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아한 거짓말 ㅣ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저렇게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일을 준비하던 아이가, 오늘 죽었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천지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남편과 사별한 엄마가 마트 일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키우는 두 딸중 동생. 뭐든 무덤덤하고 무뚝뚝한 언니 만지와 달리 떼쓰는 일 없이 착하기만 하고 뜨게질을 즐겨하고 리폼도 잘하던 아이 천지. 갑자기 딸과 동생을 잃은 엄마와 언니는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아무 조짐도 눈치 채지 못했기에.
그러나 천지의 흔적을 되짚어가면서, 그리고 지나온 시간들을 되밟아가면서, 천지를 힘들게 한 시간들을 파악하게 된다. 한 마디로 왕따 문제였다. 조직적으로 천지를 물먹이고 엿먹이면서 절친인 척 했던 화연이, 그꼴을 보고 또 알면서도 모른척 방관했던 아이들, 혹은 멍청하게 당한다고 비웃었던 아이들.
발 빠른 화연이의 사과. 화연이의 말이 거짓으로 밝혀져도 상처는 내가 받았습니다. 거짓 소문은 살을 보태가면서 빠르게 퍼졌습니다. 하지만 정정된 진실은 더디게 퍼지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사라져버렸습니다. – 21쪽
읽는 내내 참 먹먹했다. 이 아이가 지나온 시간들이 계속해서 교차해서 지나가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막막하고, 얼마나 서러웠을까 가엾고, 이제 돌이킬 수도 없는데 남겨진 가족과, 또 떠난 그 아이를 대체 어찌해야하나 싶어 아프기만 했다. 누구라도 짐작할 만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던 게 아니라, 보이지 않게 조금씩 목이 졸려온 아이. 숨 쉴 구멍 하나 없이 계속해서 헐떡이던 아이. 아이를 둘러싼 주변인들은 그렇게 조금씩 저도 모르는 채,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기막힐 노릇이다.
작가 분이 캐릭터 설정을 굉장히 잘한 듯 보인다. 억척스러움을 가장한 꿋꿋하고 당당한 엄마, 무뚝뚝하지만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만지, 엄마 잃고 망나니 아빠를 견뎌내며 열심히 살아가는 미란 미라 자매, 그리고 옆집 오대오 가르마 추상박까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항변하듯, 보이는 것과 달리 다른 속내를 품고 살아가는 저마다 아픈 사연들의 캐릭터들이 입체감 있게 묘사되어서 무척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심지어 초짜 선생님의 '통과의례'는 너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서 살벌할 정도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천지는 멍청한 게 아니라 착한 거야. 착한 애는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꼭 가지고 놀려는 것들이 생겨서 문제지. 자기 맘에 들면 착한 거고, 안 들면 멍청한 건가? – 195쪽
반면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설득력 있는 대사까지는 좋은데, 그 대사와 대사를 연결해주는 지문이 자연스럽지 않거나 혹은 부재할 때가 많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잘 치고 나갔는데, 마무리를 덜하거나 바로 생략해버린 느낌이랄까.
그래서 털실 속에 숨겨진 천지의 메시지 찾기나 천지 엄마가 화연 엄마에게 한방을 날리고 난 뒤가 개운치 않다. 화연의 방황과 만지의 쿨하고 멋진 마무리도 그래서 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 모든 아쉬움들은 천지를 향한 어떤 미안함과 안타까움에는 결코 미칠 수가 없다. 각각의 캐릭터들에는 내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어떤 면들을 투영하고 있었고, 또 내 기억의 어떤 부분과 많이 닮아 있었다. 결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곱게 포장할 수 없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금세 불편해지고 마는 그런 기억의 조각들이 책을 읽는 내내 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작가님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면서 다시 아파진다. 이 소설, 꼭 읽어보라고 권장하고 싶은데, 더불어 많이 아프다고 주의도 주고 싶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듣고 살았던, 혹은 하고 살았던 우아한 거짓말들이 지금 어디를 떠돌며 누군가의 가슴에 박혀 있는지도 생각해야 할 차례다. 문득, 섬뜩함이 스친다.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사과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놓고 장난치는 거예요. 나는 사과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 – 210쪽
그나저나 완득이로 홈런을 쳤던 김려령 작가, 이제 롱런을 칠 차례인가보다. 완득이보다 훨씬, 훨씬 더 좋다. 아프긴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