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 블로그 - 역사와의 새로운 접속 21세기에 조선을 블로깅하다
문명식 외 지음, 노대환 감수 / 생각과느낌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제목을 본 순간, 너무 참신해서 오히려 '상업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상업적이라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내 선입견으로는 이 책의 '깊이'에 큰 신뢰를 담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정말 생각도 못한 별천지가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서문에서 '불로구', '갑회'라는 단어를 보면서도 이 시대에 오늘날의 블로그와 카페와 비슷한 단어들이 있었네...라며 순진하게 넘어갔던 나는, 이게 모두 '픽션'이라는 것을 안 순간, 오히려 제대로 속았다는 생각에 뜻모를 희열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거창한 서두는 웬 말인가? 다 이유가 있다. 이 책, 너무 즐겁다!
'편집'과 '기획'의 힘이 이렇게 셀 줄 몰랐다. 태조, 정도전, 태종, 세종, 조광조, 이순신, 광해군, 김육의 블로그가 조선사의 큰 축을 이루었고, 그 사이사이 양념처럼 양반 블로그, 농민 블로그, 상인 블로그가 끼어들어가 조선의 신분제도를 비롯, 그들의 생활상을 조명해 주었고, 또 그 사이사이 의병 카페, 실학 카페, 풍속화 카페가 들어가 있으면서 주제사와 미시사를 넘나들며 문화사도 같이 정리를 해주었다.
'블로그'와 '카페'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바로 그 '소통'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온 것인데, 평소 무심코 보게 되는 그 프레임이 조선사를 뒤집어 쓰고 있으니 너무 재미난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블로거 중에서 가장 이웃 블로거가 많은 사람은 이순신도 아니고 세종도 아니고 바로 태조 이성계다. 무려 이웃 블로거가 583명이나 된다. 당시 '영웅'으로 급부상했던 그의 인기도 실감이 날 뿐아니라 한 나라를 세운 개국의 인물이라는 각성이 팍 드는 순간이다. 블로거의 주인장들은 자신의 카테고리에 맞게 글을 쓰는데 태조 이성계의 카테고리는 이렇다.
-우국충정
-개국 통신
-국가와 가족
-선조들 이야기
-최신 명 풍속
이들 카테고리 중에는 공지사항도 있고 이웃 공개 글도 있고, 자물쇠 채워진 비밀 글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댓글'도 등장한다. 댓글을 쓰는 사람들의 닉네임도 역사적 인물들의 성격을 반영하는 이름들인데, 이방원의 필명은 '하여가'이다. 이들은 댓글로 정책을 가지고 논쟁을 펼치다가 악플러가 등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저주' 댓글도 등장한다. '이 글을 본 사람은 모두 저주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대신 '목자위왕' 네 글자를 다른 곳에 두 번 올려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행운의 편지가 등장하는 것! 이런 형식들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역사서로서의 순기능을 방해하지 않을까 고민이 될 것 같은데, 그 수위를 묘하게 잘 조절한다. 한마디로 기본 역사서에 충실하지만 표현은 '쉽게', '재밌게' 가자가 이 책의 주장이다. 실록의 내용이라고 해서 모두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새겨진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그럴 때면 어김 없이 댓글이 등장하면서 '속내'는 그게 아니지 않냐며 공방이 벌어진다.
또 [펌글]이 등장하면서 신문의 사설 형식을 빌린 논조가 등장하고, 한참 유행했던 패러디 그림이 기막힌 타이밍에 등장하기도 한다. '조삼모사'가 대표적이다.
대쪽의 길을 걸은 김육 대감의 블로그에서는 그가 왜 대동법에 목숨을 걸었는지 역사적 상황과 현실적 이유가 설득력 있게 제공된다. 실학 카페에서는 중농학파와 중상학파의 주장이 어떻게 다른 지가 역시 댓글 공방을 통해서 쉽게 설명되어져 있고, 이 댓글이라는 것은 백년 뒤의 댓글도 같이 실리면서 정책이 어떻게 변화되어 있는 지도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풍속화 카페에서도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윤두서, 조영석, 신사임당 등을 두리 비교해서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빠'와 '까'가 등장하면서 이들 빠의 성향까지 분석하는 재미를 보여준다. 한참 유행했던 '~~~하는 법!'이런 타이틀의 신간 소개하는 패러디도 압권이었으며 표지는 신윤복 그림의 주인공이 노트북을 보면서 컴퓨터 쓰는 장면이 나오니 그야말로 재치와 유머 감각이 하늘을 찌른다.
책을 보면서 청소년들이 보면 즐겁고 재밌는 교육이 될 것 같아서 막 중학생이 되는 친구에게 선물을 주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보니 소장욕심이 생기는 거다. 그래서 보던 책은 내가 계속 갖고, 친구에게는 주문을 넣어버렸다. 좋은 책은 두루두루 함께 읽으면 이 아니 기쁜 일이겠는가!
그러나 옥의 티가 있으니, 연도 틀린 것이 두건 정도 있었고 오타도 두건 정도 있었다. 처음에 선물 줄 생각에 책에 표시를 안 해 둔 게 살짝 후회가 된다. 다시 보긴 좀 엄두가 안 나고...;;;;; 2쇄에서는 꼼꼼히 살펴서 오타가 수정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