ 친구 사진기라 그런지 오늘 사진에서는 마노아님이 안보이네요. 보고싶은데 ㅠㅠ

마노아 2010-04-18 21:55   좋아요 0 | URL
한글은 너무 심플하단 생각을 했어요. ㅋㅋㅋ
다락방님을 위해서 제 사진 급히 하나 추가했어요.
멀리서 찍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저날은 사진이 저 정도 뿐이었답니다.^^

다락방 2010-04-18 22:32   좋아요 0 | URL
아! 난 정말 마노아님이 무척 좋아요. 보고싶다고 말했더니 사진을 올려주는 센스라니! 눈에서 하트가 튀어나와요, 마노아님. ♡.♡

마노아 2010-04-19 20:48   좋아요 0 | URL
하트 뿅뿅! 이모티콘으로 바로 재현해주는 감각쟁이 다락방님!
우리 곧 직접 눈에서 빔 쏘며 만나자구요.ㅎㅎㅎ

무스탕 2010-04-18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하철 폭이 좁아보여요. 아닌가..? -_-a
마노아님 사진은 실내같은 분위기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렇지 않은가봐요. 옆에 담이 낮아요.
세제 이름이 '옥시' 하니 우리나라 세제가 생각나네요. ㅎㅎㅎ

자, 언능 다음을 내 놓으세요! :)

마노아 2010-04-19 20:49   좋아요 0 | URL
음, 좀 좁았던 기억이 나요. 저긴 여성 전용칸이어서 여자와 아이들만 타고 있어요.
체격이 꽤 큰 편인데도 의자는 그렇게 넓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저도 --크린 생각했습니다.
다음 편도 어여 분발할게요.^^ㅎㅎㅎ

순오기 2010-04-1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얼마나 기다렸던 이집트 여행기인가? 2년 전 일본여행기도 이틀째 쓰다 만 주제에~ ㅜㅜ
이집트 무덤도 비석이 제각각이라 더 복잡해 보이네요.
교회는 성당스럽고, 과일은 풍성하다니 부럽고, 유제품...그것도 좀 부럽네요.^^
이집트어는 제대로 된 외계어일 뿐이지만 옥시는 보이는군요.ㅋㅋ
마노아님 원거리 사진도 좋아요, 여행기는 역시 다녀왔다고 증거를 댈 사진이 필수예요.^^

마노아 2010-04-19 20:52   좋아요 0 | URL
우리의 아름다운 한글도 외국인이 보면 저렇게 외계어로 보일까요?
그렇지만 아랍어는 심하게 외계스러워요.ㅋㅋㅋ
여행의 꽃은 사진이건만 여행 이틀 째에 장렬히 사망한 제 카메라를 어쩜 좋아요.
친구 것도 망가질까 봐 엄청 조심했어요.^^ㅎㅎㅎ

후애(厚愛) 2010-04-19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집트 여행 오래 기다렸는데 이제야 올리시다니.. 미워요~ ㅋㅋㅋ
과일이 정말 많네요. 거의 제가 좋아하는 과일들만 가득입니다.^^

마노아 2010-04-19 20:53   좋아요 0 | URL
헤헷,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수첩 없이 쓰자니 놓치는 게 너무 많을 것 같아서요.^^;;;
과일의 천국이에요, 저곳은요~

프레이야 2010-04-19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마노아님의 이집트여행기닷~ 와!
옥시랑 옷그림이 세제광고인 것 같다싶었어요.ㅎㅎ
흐리멍텅한 우유요?ㅋ

마노아 2010-04-19 20:53   좋아요 0 | URL
하핫, 흐리멍텅한 우유.ㅋㅋㅋ
치즈는 찐했는데 우유는 잘못 골라서 니맛도 내맛도 아닌 우유를 한 번 먹었어요.^^;;;

카스피 2010-04-19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콥트 교인들은 참으로 대단한것 같아요.이슬람교가 국가인 나라에서 기독교로 사는 것이 무척 힘들었을 텐데요.한편으로 예전 이슬람교의 관용주의도 대단하지요.지금은 아니지만 예전 전성기의 이슬람교에서는 세금만 잘내면 기독교나 유대교나 모두 믿게 놔두었다고 하더군요^^

마노아 2010-04-19 20:54   좋아요 0 | URL
참 당당해 보이고 멋졌어요. 친구 학교의 콥트교 학생들 얘기를 듣자면 비범한 아이들이 참 많더라구요. 꽤 폐쇄적으로 보이는 곳이지만 은근 개방적인 것도 있어 보이는 재밌는 사회예요. ^^

같은하늘 2010-04-20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정말 기다리던 이집트 여행기야요~~~^^
이리 재미난걸 이제사 다시 올리시다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죄로 재미난 이야기와 사진들 많이 올려주셔야해요. 그나저나 아랍어는 정말 외계어 맞아요. 저게 도대체 글씨야 그림이야~~

마노아 2010-04-20 08:17   좋아요 0 | URL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호홋, 기다리게 한 죄로 정말 부지런을 떨어야겠습니다.
세계의 언어를 쫙 나열해서 누가 가장 외계어같을지 투표해보고 싶어요.^^ㅎㅎㅎ

BRINY 2010-04-20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집트 여행기~~~
저 동네는 과일 때깔이 참 곱군요.
외국 마트 구경 재밌는데... 결론은, 가고 싶어요!!!

마노아 2010-04-20 11:07   좋아요 0 | URL
과일 사진이 인기가 좋네요.^^
상해에서는 한인마트에서 계속 비의 노래가 나와서 좋았고,
여기서는 미카의 노래가 계속 나와서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