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77년생 작가가 이 책의 의뢰를 받았을 때 마다하려 했던 이유처럼, 87년 그해에 난 어렸고, 그래서 그 뜨거웠던 열기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다만, 그 시절 어쩌다가 시내로 외출을 하게 된 날 둘째 언니가 저 사람들 곁에 가지 말라고 조심하라고 가리키던 전경들은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언니가 6학년으로 둘 다 어리긴 마찬가지였는데, 그래도 언니는 그네들이 멀쩡한 시민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냐고, 나중에 한 번 물어봐야겠다.(문득, 궁금해졌다.) 

광주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고, 그 사건들을 책으로 접하게 된 것은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였다. 그렇듯 '민주주의'란 글자는 늘 내게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들은 극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고, 울분도 뱉어내게 했으며, 뜨거웠던 젊음과 피눈물엔 감동도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거리감은 있다. 그러니까 그건, 내가 '직접' 경험한 게 아니기 때문에 더 쉽게 환호할 수 있고, 그랬기에 더 쉽게 잊어버리거나 비판도 해버릴 수 있는 거리감인 것이다.  

책은 6월 민주 항쟁의 전개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서사 부분과, 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교육을 바탕으로 한 부록 '그래서 어쩌라고?'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이야기는 짧은 단락으로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시키다 보니 서두르는 감이 있지만 주어진 페이지 안에서 발단 전개 절정을 제대로 구성한 연출감을 자랑한다. 저마다의 목소리를 낼 각기 다른 캐릭터들이 모두 등장하지만 그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데모하는 아들에게 역정내는 술만 마시는 아버지, 보도 연맹 사건으로 어머니를 잃은 뒤 '빨갱이'에 경기 일으키시는 엄마, 장남의 책임으로 양심의 울림을 외면했던 큰 형, 반공 웅변대회 출신으로 이제는 짱돌 들고 데모대의 앞에 서는 막내 동생까지. 나라에서 나쁘다고 하니까, 그게 죽어 마땅한 죄라고 하니까 마냥 그런 줄 알고만 살아왔던 이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모정이 시대에 대한 각성으로까지 이어지는 장면은 반전을 위한 소재만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바뀌어진, 달라진 어머니들은 종종 관찰되곤 한다. 작품 속에서 교도소 담을 뛰어넘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작가님 설명에 의하면 실제로 인터뷰 대상에게서 들었던 실화라고 한다. 



 

 

 

 

 

 

 

 

 

 

 


가장 인상깊었던 대목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술자리에서 벌어진 언쟁이었다. 젊은 혈기로 핏대 올리는 새파란 후배한테 변절자 소리 들었던 장남이 지적한다.  

   
  "학생들 보기엔 우리가 위선자나 변절자로 보이겠죠. 그래서, 변절자는 같이 울면 안돼요?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들만 슬퍼하고 분노할 자격이 있는 건가요?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얻는 게 도덕적 우월감 말고 뭐가 있어요? 같이 슬퍼하는 사람들까지 밀쳐내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자칭 진보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그 살벌한 도덕적 우월감 앞에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사실 어제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도 저 한 마디를 던져주고 싶은 사람이 있기도 했다. (내 앞에 앉았던 어떤 사람...;;;;) 

결과적으로 볼 때, 87년의 항쟁은 실패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우린 그때 성취한 민주주의가 우리 것이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얘기한다면 3.1운동도 실패한 운동이었다. 그 후로도 우린 식민 지배를 26년이나 더 버텨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소원하던 독립을 당장 이루어내지 못했다고 해서 3.1운동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87년 항쟁도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만큼 희생했기에, 그만큼 덤볐기에 지금 이 정도까지라도 온 것이라고. 본의든 아니든 거기에 무임승차해온 사람으로서 왜 그것밖에 못했느냐고 감히 손가락질 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 시절 투쟁을 반사이익 삼은 욕먹을 만한 정치인들이 있다 할지라도. 



(젊은 작가에게서 나오는 특유의 유머 감각이 순간순간 빛을 보인다. 심각하게 읽다가도 피식피식 웃게 되는 대목) 

청소년들을 위한 학습교재로 만들어진 목표답게 앞쪽에 서사적 구성과 뒤쪽의 심층 강의로 진행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책 한 권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더 많은 내용은 작가의 당부처럼 일선 교사들의, 그리고 어른들의 몫으로 남겨둬야 할 것이다.  

여전히 제도적 민주주의조차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려야 하는 우리로서는 아직도 이런 이야기들을 목놓아 울며 봐야한다는 것이 서럽기 그지 없지만, 수업의 보충교재로 쓰일 수 있는 이런 책이 나와준다는 것으로도 일단은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한 학급 40명 규모의 고등학교에서 근현대사를 선택한 학생이 달랑 2명 뿐인 현실은 여전히 쓰디쓰지만 말이다.  

솔로몬은 1,000번째의 번제에서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지혜를 선물로 받았다. 999번째 까지는 응답지 않았던 그 신으로부터. 

물은 100도씨에서 끓는다. 99도까지는 끓지 않는다. 작품 속 사내의 말처럼, 99도에서 포기해 버린다면 얼마나 아까울까.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닌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중요하다는 걸, 더 값지다는 걸 우린 살면서 배워냈다. '민주주의'가 단지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고리타분한 단어가 아니고, '정치'라는 것이 단지 욕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님을 우린 또 살면서 알아차리지 않아던가. 결국엔 우리의 삶이고 우리의 생을 관통하는 주제다. 외면하지 말고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그렇게 모이다 보면 우리의 온도는 어느덧 99도를 지나 100도에 도달하지 않을까. 20년 전에 참 승리를 맛보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진짜 승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도,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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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7-1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우리도, 이겨야죠.^^

마노아 2009-07-11 09:15   좋아요 0 | URL
승리의 화이팅이에요~

순오기 2009-07-11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만남은 잘 다녀왔나요?
민주는 카페를 못 찾아 헤매다가 시간이 늦어서 못 갔다는....ㅜㅜ

우리도 이길 수 있다!

마노아 2009-07-11 09:17   좋아요 0 | URL
이리 카페가 홍대 전철역에서 90도로 쭉 올라가면 바로 나오는 곳에 있는데 지도만 보면 당최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어요.
전에 차인표 작가와의 만남 때 제가 엄청 헤맸거든요.
이번엔 그때 경험으로 쉽게 찾았는데 민주도 고생했을 거예요. 지난 번에 저도 물어물어 갔거든요.
민주를 못 만나서 아쉽네요.
다음을 기약해죠.
역시 승리의 기약~!

행복희망꿈 2009-07-11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마음이 많이 아팠답니다.
어제 다녀오셨나요? 좋은 시간 보내셨는지 궁금하네요.

마노아 2009-07-11 20:05   좋아요 0 | URL
초반에는 말이 너무 안 들리고 자리가 불편해서 앉아있기가 힘들었어요. 마칠 때 쯤 되니까 질문도 재밌어지고 답변도 인상적인 것들이 들리더라구요.^^

다락방 2009-07-1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읽으셨군요!
마노아님은 엄청나게 책을 읽으시면서, 그 모든 책들을 그리 꼼꼼하게 보시다니. 감탄하고 말아요, 정말.

마노아 2009-07-11 22:56   좋아요 0 | URL
그림책을 더 좋아하면서, 그림이 있을 땐 오히려 그림을 주의 깊게 못 보고 넘어갈 때가 많아요. 차분한 독서를 해야 하는데 늘 좀 급히 달리는 느낌이에요. ^^;;

같은하늘 2009-07-1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을 볼 때마다 언제 이리도 많은 책을 읽으시는지 궁금...
그나저나 마노아님 나이가 들통나버렸어요...^^

마노아 2009-07-13 15:12   좋아요 0 | URL
하핫, 숨기려던 것도 아니니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