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리해야 할 일들이 아직 몇 가지 남아 있지만, 사실상 이번 학기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연구에 더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방학 중에는 강의도 거절하였다. 덕분에 개인적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일정 기간 확보되었다. 당분간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서 좋지만, 책을 마음껏 읽는다는 것이 많은 책을 읽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거 대입 면접에서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500권 이상의 책을 읽겠다고 답변했었다. 독서를 좋아하는 학생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답변이었고, 우리나라에서 12년 간의 정규교육을 통해 양적인 방법과 평가에 익숙해진 학생이 생각할 수 있는 무난한 목표였다. 나의 답변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을 전공하신 L교수님은 잡지에 실린 글들이나 논문 등의 페이퍼는 어떻게 권 수로 규정하고 측정할 것인지 물으셨고, 그런 부분을 미리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잠시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답하기도 전에 아퀴나스를 전공하신 J교수님께서 그런 부분은 대학에 입학하면 배울 거라고 상황을 정리해주셨고, 그 이후로 나는 대입 결과가 발표되기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대학과 대학원 과정에서 오래 공부한 이후에야, 나는 독서가와 연구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부를 하겠다고 모인 사람들의 집단에는 언제나 독서가와 연구자가 있었다. 독서가는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읽었고, 정말 많은 것들을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나 많은 책을 꾸준히 읽는다는 사실과 그들이 매우 다양한 분야에 박식하다는 사실이 놀라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놀랍게 느껴지는 사람은 독서가가 아니라 연구자였다. 그들이 관심을 두는 곳은 많은 책이 아니라 자신의 질문이었으며, 그들은 자신의 문제의식과 논점을 섬세하게 다룰 줄 알았다. 연구자는 독서가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독서가가 연구자인 것은 아니었다.
훌륭한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훌륭한 요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요리사가 되고자 한다면 요리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며 스스로 수없이 음식을 만들어 보아야 한다. 인간은 기계처럼 단순하지 않아서, 단지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것을 집어 넣는다고 해서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 만들어져 나오지는 않는다. 때로는 무언가를 채우는 것보다 오히려 자신의 체험과 상상력이 움직일 수 있도록 무언가를 비우는 것이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리든지 글이든지 삶이든지 자신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과에 본격적인 관심이 있다면, 원하는 결과를 직접 만들어내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 한다.
외국어 실력이 늘어도 외국인과 대화할 때 늘 답답함이 남아 있는 것처럼, 연구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늘 답답함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내게는 언제나 배움이 필요하고 연습이 필요하다. 일단 관심 분야의 책들을 잠시 살펴보고,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연습을 계속 해야겠다. 자유로움에는 반드시 연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