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원에 좀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예전에도 엄마는 곧잘 하셨다.
익숙하고 편한 문명과 떨어진다는(그래봤자 인터넷 사용 못하는 것 정도지만) 걸 상상도 못하는 나는 늘 싫다고만 했다.
'기도원'이라고 말을 하니 어쩐지 거시기하게 들리지만 꼭 조용한 절에 들어가서 참선을 하며 수련을 한다...이런 식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통할 듯 싶다.
암튼. 늘 싫다 하는 나였는데, 이번엔 정말 다녀와야겠단 절박감이 들었다.
한의원에 다닌지 한달 더 지났지만 차도가 거의 없다.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집에 오면 늘 만나야 하는 사람. 말을 섞지 않은 지 꽤 흘렀지만 그렇다 해도 풀어지지 않을 관계의 카테고리, 그리고 내가 대신 치루고 있는 오랜 희생들. 그 무한대의 수열은 나를 삼킬 것 같은 미움으로 천착하는 중이었다. 그 사람이 너무 미웠는데, 계속 미워하다 보면 결국엔 내가 더 미워졌다. 칼로 물베기 같은 싸움도 지쳤고, 뒷감당 해주기도 너무 버거웠고, 도대체가 끝이라는 게 보이질 않아서 이러다 내가 미치겠구나... 이런 생각도 들어버렸다.
미워하는 것도 힘들다면 용서라도 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그릇을 내가 갖지 못했다. 최소한의 '사과'정도는 받고 싶었는데 입도 벙긋하지 않는 그 사람의 뻔뻔함에 다시 또 치를 떨고... 헌데, 너무 미안해서 말도 못하는 거라 누군가 내게 말을 한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하는 거라고 나는 또 말했다. 죽을 만큼 미안해서 미안하단 소리가 안 나와도 죽을 만큼의 노력으로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우리에게 좋았던 시절이, 고마웠던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나는 죽도록 때려주고 싶었을 때의 감정들만 자꾸 되새기며 미워할 이유들만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팽팽했던 긴장의 끈이 터지고 말았다. 얼룩진 옷의 때를 금방 세탁하지 않으면 찌든 때가 되니까 어여 손을 쓰란 말에, 얼룩을 만든 사람이 세탁을 해야지 왜 나더러 빨라고 하냐고 울화통을 터트리곤 했는데, 문득... 내가 먼저 빨면 또 어떠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든 얼룩 아니라도, 내게 더 필요하고 소중한 옷이라면, 내가 먼저 빨아서 깨끗하게 만드는 게 더 나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칼로 물베기였던 싸움은 내가 먼저 입을 여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다. 내가 먼저 손내밀어 주기를 기다렸던 사람의 갈망이, 갈증이 느껴진다. 바보같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제, 마음에 자유를 주는 훈련(득도?)을 하려고 기도원에 가려고 짐을 싸려고 하는데, 어무이께서 과연 찾아갈 수 있겠냐고 하신다. 데려다 줄까? 하시기에, 혼자 갈수 있다고 했다. 내 나이가 몇 갠데...;;;; 워낙에 길치라서 믿음도 안 갔을 테고, 엄마 눈에 여전히 어리게만 보일 막둥이란 생각이셨겠지. 내가 나이 서른 넘어서도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쫌 감동. 그리고 쫌 슬프기도 하더라.
암튼, 그러던 찰나에 영등포에 있는 모 중학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다음 주 수요일 하루 시간강사 뛰어달라고. 2학기에 정년퇴직하는 선생님이 계시니 그때 자리 빌 것을 염두에 두고 와달란다.
일년 뒤의 자리, 몇 달 뒤의 자리란 정말 내 손에 쥐어주기까지는 믿을 수 없는 의미 없는 약속임을 이젠 알고 있기에 그것이 매력적일 수는 없고, 거리도 너무 멀지만, 그래도 노느니 하루라도 일하자고 생각하고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중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병가 대체 한달 기간제. 한달 기간제와 하루 강사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앞서 전화온 학교에 못 가겠다고 전화 연락을 드렸다. 교감샘인지 교무부장샘인지 몹시 언짢아 한다. (양심이 없군요!)
오늘 담주부터 근무하기로 한 학교에 다녀왔다. 버스 타고 죽가면 되는데 잘못 내려서 세 정거장을 헤매고 장렬히 도착해 주셨다. 일년 만에 신어본 7cm샌들에 휘청휘청거리며.
이곳 생활수준이 무척 열악하며 공부에 대한 희망이 없는 아이들이라고 인수인계 해주시던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다. 내 인상을 보더니 애들이 좀 거칠다며 많이 휘둘리게 생겼다고... 상처 너무 받지 말라고 충고해 주신다. (저 겁 많아요! ㅠ.ㅠ) 곧 기말고사고, 그리고 방학까지의 2주 간의 시간은 가장 진도나가기 어려운 씨즌이니 여러모로 걱정이 되지만, 설마 백수로 지내는 것보다 무섭겠어? (뭐 이런 각오로 덤빌 생각...;;;)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번엔 서울K상고에서 연락이 왔다. 자기 학교 와서 일하라고. 허걱이다. 왜들 갑자기 나를 찾는가? 여태 캔디폰이었는데... 집에서는 더 가깝지만 이미 서류까지 넘기고 온 학교에 가야지 또 어딜 바꾸겠는가. 방학과 동시에 나와야 한다는 것이 서글프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정시 출근해서 정시 퇴근하는 일자리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방학이 가까워오는 그런 시점이니까 가능한 일일 수도 있는데, 내심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마음을 좀 더 풀고, 원망의 마음을 좀 거두었을 때 내가 간절히 바라던 일들이 조금 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타이밍. 당신이 저지른 일 제발 스스로 수습까지 해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이 상황이 일주일 전보다는 훨씬 행복해진 거니까. 그러니까... 오늘도 맑음!
ps. 기도원은 결국 못 갔다. 계속 안 가도 되었으면 좋겠다. 마인트 컨트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