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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도, 차갑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핫함과 쿨함을 아우르는, 열정과 냉정이 교차하는, 이것은 ‘역사’의 기록이다. 석유(자본)의 역사, 문명의 역사, 인류의 역사, 종교의 역사, 피의 역사, 그리고 한 인간의 역사. 그러니 당연하게도 뜨겁고, 차가운 기운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것의 실체는 검은 액체에서 비롯된다. ‘석유(Oil)’라 불리는 검은 액체. 인간은 석유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장대한 비극의 서곡이었다. 되레 인간을 지배한 것은 석유가 되고만 비극.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석유 제국’을 건설한 미국의 한 자본가를 다룬 영화다. 시대극이다. 석유로 인해 블랙러쉬가 이뤄지던 1900년 전후의 미국 캘리포니아. 석유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자본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불굴의 의지와 분별없는 열정 사이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속 시원히 결론부터 말하고 보자. 한마디로 ‘석유가 잉태한 분별없는 열정이 불러온 파국’. 영화는 석유와 인간(혹은 종교까지 곁들여)의 협잡이 얼마나 환멸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시작부터 그랬다. 산맥과 황야를 조망하면서 들려오는 기계음은 비극의 전조와도 같았다.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이 관객의 오감을 붙들었다면, 거의 10여분 이상을 거의 대사 없이 꿈틀대는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퍼포먼스가 뒤를 이었다. 단 한마디 대사, “드디어 찾았어”를 제외한다면, 은광을 채굴하는 그의 모질고 험한 분투가 이어진다. 그것은 어떤 경외심까지 불러일으켰다. 노동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경배 같은 것.
 
플레인뷰는 혼자 끊임없이 갱을 오르내리다가 사고를 당한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는다. 은광에 이어 석유까지 채굴에 나선다. 은광이 종잣돈이라면 그의 욕망은 검은 액체로 향해 있다. 그것만이 ‘성공’의 모든 것인양, 그는 앞으로만 달려나간다. DNA에 그렇게 각인돼 있는 것 같다. 왜 석유에, 돈에 집착하는지 끝까지 알 순 없지만, 그는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저 자신이 자발적으로 뛰어든 게임에 몰두하는, 광기 그 자체. 

성공가도를 달리는 플레인뷰에게 하나둘 사람이 붙지만, 그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신은 ‘석유’ 하나뿐이다. 석유사업을 위해 그는 포장과 기만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유정사업의 장소에서 해당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은 ‘패밀리맨’이며, 유정사업은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선전한다. 양아들 H.W.를 사업설명회 등에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런 목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다 거짓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석유(혹은 돈)만이 그의 ‘유일신’이다. 그것은 ‘대운하’에 모든 것을 걸고자 하는, ‘지금-여기’의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플레인뷰는 석유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던 사나이였다.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시기, 일찍 그 속성을 간파한 플레인뷰가 사람들을 현혹할 기제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속임수라기보다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패밀리’라는 포장을 통해 ‘꼼수’를 부리긴 해도, ‘패밀리’라는 피붙이 앞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역시나 어떤 강력한 불도저도 ‘형님’앞에선 그저 작아지고 마는 현실과도 겹친다. 어찌 할리우드의 20세기 초반 시대극이 21세기에도 기시감처럼 나타나고 마는가.  


말이 잠시 다른 길로 흘렀다. 다시 돌아가자. 석유는 자본(주의)의 동력이었다. 결국 지금 석유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플레인뷰는 지금의 자본가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가 때론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손, 그것은 사업과 실용에 근거하고 있다. 검은 액체는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가 원래 검은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동색의 석유를 향해 애정을 발산한 것일까. 갑작스레 석유가 분출된 장소에서 청력을 잃은 아들이 플레인뷰를 향해 가지 말 것을 애원하지만, 그는 멈출 수가 없다. 석유 앞으로 달린다. 얼굴 찌푸리고 있는 동업자에게 말한다. 석유가 쏟아져 벼락부자가 될 텐데 왜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냐고.
 
그것이야말로 자본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동정 없는 자본의 가장 적나라한 광경. 플레인뷰의 표정에서 나는 자본을 향한 숭고함(!)을 엿본다. 석유가 인간을 집어삼킨 광경. 석유 없이 자본주의는 절대 가속을 붙이지 못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의 동력 또한 석유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인터넷의 근간에도 석유는 있다. 가만 둘러보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석유와 관계를 맺고 있다. 기름값이 오른다고 걱정되는 것은 단지 차 때문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석유 없이 돌아갈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석유(자본)은 그것을 철저히 이용했다. 플레인뷰는 좋게 말하자면 한없이 똑똑한 친구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이른바 ‘막장’ 혹은 ‘끝장’의 영화다. 플레인뷰의 마지막 읊조림, “I'm finished”가 불러온 자폭의 느낌이 그렇다. ‘자본 불리기’에만 몰두하고 ‘신성 전하기’에만 매달리던 성공의 이면. 그 모든 ‘분별없는 열정’의 종국을 암시하는, 그 외침은 참으로 강렬하다. 석유를 캐냈으나, 결국 석유에 지배당하고만 작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한 섞인 피로감의 토로. 석유가 당신을 파멸케 하리라. 플레인뷰에게 미리 알려줄 걸 그랬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타임머신이 없는 세상이다. 안타깝다. 

한때 너무도 거침 없이 오름세를 거듭하던 석유를 기억하는가. 그게 불과 몇달 전이었다. 차츰 깨닫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제 분별없는 열정을 버릴 때라는 것을. 플레인뷰를 통해 그 파국을 경험했다면 말이다. 비약하자면, 석유 아닌 대체재가 필요하다. 혼자만의 열정으로 석유발굴에 나서던 초기 자본가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유가폭등의 전후, 어쩌면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대체 에너지의 개발을 촉구하는 영화로도 읽힐 수 있다. 그것은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놀라운 일이다. 저 영화를 보는 일도 석유와 연관됐음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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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내린 빗방울 수 만큼의 기다림이나, 우주를 수놓은 별들의 수만큼의 그리움,
은 당연 아니다. 이런 기다림과 그리움은, 아주 지독한 사랑을 할 때나 가능한 일이고.

그럼에도, 그 이름이 호명될 때면,
나는, 가뭄 끝에 내리길 바라는 짧은 비만큼의, 어떤 기다림을 품는다.

그 이름, 왕가위.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그런 왕가위가 내린다. 비처럼.

이름하여,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언제나처럼, 그 속엔, 어떤 '사랑'과 '이별'의 풍경화가 펼쳐지리라. 기억과 상처 역시 품은.
(왕)가위 감독이 미국 할리우드에서 찍은 첫 장편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작품.
주드 로, 노라 존스, 나탈리 포트만...
양조위, 장만옥, 장국영 등이 아닌,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놓을 가위's World는 어떨까.
블루베리 파이와 함께, 어떤 밤들을 지새우면 '블루베리 나이츠'로 명명될까.

전반적인 평이 그닥 좋은 것 같진 않다만, (☞ 의아할 정도로 가볍고 퇴행적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이같은 평 또한, '왕가위'라는 이름값에 붙은 기대값 때문에 그러하지 않겠는가.
사실 중요한 건, '왕가위'를 만난다는 사실.
지난 <2046>때처럼, 다시 4년을 기다린 끝의 만남.
나는, 그저 '블루베리'를 냉큼 베어먹을 준비가 돼 있다.
설혹, 그것을 먹고 배탈이 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있나.
'블루베리'를 선택한 건, 결국 나인걸.

이번엔 어떤 사랑과 기억이, 스크린을 지배할까. 궁금하다.
그런 면에서, 내게 가위 감독의 최고작은, <동사서독>이다.
그 황량한 사막에서 펼쳐진 서사시의 운율을, 상처에 할퀸 외로운 군상들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슬픔을,
나는 환상처럼 품고 있다. 어쩌면, 실제보다 기억 속에서 더 부풀려졌을 영화의 감흥.
간절하고, 또 간절하면서도,
누르고 묻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랑과 기억 한자락.
마시면, 지난 기억을, 지난 일을 모두 잊게 해준다는 술, 취생몽사(醉生夢死 : 본뜻은, 술에 취하여 자는 동안에 꾸는 꿈 속에 살고 죽는다는 뜻으로, 한평생을 아무 하는 일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리고 그들만의 농담. 잊으려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기억임을 아는 두 사람만의 어떤 언어.

그렇다고,
<동사서독>의 슬픔 한잔이, 머그잔 한잔을 넘칠만큼은 아니었다.
딱 그만큼만. 넘치지 않을 만큼만. 그저 한잔으로 충분히 목너울이 적셔질만큼만.

어쨌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내린다.

가위가 녹슬진 않았는지,
함께 가위 한번 잡아볼까?
그리고, 우리 함께, 블루베리 파이 한번 시식해볼까? ^.^*

아래는, 4년 전, <2046>을 기다리면서, 읊조린 일종의, 왕가위 찬가(?).





엇갈린 갈지자를 그리는 연인들의 스쳐감...
언제고 떠남을 염두에 두고 있는 그 누군가...
부지불식간 다가와 소용돌이치고 있는 감정의 물결...
걷잡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꾹꾹 눌러 담는...
그것이 왕가위였다...
문 꼭 잠그고...
지독한 외로움에 스스로를 던진 뒤...
온몸은 최대한 늘어져 있어야 한다...
담배와 술도 곁에 있다면 금상첨화다...
담배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창문은 꼭꼭 닫아두고...
술잔은 언제든 입 속으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늘 손에 쥐여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견딜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늘 왕가위와 그렇게 마주 대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골방에 처박혀 담배연기에 질식당하고 술에 찌들어 왕가위를 잘근잘근 씹어대고 싶었다...

연출 작품  (장편)
· 열혈남아(1987), 아비정전(1990), 중경삼림(1994), 동사서독(1994), 타락천사(1995), 해피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 2046(2004)
 
한 남자가 있다

내뿜은 담배연기 마냥 갈 곳 몰라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음악과 영상들로 나의 감성을 애무해주던 그 남자.(그래서 오르가슴을 느끼게 만들고...)
영상마다 끈적끈적한 감정의 행로를 심어놓곤 갑자기 나 몰라라 해 버리던 무책임한 남자.(그래서 더욱 슬프도록 안타까운...)
때로는 영화 이야기를 하는 건지, 우울하고 니힐한 우리네 인생을 들쑤셔보는 건지 알 수없게 만드는 아리송한 남자. (그래서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한편 만들면서 온갖 똥 폼은 다 잡고 시간은 시간대로 걸려서 팬들을 지치게 만드는 괘씸한 남자.(그래서 다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그러면서도 그가 온다는 소식만으로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섹시한 남자.(그래서 설렘을 안겨다주는...)

그랬다. 왕가위는 젊은 날이 지니고 있을법한 우울한 영혼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마약보다 위험하고 죽음보다 강렬한...
 
그와 함께라면 저주라도 좋다

왕가위는 저주다. 계절이, 혹은 가을이, 아픈 사람들에겐. 조금씩 부식돼 가는 마음의 시간을 그는, 불쑥 끄집어낸다. 그리고선 박박 긁어대면서 니힐함을 주입시킨다. 한결같은 슬픔의 정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늘 주춤주춤 거리는 주인공들. 언제고 떠남을 예고하고 있는 관계. 그 정서와 감정은 지독하게 슬프고 아프다. 조용하게 흐느적거리면서 고름을 짜내는 감정의 파편들...

예외적으로 <중경삼림>의 633(양조위)을 제외한다면 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 끝이 암울하고 비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태로운 관계에 발을 담든다. 처음부터 끝을 알고 시작한다는 것, 그 얼마나 지독한가. 그럼에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수 없다. 그건 어쩌면 나, 우리의 모습이고 현대의 자화상이다.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공연히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그건 일종의 저주다...

에고, 그 불온한 매력

어떤 식으로든 처방전이 필요하다. 그의 영화로 입은 상흔은 다시 그의 영화로 씻김굿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왕가위의 영상에서 굳이 의미를 따지려 해선 대략 곤란하다. 이유를 찾고, 근거를 요구하고, 이성에 의한 분석을 요구하는 이 까다로운 세상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직관에 의존해서 세상을 부유한다.

하나같이 마음의 고름을 품고 있는 그의 페르소나들은 이성과 합리보다 '불끈' 즉흥과 충동에 어울린다. 그리고 불온한 매력을 품고 있다. 상처를 주고받고, 그 아픈 상처를 꽁꽁 품은 채 슬픈 기억 속에서 부유한다. 그 에고들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연가. 소화(유덕화, 열혈남아)가, 아비(장국영, 아비정전)가, 223(금성무, 중경삼림)이, 구양봉(장국영)과 맹무살수(양조위, 동사서독)가, 아휘(양조위, 해피투게더)와 보영(장국영)이 그랬고. 특히 <화양연화>의 차우(양조위)와 리첸(장만옥)은 이성에 지배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는 마음의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멈칫거림을 너무도 절절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작은 몸짓, 제스처 하나에도 내 마음은 하릴없이 서걱거렸다.

다시 돌아온 그에게

4년을 기다렸다. 앞서 그를 만난 것이 2000년이었다. <화양연화>, 반복과 시간의 건너뜀, 스쳐 지나가는 느낌들의 미묘한 연결, 찰나에 담아내는 그 감정들의 절절함. 그건 쉽게 말이나 글로 설명될 수 없는 이미지였다. 알아채기라도 할라치면 터질 것 같은 정염의 불꽃들을 거세한 채 차곡차곡 쌓아올린 미세한 감정들의 작은 요동이 오감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왕가위의 매력은 '거부'에 있다. 진지하고 엄숙한 듯 보여도 그의 속내에는 젠체하는 것들을 마음껏 씹어준다. 때론 시간의 흐름이나 기승전결 따위도 무시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거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짜증을 낸다. 그러나 진짜 착하다면 모르지만 착한 척 할 필요는 없다. 강호의 협객들이 나오는 <동사서독>에서는 "칼은 필요없다"며 "무협은 죽었다"고 일갈한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화양연화>도 불륜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감싸 안고 동정표를 던지게 만들었다. 과연, 왕가위!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현대의 태도와 감정을 놓고 왕가위는 모험을 한다. 세월에 깎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도덕, 윤리 혹은 관습에 도전장을 던진다. 그리고 규정짓지 않는다. '부재'와 '결핍'이 두려운 이들에게 왕가위는 슬며시 말을 건네는 듯 하다.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고독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법"이라고. 조용히 고독을 받아들이라는 듯. 그래서 <2046> 앞에서 나는 또 다시 묘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끊임없이 먹어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고 타는 듯한 목마름에 시달렸던 그 때처럼 말이다... (20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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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은퇴는, 슬퍼. 좆나 슬퍼. 눈물이 잠시지만, 그렁했어.

'주형광 은퇴.'
이, 다섯자가 주는 단상이, 어떤 것인지 넌, 알 수 없을거야. ㅠ.ㅠ
☞ '조기 은퇴'주형광, '형광등'처럼 빛난 에이스

솔직히, 올 시즌, 형광이 나올 때, 욕한 적 있다.
중요한 승부처에서,
원포인트 릴리프로 나와서 안타를 두들겨 맞거나, 점수 내줬을 때,
괜히, 광분하면서 형광이 왜 나왔냐고 내뱉은 적 있음을 고백한다.

미안하다. 형광아.
은퇴 소식을 받아들이자니, 울컥해진다.
어쩌란 말이냐. 언젠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도 알았지만,
이제 31살. 우리 뽈록이, 형광이는 아직 마운드에서 씽씽 투구를 날릴 때 아닌가.

14년이라고 했다.
앳띠고 뽀얀, 형광이가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다닌 해가.
그래, 1994년 형광이는 신성이었다. 92년 종석이의 원맨쇼이후, 새롭게 등장한.
비록, 그해 나는 군대에 끌려가서, 그 활약상을 볼 기회가 없었지만,
들리는 풍월에, 그는 자이언츠의, 우리네 야구인생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제대하고 보니,
형광이는 완전, 날았다. 미친 듯이 마운드에 나와서 공을 뿌려댔고,
승리 보증수표! 다 나오라 그래!! 18승7패. 비록, 늦여름부터 떠나있던 탓에, 오래 못만났지만,
바다 건너온 소식에, 그는 자이언츠의 유일신이었다. 민한신 이전의, 형광신.

자이언츠의 마지막 가을야구 시즌까지,
형광이는 고군분투했다. 한마디로 혹사,당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만개한 탓이었을까. 형광이는 조로했다.
팔꿈치는 망가졌고, 반짝반짝 빛나던 에이스는 원포인트 릴리프로 전락했다.

반전을 꾀했을 것이다.
나도 바랐다.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하면서 툭툭 털고, 우뚝 마운드에 선, 형광이를.
야구는 없고, 선수만 있는 자이언츠의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결국 31세의 형광이는 은퇴를 선언했다. 코치 연수를 받는댄다. 어흑.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누가 형광이의 그 깊은 슬픔을, 알 수 있을까. 도저한 슬픔을.
나 역시도, 형광이의 그 슬픔을 알겠는가마는, 나는 형광이가, 아프다. 마이 아프다.
아마도, 형광이는 울고 또 울 것이다. 은퇴는, 그렇다. 알면서도.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맞다. 미친넘, 괜히 지랄하고 있다.
누구나 은퇴를 한다. 시간을 이겨낼 재간은 누구도, 없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속도로 시간 속을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너와 나의 시간은, 너와 나의 간극만큼이나, 또 다른 갭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나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조기은퇴라고 우겨봤자, 형광이는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 같다.
형광아,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오라, 외치는 건,
당연 전혀 상관없지만, 어떤 사람들처럼, 은퇴한 정치인을 대선 출마하라고 우기는 격 아닌가.
지난 시절, 내 소중한, 행복과 즐거움을 안겨다 준 선수들의 은퇴 소식을 듣자면, 괜히 몽클해지는 내 가슴.

역시나, 이제는 안녕을 고할 때.
안녕, 주형광...

아, 이럴 땐, 쓰끼다시 내 인생.
역시나 이런 날엔, '쓰끼다시 내 인생'이 좋아. 좆나 좋아. 은퇴는 슬프지만, 쓰끼다시 내 인생은 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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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전태일 열사의 37주기, 조병준을 만났다.
그저 덤덤하게 '만났다'고 말한 것 같지만, 실은 아니다. 그 '만났다'에는, 좋아서

 

'꺄아아악~~'

 

소리라도 지르고픈 심정이 담겨 있다. 췟, 조병준이 누구길래? 하고 콧방귀를 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바로 당신이 콧방귀를 낀, 그 조병준의 팬이다. 차마 '열혈'이라는 말까지는 못하겠지만.

조병준의 블로그(http://blog.naver.com/joon6078)에서 빌려(?) 온 그의 사진

조병준은 작가다.
숱하게 글을 토해냈고, 나는 그의 책들을 즐겨 읽었다. 특히 세기말과 세기초 무렵. 그 어느날,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 오후 4시의 평화>>라는 책이 내게로 왔다. 인도 캘거타 의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랑스러운 친구들을 하나씩 끄집어낸 책이다. 그 묘사와 풍경이 너무 살가워서, 나는 대뜸 인도가, 캘거타가 그리워졌다. 가보지도 못한 곳을 그리워하다니.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 책 때문에 나는, 인도를 처음 찾았다. 물론 당연히 캘거타를 가야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짧은 일주일여, 나는 델리를 누볐다. 인도에 빠졌다. 일주일, 인도에 빠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어쨌든, 나에게 캘거타는 여전히 숙제다. 언젠가 꼭 가야할 땅.

조병준은 그렇게 시작됐다.
앞선 책과 동체나 다름없는,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 나는 천사를 믿지 않지만>>은 박가서장의 절판으로 사지 못하다가, 그린비의 재출간으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안도했다. 두 권을 손에 넣어서. 두 권은 2005년에 한권으로 묶여 개정판이 나왔다.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 오후 4시의 천사들>>. 그리고 또 다른 그의 친구들을 만났다.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 이건 조병준을 구성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책을 읽고선,  내게도 이런 사람들이 있음을 새삼 되새김질했다. 나는, 그들이 있기에 살아숨쉬고 있었다. 나도 그들을 엮어보고 싶었다. <<당신이 있어, 난 행복해 ^^>>라는 제목까지 생각해놨다. 물론 아직 시작도 못했다. 머리에만 맴돌뿐.

조병준은, 그 모든 사람들에게, 친구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책은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조병준이 있다.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 이 땅이 아름다운 이유>>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 나는 조병준을 통해, 또 다른 세계와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꿈을 꾸고 있다.

 

그 외에도,
조병준의 문화적 상상력이 날개를 폈던 <<나눔 나눔 나눔>>을 품고 있고, <<따뜻한 슬픔:조병준, 사진으로 사랑을 노래하다>>을 만나고 싶으며, 무엇보다 첫 번째 시집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을 갖고 싶다. 한동안 뜸했던 그를, 직접 만나게 되면서 갑자기 불타오르는 느낌이랄까.
 
나는 조병준을 흠모했다.
그의 글을 따뜻했고, 그의 글은 착착 감기는 맛이 있었다. 아마 흠모 글쟁이를 꼽으라면, 나는 고종석과 조병준을 들 수 있겠다. 전혀 다른 층위를 걷는 두 사람이지만, 공통점을 뽑아내자면, 그들에게선 자유의 냄새가 난다. 나는 그 냄새를 좋아한다. 으흠.
 
한동안 조병준에 대해 뜸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얼마전, <브로크백 마운틴> 재개봉 사실과 관련된, 그의 글(Dear. Jack & Enis)을 우연찮게 마주대했다. 갑자기 조병준이 살아돌아왔다. 블로그(조병준의 내 마음의 지도)까지 알게 됐다. 우연찮게 다시 조병준을 접하게 된 마당에, 눈 앞에 조병준을 만났으니, 그 마음이야 오죽하리오.

조병준과의 술자리는 유쾌했다.
강문이형의 권유로 따라간 <임종진 북녘사진전-사는거이 뭐 다 똑같디요>가 계기였다. 첫날 사진전이 파하고, 뒷풀이가 있었다. 처음엔 누군지 몰랐다. 뒷풀이 다른 팀에 늦게 오셨고, 그 팀이 파한 후, 우리에게 합류했다. 조.병.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오오오오... 1차 마치고 집에 가려고 했던 계획은 완전 수정. 나는 조병준을 택했다. 시종일관 유쾌했고, 그 방랑자의 체취가 좋았다. 예의 사람 좋은 웃음은 책에 나온 사진과 같았다. 술도 잘 마시더라. 생이란 그런 것 아니겠어.

그리고 임종진.
조병준을 만나게 된, 계기가 된 사진전을 연 사람. 월간 말과 한겨레의 (사진)기자였고, 이번이 첫번째 개인전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 국회에서 열리는 북한 사진전이라. 그 의미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는 북한에서도 꽤나 유명하단다. 과거 양심수 송환 시에 유일하게 북쪽에서 초대받은 사진기자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아는 유일한 사진기자"라는 북쪽 기관원의 말을 듣기도 했단다. 뭐, 그런 레떼르는 중요치 않다. 그에게서도 역시 '사람'내음이 풀풀 풍겼다. 그는 수줍어했고, 감성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눈물이 많은 사람 같았다. '기자'보다는 '작가'에 어울릴법한 사람. ☞ 임종진 북녘사진전: 사는 거이 뭐 다 똑같디요

임종진 북녘사진전 <사람 사는거이 뭐 다 똑같디요>

무엇보다, 임종진은 느렸다.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 '느린 천성',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는 내년이면 캄보디아를 간다고 그랬다. 1년 예정으로. 나보다 형인 그 역시, 아직 결혼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느리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고 천천히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같이 그 자리에서 있었던 한 형이 나에게 그랬다. "(종진이는) 꾸준하게 자신의 길을 준비해왔거든. 거기에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있었는지 알아? 나는 쭈욱 봐 왔거든. 자신만의 것을 만드는 작업을 하기까지 종진이가 한 노력을..."

임종진이 부러웠다.
그 리고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내 것'을 만든다는 작업에 흥미를 갖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내 것' 작업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고민과 노력을 담아내고 흡수하고 싶단 생각도 한다. '사라지는 것'과 '생애 첫 내 것'에 대한 이야기.

임종진을 캄보디아에서.
술 자리에서 사람들은 내년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함께 보자는 말을 했다. 진짜 이뤄질지, 그저 농담으로 지나갈지, 내년이 돼봐야 알겠지만, 나는 다시 캄보디아를 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임종진 in 캄보디아을 만나기 위해. 그는 캄보디아의 느림과 어떻게 조응하고 있을까. 참, 전시회의 마스코트 같았던 북녘 아가씨, 아니 이젠 아줌마로 바뀌었다는 사진의 주인공 이름은 '장류진'이라고 했다. 그 수줍은 미소가 참으로 좋았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흘러나온 선율을 따라 (김)광석이형 노래를 따라했던 합창은 참으로 므훗한 풍경이었다. 예술가들과의 자리가 즐거운 이유. 악마적 퇴폐와 고질적 순수가 함께하는 자리.



여행을 좋아한다면, 자유와 감성, 그리고 세계를 감식하고 싶다면,
너에게, 조병준을 권한다. 아울러, 임종진도.

나는, 당신들을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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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책을품은삶 > 어느 날인가 이 사랑을… : 겨울, 부암동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

눈을 떠보니, 잔뜩 흐리다.
비가 올까, 걱정보다 비가 오길, 바란다.
그러고보니 새벽녘, 눈도 아주 살짝 다녀갔구나.

부암동 가는 날.
산책을 할 것이고, 중요한 미팅이 있다.
 
왜 흐려야 할 것이냐. 이유는 없다.
굳이 꼽자면, 눈을 떴을 때 바라본 하늘 때문인가. 
아님 어젯밤 술 취한 선배들의 주정을 들어주느라 마음이 지친 탓인지도.
선배는 속도 모르고, 저 놈은 늘 웃어서 좋다, 며 날 상대로 열변을 토해냈고, 술을 거의 마시지 않은 나로선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했다.

왠지, 우산을 쓰고 빗소릴 들으며 부암동을 거닐고 싶다네.
이 찬 날씨에, 미친 게지. 그래, 아주 가끔은 이럴 때도 있는 법이지.
향미 짙게 깔린 커피 한 잔이면 또 되잖아. 부암동은 그게 가능한 동네니까.
 



백사실 계곡으로 향한다. 비는 나리지 않지만, 돌풍이 분다.
찬 기운과 맞물려, 시야를 가리고, 발걸음을 멈칫거리게 만든다.





북악산길 산책로, 돌풍길.

물론 피해갈 일은 없다. 나는 발걸음을 뚜벅뚜벅 옮길 뿐이다.
Autumn이 흘러가고, Art for Life가 흘러간다.
돌풍에도 그렇게 흘러간다. 나의 발걸음처럼.


흠, 개조심, 이라.
문앞에 찰싹 달라붙은 문구를 보면서, 생각한다.
개(는 사람을)조심(해야 한다).
개가 이 세계를 말아먹는 법은 없다.
인간이 개를 아낀다지만,
그것도 저 필요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 아닐까.
개의 필요에 의해 사람이 간택되는 경우, 얼마나 될까.
그러니, 개야 조심해. 인간을. 언제 널 버릴 줄 모른단다. 


앙상하다는 표현, 밖에 없는 것일까.
저들은 사람들의 그 표현에 동의하고 있을까.
카메라는 돌풍에 흔들리는 그들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진 못한다.
저들은 돌풍에 순응하는 것일까, 아니면 버티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 아파트가 아닌,
예쁜 집에 눈길 한 번 주면서. 
아, 비싸고 큰 집 아닌, 핸드 빌트 하우스에 살고 싶다.



두 갈래로 뻗은 나무야, 나무야,  
너의 목생(木生)에서 어떤 균열을 거쳤기에, 그리 되었니. 
물론, 그것이 나쁘다거나 옳지 않아서가 아니고, 나는 그저 궁금하구나.
 


느닷없는 기시감처럼 떠오르는 영화, <카모메 식당>.
그 숲의 정경도 다르며, 맥락도 다르건만, <카모메 식당>의 숲이 다가온다.
핀란드인들도 슬픔이 있는데, 어찌해 고요하고 편안하며 자유스러운가 묻자,
핀란드 청년은 답하지. "숲이 있어서!"


나는 아직, 야생멧돼지를 만난 적이 없다. 
야생멧돼지의 출몰이 잦아 정부가 대책을 마련했다는 최근의 뉴스. 
원인과 이유를 설명했지만, 나는 왠지 그것이 어떤 '징후'같다고 생각했다.
그 징후에 대해 당신에게 단편을 부탁하고 싶었던, 미처 전하지 못한 바람.
눈 밝은 당신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백사실 계곡에 당도하고,
부암동 주민, 김남희 작가의 동네 사랑이 뚝뚝 떨어진다. 
장장 6개월여에 걸쳐 복덕방 할아버지를 들들 볶고 귀찮게 하면서, 
마침내 부암동을 서식지로 삼고야 말았던 사람, 김남희. 참으로 부럽도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시부렁거린 '내먄(잘 살면 돼)' 아파트 광고의 천박함과 역겨움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닌, '어디(의 얼마짜리에) 사느냐'에 방점을 뒀기 때문.
내 보기에, 부암동은 서울에서 흔치 않게 '어떻게 사느냐'를 고민하고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동네다. 

영국 BBC가 로컬 라디오방송을 시작하면서, 이런 카피를 내보냈다.
"If you love where you live, Be part of It(당신이 사는 곳을 사랑한다면, 그 일부가 되세요)." 백사실 계곡에, 부암동에 탐닉한 김남희는 그래 보인다.


가만, 눈을 감는다.
계곡 사이를 유영하는 바람이 거세긴 해도, 나는 어떤 '흐름'을 느낀다. 

구름이 흐른다. 저기 하늘에서. 
바람도 흐른다. 나의 두 빰에서.
낙엽이 흐른다. 나의 발 밑에서. 
말들도 흐른다. 우리네 입가에서.
사람이 흐르고, 시간이 흐른다. 
모든 것이 흐르는 이곳, 부암동 백사실 계곡. 

 

아울러, 개도맹이 지금은 자취를 감춘 그 겨울, 부암동.
 
 

할머니가 뭔가 줍고 계신다. 
아마도 은행열매가 아닌가 싶지만, 그와 함께 할머니의 어떤 생도 함께 줍고 계신 것이 아닐까. 뭘, 줍고 계신가 여쭙고도 싶지만,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백사실 계곡을 나오는 길, 할머니는 여전히 생을 줍고 계신다. 
나도 1인분의 생을 온전히 줍고 싶다...


《외로움이 외로움에게》의 김남희도, 그러니까, 
자발적 자기파괴자, 자발적 주변인, 자발적 시스템 낙오자 되시겠다. 
그녀는 '다른 삶'을 살아보라고 권한다. 시스템에서 벗어나보라고 촉구한다. 
강고한 시스템이라지만, 그것은 내 마음속의 노예가 만들어놓은 철창이다.
낙오되면 어쩌나, 싶지만, 죽지 않는다. 차츰 독을 빼고 있는 나는 그것에 적극 찬성표를 던진다.

'길을 떠난' 여자들이 있다. 
세간의 이른바 '안정'된 직장과 마약 같은 월급에서 스스로 벗어난 여자들. 
과감히 '이기적'이 되기로, 내가 행복해하는 길을 걷기로 작정한 여자들. 

그런 여자들을 몇몇 안다. 
길 떠난, 길을 걷는 여자들의 '힘'.
그리고 나는 (여자로서) 어떤 여자들을 사랑하거나 좋아했으며, 
(사람으로서) 어떤 여자들의 삶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김남희도 그런 경우다. 

물론, 그들은 약하고, 완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강자적 태도에 눈길 주지 않았다.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와 기준이 아닌 자신만의 가치와 기준을 준거점으로 삼는다.

자신을 성찰하고 뒤돌아보며 자신과 이야기하고, 그속에서 즐거움도 찾을 줄 아는 그들이다. 나는 당신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길'은 발걸음이 닿는 물리적인 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사가 아닌 동사인 길. 뚜벅뚜벅 당신이 걷는 그 길을 나는 지지하고, 옆에서 함께 흐르고 싶다. 

지난 7월, 김남희의 이야기가 펼쳐졌던 여름.
다른 삶, 다른 길이 있음을 명시해달라고 부탁했었지. 
독을 빼고 있는 나는, 해독제 제조를 위해 다른 사람들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당신도 그래서 김남희보다 더 존재 자체로 고마운 사람.



그리고 4개월, 겨울의 시작, 부암동. 
부암동 주민인 그녀에게 일본의 '베델의 집'에 대한 인상 깊은 이야기.
좀 더 부연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다시 흐른다. 

 

그리고 부암동에서의 중요한 미팅.
<카모메 식당> 같은 연대적 커피하우스를 꿈꾸는 내게,
어떻게 살 것인지, 사유할 수 있는 부암동 로망을 품은 내게,
얼떨결에 닥쳐온 어쩌면, 기회.

소셜 커피, 소셜 푸드 연대기, 부암동이 제격이건만, 고민이다.
현실적 여건의 불비함과 리스크를 짊어진 로망을 향한 도전 사이.
저기를 응시하던 이 녀석, 아마 어떤 고민들 틈에서 오도카니 있으려니.

 

겨울, 부암동은 그렇게 모든 것이 흐르는 공간.
나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당신에게 길을 묻고 싶다. 당신에게 걸어가고 싶다. 어느 날인가 이 사랑을...

참고로, 제목 '어느 날인가 이 사랑을'은,
주윤발, 종초홍 주연의 홍콩 영화 <반아틈천애>
(1989, 국내 개봉 제목 <타이거맨>)의 일본 개봉 제목이다.
주성철 기자(《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저자)를 통해 알았다.

그리고, 당신...


아무렇지도 않게 맑은 날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너는 잘못 날아왔다   



 선데이 모닝, 비가 나렸으면 좋겠다.

어쩌면 당신은,
암흑속에서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 그래, 선데이 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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