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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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피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고통을 피하려고 스스로 죽기도 한다. 해피에게는 아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겠다고 마음먹게 된 건, 희망을 찾은 게 아니라 희망을 버렸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만은 남편과도 공유할 수 없었다. 희망이라기보다는 살아가야만 하는 최소한의 근거를 찾은 건 그로부터 사 개월 뒤의 일이었다. -27쪽

입안으로 들어온 바닷물은 짜고도 압도적이었다. 순식간에 고통이 그녀의 몸으로 밀려들었다. 언제라도 그녀를 매혹시켰던 고통이었건만 맛보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기에 그토록 끌렸던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59쪽

맞다. 나는 연필이었고, 그래서 흑심을 품고 있었다. 혹시 그 시를 매개로 누군가를, 아마도 내 땅의 말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무명씨라도 만나지 않을까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 무명씨는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커다란 눈 옆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처음 보는 순간 미스 마플이라고 부르면 딱이라는 느낌이 드는 할머니로 밝혀졌다. -75쪽

요즘 들어서, 살아오는 동안 안 하고 넘어간 일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청년은 아직 이게 무슨 기분일지 모를 거야. 한 일들은, 그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안 한 일들은 해봤자였다고 생각하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왜, 하지도 않은 일이 잊히지 않는다니까 우스워요? 그러게.-79쪽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 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 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81쪽

어느 날, 잠에서 깨어봤더니 아빠가 내 시안을 다 보고 나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광고주처럼 느껴진다면 회사를 그만둬야만 할까, 아빠와 절연해야만 할까? 아무튼 그 아침에 나는 무척 슬펐다. 서른번째 생일을 그런 식으로 시작했다는 사실보다도 아침부터 생일이라는 걸 스스로 발설했으니 이제 내 인생에 멋진 남자와 근사한 저녁을 먹다가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서른번째 생일이었는데'라고 중얼거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서러워서.-95쪽

그 시절에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우린 세상 모든 사람인 양 행동할 수 있었다. 언젠가 종현이 말한 것처럼 우린 하루 스물네 시간을 1440개의 아름다운 일 분들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입학선물로 받은 캐논 디지털 카메라를 늘 들고 다니던 종현에게 그 일 분이란 숨겨진 빛을 찾아내는 60초에서 세계를 가장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1000분의 1초 사이를 오가는, 우주만큼이나 광활한 시간이었다. -98쪽

"그건 그 남자의 말이 맞아, 누나.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우연이야. 시골이라면 자연이겠지만, 도시에서는 우연이야."-104쪽

그 다음에는 종현이 얘기했다. 택시를 운전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여겼는지,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어떻게 자신을 위로했는지, 또 옆좌석이나 뒷좌석에 앉아 있는 동안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지, 어떤 경우에도 앞만 바라보면서 그저 냄새만으로 그 사람들이 먹은 식사와 그 사람들의 경제적인 상황과 그 사람들의 직업을 짐작하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에 본 그 불길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얼마나 참혹했는지, 또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 -114쪽

오타루에서 2박 3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는 원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바라봤다. 2월의 눈은 무척이나 가벼워, 내리다가는 다시 하늘로 솟구쳤고 나뭇가지에 쌓였다가도 바람에 날렸다. 그런 눈이 내리는 동안, 낮은 더욱 낮답게 환했고 밤은 더욱 밤답게 어두웠다. 거기 오타루에서 내리던 눈은 이미 내린 눈 위에 착하게 쌓여만 갔으므로 이제쯤 돌이켜보면 오타루의 겨울은 단 한 톨의 눈송이도 버리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123쪽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 그때 나는 용서라는 말을 떠올렸다. 먼 훗날의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지금의 내가 용서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경우는 어떨까? 먼 훗날의 나라면 지금의 나를 용서할 것인가?-124쪽

엄마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와 고통을 함께한 것은 주기적으로 엄마의 몸속으로 들어가던 진통제뿐이었다. 고통 앞에서는 평생 가졌던 신앙마저도 진통제가 먼저 몸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엄마 덕분에 삶과 죽음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177쪽

알래스카 코르도바에 마리 스미스라는 에야크 인디언이 살아. 이 지구상에서 에야크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인간이야. 사람들이 그 소감을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대. '그게 왜 나인지, 그리고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나는 몰라요. 분명한 건 마음이 아프다는 거죠. 정말 마음이 아파요.' 듣는 사람이 없으면 말하는 사람도 없어. 세계는 침묵이야. 암흑이고.-249쪽

안구를 적출한 뒤에는 전에 한번 가본 곳일수록 다시 가지 않으려는 성향이 생기는데, 그건 혹시라도 제 기억과 다른 부분을 발견할까 두려워서죠. 그건 아마도 성장을 두려워하는 일과 비슷할 테죠. 완강하게 과거의 시각적 잔영만 붙들고 있는 셈입니다.-277쪽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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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11-05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 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는 이 문장이 너무 좋아요. 김연수 낭독회에서 읽어줬는데. 아. 너무 귀여웠어요. ㅎㅎㅎ

마노아 2009-11-05 18:36   좋아요 0 | URL
멋있었다가 아니라 귀여웠단 말이지요? 김연수씨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려 보면 그게 더 어울리긴 해요.^^

Kitty 2009-11-05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진짜 전 취향이 아닌 듯 ㅡㅡ;;
김연수씨 문장을 보면 진지하게 제 국어실력과 이해능력을 의심하게 되어요.
세 번쯤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ㅡㅡ;;;

다락방 2009-11-05 21:49   좋아요 0 | URL
Kitty님 저도 그 말이 하고 싶어요.
분명 아름다운 글인것 같은데 뭐랄까 묘하게 신경에 거슬려요. 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러니까 그냥 충분히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데 더 아름답게 쓰기 위해서 한번쯤 비틀거나 더하거나 꼬았다거나 하는 그런 느낌이 말이죠. 저도 며칠전에 알라딘에서 책을 샀더니 이 책의 미니 단편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걸 주더라구요. 그래서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단편 한편만 읽어보게 됐는데, 어려운 단어를 쓴것도 아닌데 다시 읽고 다시 읽고 했어요. 뭔지 알겠는데 또 뭔지 모르겠는 느낌, 뭔가 확 다가오지 않고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느낌이에요. 어려운 단어들은 아닌데 왜 어려운 문장이 되버리는지 모르겠어요. 전 그 단편 읽고 단편집 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노아 2009-11-05 23:52   좋아요 0 | URL
두 분 얘기 공감해요. 첫번째와 두번째 단편을 읽고 나서 역시 나랑은 안 맞아...이랬거든요. 그런데 표제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좋았어요. 그렇지만 확실히 이렇게 말을 꼬고 꼬는 것보다는 스토리 중심이 더 좋아요. 읽어도 머리에 잘 안 들어와서 다시 읽게 만드는 건 피곤해요. 좀 멋부리는 것 같기도 하구요.^^;;;;

꿈꾸는섬 2009-11-0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너무 사랑스러워요.^^

마노아 2009-11-05 23:52   좋아요 0 | URL
하핫, 호불호가 확 갈리고 있어요.^^

같은하늘 2009-11-06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독해능력(?)이 안좋아 이책 구입하고도 못읽고 있잖아요.^^
처음에 좋다는 얘기와 예쁜표지(?)에 덥썩 구입했는데 여러분들이 난해하다는 평을 하셔서...ㅜㅜ

마노아 2009-11-06 10:14   좋아요 0 | URL
책이 확실히 예쁘지요? 전 천천히 읽고 있어요. 도무지 모르겠는 것들은 그냥 스윽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