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 잔을 마신 후 도취 상태에 빠져 있는 이때를 줄여서 "BC(Blissfully Caffeinated, 더 없이 행복할 정도로 카페인에 취한)"라고 부른다. 이때가 되면 거미줄이 걷히고 정상 상태인 행복하고 긍정적인 나의 페르소나로 회망이 돌아온다."

-샤나 맥린 무어

 

이 마을에 축제가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우리마을 음악가가 있다.

 

직업이 뮤지션, 아니다. 말하자면 '그냥 회사원'인 그녀, 음악이 그녀의 일상을 살게 하는 것 같다.

 

노래(보컬)도 곧잘 하고, 오카리나도 곧잘 부른다.

 

그녀가 속한 우리 마을 밴드의 이름은 '어루만지다 음악대'.

 

그들의 음악으로 우리네 마음을 달래도 주고, 어루만지면서 힐링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란다.

 

'어루만지다 음악대'는 어쩌다 꽂히면, 우리 커피하우스에서도 간혹 공연을 한다. 

 

 

그녀는 수시로 좋은 음악이 있으면 들어보라고 CD를 들고 온다.

 

오늘은 아침부터 찾아왔다.

 

 

"아저씨~ 이거 틀어주세요."

 

 

귀한 LP판을 들고 왔다.

 

 

"뭐에요?"

 

 

"마리아 칼라스! 아시죠?"

 

"응, 디바. B.C. 알아요. 비포 마리아칼라스. 칼라스 이전의 오페라와 이후의 오페라. 근데, 오늘 무슨 날이에요?"

 

"히히, 마리아 칼라스가 죽은 날이에요.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35주기란다.

그래서 우리 커피하우스의 오늘의 음악은, 마리아 칼라스.

 

그렇다. 진짜 디바. 세상에 더 없을 목소리.

 

태풍 올라온다고 비도 올락말락. 흐린 날의 가을. 칼라스의 음성은 제격이다.

 

"이 목소리, 도대체 대체할 수가 없어요. 그쵸? 아저씨? 칼라스를 알고 들으면 다른 오페라 가수들의 목소리가 시시해져요."

 

"그래도, 파바로티도 있잖아요."

 

"아, 인정. 파바로티까지는 인정. 그런데 그 이후가 없어요. 칼라스-파바로티-그런데 다음이 없는 게 우리의 비극 같애요. 슬퍼."

 

"우리 예쁜 안젤라 게오르규는 어때요?"

 

"에이, 아저씨. 수컷 티 낸다. 호호. 게오르규가 '제2의 칼라스'라는 소리도 듣고, 칼라스 오마주 앨범도 냈지만, 칼라스한테는 안 돼요. 도저히 넘어설 수가 없어요. 그 목소리, 나쁘진 않지만, 칼라스를 잇기엔 너무 약해."

 

그런 것도 같다. 칼라스를 누가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궁금한 것도 있다.

 

게오르규는 칼라스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까, 여전히 넘고 싶을까?

무언가를 넘어설 수 없다는 '숙명'이 주는 감상은, 좌절일까? 안도일까?

 

나는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는데,

진짜 디바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몸에 전율이 살짝 흐른다.

신이 내린 목소리, 맞다. 인류의 축복이다. 이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제가 오늘의 음악 가져왔으니 어떤 커피 주실래요?"

 

때론 당돌한 그녀의 요구. 거절할 수가 없다.

또한 당연히 그래야 한다. 오늘의 커피는 BC. 마리아 칼라스를 그리는 커피.

 

그리스 이주민의 딸이었던 그녀였던 만큼,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이상한 사랑도 감안한다면,

지중해가 낳은 커피를 내린다.

 

아마, 그녀도 지중해를 그리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오늘 이곳을 찾는 사람들, 마리아 칼라스의 음색을 들으며 지중해를 떠올릴 테니까.

 

"자, 기다리시라. 오늘의 커피는 BC(비포 칼라스)입니다."

 

참, 커피를 내리는 시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나온다.

처음 칼라스를 접했던, <필라델피아>에 삽입된.

AIDS에 대한 편견과 무지를 깨게끔 만들어줬던 아주 좋은 영화.

 

베스트 씬이라 해도 무방한 장면, 칼라스의 'La Mamma Motar(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 의 3막에 나오는 곡.

 

아, 눈물이 찔끔한다. 커피에 이 눈물이 섞이면 무슨 맛일까, 미친 호기심.

몇 번을 다시 보고 또 봐도 눈물이 찔끔거리는 음악과 연기의 미친 앙상블이 떠오른다.

칼라스의 음성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놀라운 장면.

(물론 톰 행크스의 연기 또한 마찬가지!)

 

참, 연세대 주변 서대문 우체국 부근, '마리아 칼라스'라는 카페가 있다.

한때, 물론 오래 전, 나의 소개팅이 있던 그곳.

소개팅 그녀, 예뻤다는 외엔 얼굴은 전혀 기억나질 않고.

연인과 함께라면 참 예쁘고 좋은 곳, 추천!

 

또, 삼성역 부근 '카페M'이라는 대웅제약이 운영하는 와인 바의 지하,

'마리아 칼라스'라는 작은 공연장(홀)이 있다. 음향이 꽤 괜찮다.

역시 연인 혹은 친구와 와인으로 기분 내고 싶다면, 역시 추천!

 

아울러, 서울 모처엔 마리아 칼라스 모텔도 있다. 여긴 안 가봐서 함부로 추천 않겠지만.ㅋ

모텔 룸에는 칼라스의 음악이 흘러나올까, 약간 궁금하긴 하지만.ㅋㅋ

 

아래는, 마리아 칼라스에 대한 기고문.

밤9시의 커피에서 'BC 커피'를 주문하기 전에 예습할 것. :)

 

============

 

천하의 비천한 속물에게 주어진 천상의 목소리

가을, 마리아 칼라스를 듣는 이유

 

 

1950년대 오페라를 주름잡았던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Giuseppe Di Stefano, 2008년 별세). 그의 오페라 단짝은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였다. 두 사람은 1951년 처음 오페라를 함께 했다. 이후 무대에 자주 함께 올랐다. 레코딩 또한 함께였다. 그들의 파트너십은 훌륭했다. 음악적으로도 그랬고, 오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공연 하나하나, 기념비적인 업적이자 전설이었다. EMI에서 남긴 전곡 레코딩은 아직 필적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전성기, 10여 년으로 길지 않았다.

 

그리고 1977년, 마리아 칼라스가 죽었다. 스테파노는 그녀를 이렇게 추억했다. “칼라스는 노래를 잘하는 여자였지, 노래에 딸린 여자는 아니었다. 사랑과 성공의 인생을 살다 그걸 잃고는 세상을 떠난 것이다.”

 

오페라 계, ‘BC(Before Callas)’라는 말(프랑코 제페렐리)을 만들게 한 사람, 칼라스 이전과 이후로 오페라를 나눈 사람, 오페라의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도 사랑이 죽자 결국 무너졌다.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 마리아 칼라스(1923.12.2 ~ 1977.9.16)였다.

 

벨 칸토 오페라를 다시 수확한 디바

 

벨 칸토(Bel canto). 이탈리아어다. 액면은 아름다운(Bel) 노래(canto). ‘아름답게 부르는 창법’을 뜻하기도 한다. 18~19세기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양식이다. 벨 칸토로 노래한다는 것은 극찬에 가깝다. 고도의 훈련으로 갈고 닦은 기교로 전체 성역(聲域)에 걸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든 성악도가 연구와 훈련을 통해 달성하고픈 창법일 것이다. 롯시니의 오페라에서 특히 강조된 창법이기도 하다.

 

여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소프라노가 마리아 칼라스였다. 1858년 롯시니는 벨 칸토 가수의 조건으로 내세운 바 있다. ‘전체 성역에 걸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목소리’와 ‘노력 없이도 화려하게 부를 수 있도록 훈련된 목소리’가 그것이었다. 칼라스의 목소리는 금속성을 띠고 있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타고난 음색과 기교로 벨 칸토 오페라를 되살렸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칼라스만의 것이었다. 탁월한 표현력과 호소력 앞에 벨 칸토 오페라는 대중들과 다시 교합했다. 칼라스였기에 수확 가능한 것이었다.

 

디바(DIVA). 여신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오페라에서 천부적 자질이 뛰어난 소프라노 가수를 뜻하는 이 말에 가장 부합한 사람이라면, 닥치고 칼라스. 일부 팝 가수 등에도 붙여주지만, 자타 공인 칼라스의 아성에 도전하는 것은 언감생심. 그녀 이전, 레나타 테발디가 있었다.

 

칼라스는 사실 그녀의 대역이었다. ‘라스칼라의 여왕’ 테발디, 1950년 <아이다>공연을 앞두고 쓰러졌다. 대타로 나선 무명의 칼라스, 테발디에게 없는 목소리로 청중을 압도했다. 객석은 놀랐고, 오페라 계는 일대 지각변동이 일었다. 1인자의 뒤바뀜. 여태껏 소프라노 역사상 모든 영역을 넘어 메조소프라노 역까지 소화할 수 있는 가수는 오직 칼라스다. 진정한 디바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 그녀의 노래 앞에선 복종을 맹세할 수밖에 없다. 여신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

 

우리의 귀가, 마음이 원하기 때문이다.

 

열등감 덩어리의 뜨거운 속물근성

 

 

허나 칼라스, 디바의 ‘품격’까지 갖추진 않았다. 스캔들 메이커, 트러블 메이커라는 표현, 그녀를 설명하기엔 역부족. 천상의 목소리, 타고났다. 엄청난 노력도 따랐다. 그러나 디바는 모든 것을 갖추진 않았다. 아니, 갖출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생활은 울퉁불퉁했고, 일상은 난폭하고 끊임없이 흔들렸다. 천상의 목소리와 천하의 속물 사이, 칼라스가 있었다.

 

그녀,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20대 중반까지 그녀는 굼뜨고 못생긴 뚱보였다. 심한 근시도 있었다. 가정환경도 불우했다. 소녀가장의 중압감을 일찌감치 짊어졌다. 학교와 가정 모두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디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뚱뚱하고 어수룩했으며 귀엽지도 않았던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미운 오리새끼였다.” 욕심 많은 어머니와는 평생에 걸쳐 공개적인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칼라스, 성공에 대한 근성이 남달랐다. 성악가로 성공가도를 달리자, 그녀는 엄청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30㎏ 이상을 뺐다. 그녀를 보는 세상의 시선이 180도 바뀌었다. 최고의 미인이라는 칭송이 쏟아졌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우아한 백조로의 변신. 외양만 그러했다. 안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세상을 비웃었다. 세상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졌다. 속물들의 세상, 그녀는 스스로를 더욱 그 속에 함몰시켰다. 스스로를 삶의 주인이 아닌 ‘바깥에서 지켜보는 증인’으로 규정한 것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대체로 나빴다. 음악을 빼곤 장점을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진흙탕 싸움을 거듭하며 불화했다. 변덕은 죽 끓듯 심했고, 시기심과 질투도 남달랐다. 탐욕이 지배했고, 잘못은 늘 남 탓이었다. 남을 무시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물론, 그것에 이유도 있고, 사연도 있지만, 칼라스는 자신을 난폭하게 내몰았다. 공연과 세간의 눈초리에 따라 고무줄 늘리듯 행했던 초인적인 다이어트, 은둔하면서 보낸 만년, 홀로 쓸쓸히 세상을 등진 최후 등 그의 생의 가지들은 어떤 오페라보다, 극적이며, 그의 목소리가 방출한 어떤 노래보다 풍성하고 구불구불했다. 성공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속물. 그것이 틀린 표현은 아니다.

 

특히, 사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았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세기의 스캔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세간의 입방아를 몰고 다녔다. 30년 가까운 나이차에도 불구, 사랑에 빠졌던 사업가 메네기니(그는 엄청난 수전노였다!)와의 결혼과 이혼,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와의 삼각관계. 메네기니를 버리고 음악을 멀리하면서까지 오나시스에 빠졌던 칼라스였다. 사랑을 찾아 여자로서 행복을 찾아갔으나, 칼라스의 음악을 잃은 관객은 불행했을지 모르겠다.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오나시스와 재키가 붙었다. 그녀, 우울증에 시달렸다. 목소리에 금이 갔고, 유산을 겪었으며, 자살 기도까지 이어졌다. 예술은 힘을 잃어갔고 여인은 생의 윤기를 잃었다. 다만 어설픈 위안이라면, 오나시스는 죽기 전 “진정한 연인은 칼라스였다”고 말했다는 것? 한편, 진정한 연인이라고 일컬었던 여인을 지키지 못한 남자는 얼마나 지질한가. 디바에게도 사랑이 모든 것이었나 보다. 사랑을 따르다가 음악이 망가졌고, 음악을 다시 찾으려 했지만, 사랑이 죽자 그녀도 죽었다.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 맞다.

 

디바를 둘러싼 스캔들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여신에게 도덕률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 제우스의 못 말리는 바람기를 봐도 말이다. 누구도 그녀를 대신할 수 없다. 전성기,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티켓 전쟁은 물론 교통 전쟁까지 겪어야했다. 칼라스가 파리 관광 중, 가방을 잃어버리자 비행기가 출발을 늦추고 기다렸다는 일화도 그녀의 존재감을 증명한다. 헤밍웨이는 칼라스에게 ‘황금빛 목소리를 가진 태풍’이라는 레떼르를 선사했다.

 

올해 마리아 칼라스의 35주기. 가을에는 그녀의 노래를 수확해도 좋으리라. 칼라스도 없고, 파바로티도 없는 오페라, 허약해졌다. 안젤라 게오르규? 칼라스에게 오마주를 바친들, 칼라스의 아우라엔 역부족이다. 두 사람을 이을 누군가를 아직 발굴하지 못했다.

 

새로운 디바를 수확하고픈 계절, 그게 힘들다면 칼라스(의 노래)를 계속 수확하는 수밖에. <필라델피아>를 꺼내든다. AIDS에 걸린 변호사 앤드류(톰 행크스)와 그의 복직투쟁을 변호하는 조(덴젤 워싱턴)가 교감하는 장면에서 나오던 아리아. 칼라스의 음색이다. ‘La Mamma Motar(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 의 3막에 나오는 곡이다.

 

그래, 지금은 라디오나 TV 등을 통해 5년여를 들었던 훈계조의 쇳소리에 오염된 귀를 깨끗이 씻어야 할 때다. 마리아 칼라스를 권한다.

 

 

(※ 참고 : 『마리아 칼라스 : 내밀한 열정의 고백』(앤 에드워드 지음|김선형 역 / 해냄 펴냄), 위키백과, 브리태니커백과, 필름2.0)

 

[뷰즈 기고]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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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후의 우리 사회의 문학하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예전에 비해서 술을 훨씬 안 먹습니다. 술을 안 마시는 것으로 그 이상의, 혹은 그와 동등한 좋은 일을 한다면 별일 아니지만, 그렇지 않고 술을 안 마신다면 큰일입니다. 밀턴은 서사시를 쓰려면 술 대신에 물을 마시라고 했지만, 서사시를 못 쓰는 나로서는,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을 마신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또 혁명의 시대일수록 나는 문학하는 젊은이들이 술을 더 마시기를 권장합니다.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로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1963. 2)

 

사촌동생 윤수의 결혼(식). 신부는 익히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애가 맞다. 두 사람,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는 얘기다. 사촌형 노릇하느라, 축의금을 받고 식권을 나눠줬다.(노총각 사촌형 둘, 즉 나와 내 동생이 그 노릇을 했다.ㅋ)

 

가만 지켜보니, 한 사람이 돈봉투 뭉텅이로 내놓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른바 '(축의금) 배달부' 노릇을 하는 경우. 한 사람이 그렇게 배달부 노릇 하면서 '독박'을 쓴다. 결혼식에 오지 않은 이들, 그렇게해서라도 면죄부(?)를 받는다. 거칠고 야박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 '나, 돈 냈다, 됐지?'

 

뭐, 그게 나쁘다거나 이런 걸 말하는 것, No! 그렇게라도 결혼식 참석 못 한 걸 미안해 한다면, 그 마음, 갸륵할쏘. 나도 누군가의 결혼식에 갈 때, 오지 못한 녀석들의 축의금 청탁(축의금을 대신 내 달라는)을 꽤 많이 받았다. 나는야, 배달부! 

 

결혼식 참석이든 축의금이든, 그것이 '축하'보다는 '의무' 혹은 '반대급부'처럼 너무 관성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축의금 리스트에 이름과 돈 액수를 쓰는데, 여기 이름을 쓰지 않고 액수를 적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잠시 상상. 각자의 이름을 쓴 봉투도 싸그리 없애버리고 말이지.

 

뭐, 사촌동생한테 쿠사리 먹을 것 같아서 실행에는 못 옮겼다만.ㅋㅋ   

 

6월16일의 결혼식. 내겐 6월16일이 더 중요했다. 사촌동생 부부는 김수영(시인)을 모른다. 그들이 이날을 결혼식 날짜로 잡은 건 그야말로 우연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걸 말해줄 이유도 없고. 그들에게 김수영은 세상에 없는 존재다. 모르기도 하고, 별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원한다면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 한 잔이라도 내려주고 싶었지만, 세상의 여느 정형화된 결혼식에서 그런 건 불가능하다. 웨딩홀의 주어진 스케줄과 프로그램에 따라야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의 슬픈 비극.

 

 

다시 6월16일.

도저한 자유를 향한 열망을 품은 '자유의 시인', 김수영 시인의 44주기.  

요절했지만, 김수영, 지금 여전히 유효한 이름이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그러니까, 이런 날, 값싼 술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도 결혼식에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면, 아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결혼식으로 기억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없는, 이미 박제된 풍경. 그런 풍경, 내 결혼식에서 꿈꾼다. 그날엔, 오직 하객들 당신들만을 위해 특별히 내가 준비한 커피를 내려 드리리다. 물론 그 하객, 날 안다고 될 순 없다. 특별히 초청된 소수 정예의 사람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축의금 같은 건 갖고 오지 마시라. 나, 속물이라서 100만원 정도 갖고 오면 넙죽 받을 의향은 있지만.ㅋ

 

원로시인 김시철의 산문집 《격랑과 낭만》에 의하면, 김수영.

그는 詩와 커피를 맞바꾸던 시인이었다. 고로, 커피는 詩와 동격이다!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詩를 읊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김수영도 명동다방촌 죽돌이였다. 

'명동멋쟁이'라 불린 시인의 단골 다방은 '휘가로'.

해방과 함께 다방들, 명동 언저리에 하나둘씩 문을 열었다. 다방은 해방의 감격이 흘러넘치는 공간이었다. 예술가들이 가만 있을 턱이 있나. 식민지 시대의 상처는 이제 안녕. 부흥이 필요했다. 새로운 기운을 찾고자 하는 예술적 포스가 흘러넘치는 공간, 그것이 다방이었다. (휘가로를 찾아보시라!)

 

 

 

 

김수영, 박인환, 김규동 시인이 그린 소공동 플라워다방의 모습도 엿보자.

 

 

다방은 예술가만의 것이 아니었다. 다목적 종합문화생활공간이었다.

룸펜들의 무위도식처였고, 실업자들이 죽치는 온상이었다.
룸펜들, 커피 한 잔에 네댓시간을 죽치고 앉아보냈다. 

룸펜은 다방을 사랑했고, 다방은 그런 룸펜을 품었다. 다방은 해방 공간이었다. 
다방, 쑥쑥 생겼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정당들에 빗대어 이들을 '커피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문화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전후 환경.

다방은 각종 만남의 장소로 물론이요, 전시회, 출판기념회, 영화상영회, 문학낭독회, 독립투사추모회, 동창회, 송별회 등 온갖 모임을 수용했다. 지금 카페를 문화공간으로 꾸미고자 하는 시도는 그러니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커피하우스, 카페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됐었다.

 

헌데, 밥 사먹을 돈도 없었던 가난한 시절, 예술가라고 자처하던 이들은 명동으로 몰려들어 하루종일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대고 술을 퍼부어댔을까?

 

'명동백작'이라 불렸던 소설가 이봉구, 그것을 말해준다.

"그래, 그들은 너무도 가난한 나라에 그마저 예술가가 할 일도 없던 시절에 태어난 것이다. 할 일을 찾아 예술인들이 많은 명동으로 몰려든 것은 당연했고, 그곳에서 시를 쓰고 원고를 청탁받고 원고료를 받으러 돌아 다닌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데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바로 술이었다."

 

참고로, 김수영 시인이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꼽은 열 개는,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 커피를 내렸다. 

커피향이 죽인다는 어머니의 탄성이 흘러나온다. 

당신들을 위한 것이었고, 김수영과 사촌동생 부부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라는 속물을 위한 커피 한 잔. 

 

커피를 마시는 시간, <이 거룩한 속물들>을 펴고, 다시 읽는다.

좋다. 이맛이 커피다. 이맛이 김수영이다. 이맛이 삶이다. 

나는 그렇게, 밤9시의 커피다.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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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과거에 어떠했으며 미래가 어떨 것이란 개소리는 그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 그것이 사는 것이다.

 

변영주 감독, 존 레논의 'GOD'를 꺼내며 그것을 상기시킨다.

오롯이 믿을 것은 '지금'. 변절이니 뭐니 꺼낼 필요도 없겠다.

 

나는 지금을 산다. 현재를 산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변 감독의 이 말이 나를 더욱 자극시킨다.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딛고 서있는 공간에 대해 증명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40대라면 지금까지 해온 무엇보다 해야 할 무엇이 더 많기 때문이다."
 

 

[별별시선] 이제 나는 '지금'을 신뢰할 뿐이다.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205212110015&code=990100

 

...그러나 이젠 정말 못 참겠다. 나는 요즘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모습을 보며 이제 나의 세대 즉 1980년대 세대에 대한 존경을 버리려고 한다. 그토록 비겁했던 나의, 아직까지 남아있는 부채와 죄의식은 고스란히 당신들이 아니라 세상의 해고된 모든 분들과 20대에게 드리려고 한다. 정확하게 말해보자. 지금의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모습은 소위 엔엘(NL)과 피디(PD)의 사상투쟁이 아니다. 정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답게 애쓰며 살려는 태도의 문제다. 민주주의의 문제다. 그렇다. 우리가 적어도 간직해야 할 최소한의 것을 당신들은 버렸다.

과거의 투쟁경력이, 당신의 청춘이 차가운 감옥에서 소모되던 그 역사가, 당신의 희생이, 한낱 중세 교황이 날려주던 면죄부처럼 현재의 모든 것을 덮어주고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이라면 당신은 이미 당신의 청춘이 그토록 경멸하던 그 괴물이 된 것이다. 최소한의 가치도 증발된 당신에겐 더 이상 자유와 권리를 말할 자격조차 박탈되었다. 그 치욕스러운 부정과 반민주적인 폭력사태를 목도한 그날 나는 하염없이 존 레넌의 ‘God’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존 레넌 스스로가 믿고 신뢰하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비틀스마저도 믿지 않는다는 그의 통렬한 자기고백에 감정이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 역시 현재를 믿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신뢰는 어느 순간 증명서처럼 발급되어져 유통기한 없이 인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의 결기 같은 선택 속에서 시험받고 선언되어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적어도 우리의 후배세대들을 걱정하는 심장이 있다면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딛고 서있는 공간에 대해 증명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40대라면 지금까지 해온 무엇보다 해야 할 무엇이 더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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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역보다 미용!

 

이발을 하다가, 헤어디자이너가 모발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나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보니, 우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미용학과 출신인데, 그 정도는 대학에서 다 알려준다면서 싱긋 웃는다.  

 

순간, 부러웠다. 그런 지식은 누군가에 도움이 된다. 

 

아울러 부끄러웠다. 내 전공과 FTA가 자연스레 맞물리면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무역을 전공했다(고 하나, 그때 수집한 지식은 쓰레기에 가깝다!). FTA 체결의 장본인 무역을 전공한 사람인 것만은 아니나, 내가 무역과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자유무역은 온통 선(善)이요, 미덕이었다. FTA는 자연 (강대국 혹은 선진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엇이었다. 쉬파. 그땐 진짜 그런 줄 알았다. 아마 시험에서도 나는 그렇게 주입받은 대로 지껄였을 것이다.

 

무역보다 미용이 낫다고 했다.

무역을 배운 자들은 FTA로 세상을 망가트리지만, 미용을 배운 당신 같은 디자이너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니까. 누가 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지 보라고.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디자이너, 무척 고마워한다.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 처음이라면서. 신분에 귀천이 없다고 배웠지만, 자신은 미용이 정말로 좋아서 선택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데, 대개의 사람들 시선은 헤어 디자이너를 천대하거나 우습게 본다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쥐뿔도 몰라서, 그렇다고 해줬다.

FTA로 대다수 사람들을 수렁에 몰아넣는 것보다 자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더 낫다.

무역은 사람을 피폐하고 황폐하게 만드나(돈에 눈 멀고, 돈에 쪼들리고),

미용은 사람을 아름답고 예쁘게 만든다.  

 

그리고 커피 만드는 노동자인 나를 생각했다.

무역을 버렸지만, 나는 타인을 기분좋게 만드는 커피향을 선사하는 사람이 됐다.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무역을 완전히 버리진 않았구나. 공정무역!

 

아, 나는 헤어 디자이너 한 명을 마음으로 울리고야 말았으니, 나쁜 남자로다! 캬캬.  

 

 

2. 장하준

 

장하준 교수(+정승일 교수, 이종태 기자)의 기자간담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출간기념)를 정리하다가, 눈이 다시 멈춘 지점. 그는 그날, 젊은이들에게 사과를 했었다.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했다.

 

현장에서도 그것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정리하면서도 그랬다. 

 

그의 주장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 장 교수는 '염치'를 아는 '진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기성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염치는 없고, 위로랍시고 멘토질만 해댄다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이, 아직 니 시계는 아침 7시 몇 분에 불과하니까, 휘휘 에둘러 죽도록 노력하라는 멘토질 같은 것.

 

공허하다.

멘토질보다 더 앞서 필요한 것은 다음 세대를 향한 사과여야 한다. 

이따구 세상을 만든 세대로서 이런 세상에서 악전고투하도록 헛발질을 해서 미안하다고 진정한 사과가 우선이어야 했다.  

 

장하준 교수는 미안함 때문에라도 복지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짜 어른은 저런 염치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구나.

 

그런데, 나는 네 가지 없는 놈이니까, 어른이 되긴 글렀다. 허허. (나는 사과 안 해!ㅎㅎ)

주야장천, 염치 모르는 꼰대들을 향해 비수나 휘휘 날려야겠다. 

이런 허~접 같은 것들.(역시 김꽃두레 톤으로~)   

 

문제는 사과야, 이 바보야!

 

참고로,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장 교수의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미안하지. 40~50대의 많은 사람들은 잘한 것도 없는데, 좋은 시절에 태어나 적당히 공부하고 직장 얻어서 잘 사는데, 지금은 온갖 것을 다해도 취직이 어렵다. 어른들은 꿈이 없어서라고, 노력을 안 한다고 타박만 하고. 젊은 세대에게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온갖 노력을 해도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우리 세대는 노력하면 100%는 아니지만 많은 보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복지 이야기도 하는 거다. 그 문제에 대해선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문제는 청년당은 계속 당원들이 탈당을 해야 하는데, 그런 당이 가능할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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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넘어 혁명을 꾀한 사진 예술가, 티나 모도티

 

멕시코의 예술가 프리다 칼로를 다룬 영화, <프리다>. 섹시한 배우로 각인됐던 셀마 헤이엑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프리다 칼로를 표현함으로써 화제가 됐었다. 프리다에 가렸지만 또 하나의 인물이 있었다. 프리다의 연인, 디에고 리베라가 아니다. 극중에서 프리다와 춤을 췄던 여자. 자유분방하면서 혁명을 꿈꾸는 사진가로, 애슐리 주드가 연기했던 티나 모도티.

 

 

나는 <프리다>처럼 <티나>라는 영화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명가이자 사진작가, 그리고 사랑의 화신이었던 티나 모도티를 다룬. <프리다>가 프리다 칼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듯, 티나를 다룬 영화는 그녀를 되짚어보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되짚어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혁명. 닥치고, 혁명! 


티나 모도티, 독립적이면서 사랑을 갈망했던 여인


에드워드, 부드럽게 당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봅니다. 오늘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당신을 느낄 수 있게. 여기 홀로 앉아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오. 에드워드, 당신이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는지! 아침까지 당신의 마지막 편지를 베고 누워 있었답니다.

그런데 날 깨운 게 그것의 희미한 향기였을까요? 아니면 거기서 발산되는 듯한 당신과 내 욕망의 혼? 그래요. 어떻게든 달성하고픈 욕망에 취하면서도 그걸 두려워하고 미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이겠지요.

(《티나 모도티》, p.86, 티나 모도티가 에드워드 웨스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티나 모도티(Tina Modotti, 1896.8.16~1942.1.5)는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을 만나 사진에 입문했다. 1919년이었다. 앞서 그녀는 시인이자 화가였던 로보와 사랑했었다. 로보를 통해 많은 예술가를 만나 예술과 사회, 인문을 습득했던 그녀였다. 멕시코 문화를 보길 원했던 로보가 현지에서 천연두로 사망하고, 그녀는 웨스턴의 모델이자 조수가 됐다. 이어, 그의 뮤즈이자 아내가 됐으며 티나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두 사람은 사진관을 운영했고, 멕시코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두 사람은 혁명 후기 멕시코 문화계의 유명 인사였다. 프리다와 디에고를 만나게 해준 이도 티나였다. 당시 프리다는 티나를 숭배했던 소녀였다. 문화계 모임에서 티나는 사랑의 가교 역할을 했다. 허나 웨스턴은 결국 그녀를 떠났다. 자신의 아들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에드워드가 떠난 뒤, 멕시코에서 사진의 길을 걷고 있던 1928년. 그녀는 쿠바출신의 망명정치가 훌리오 안토니오 멜라를 만난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연인이 된다. 티나는 특히 멜라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그녀는 사랑이 인도한 길을 자연스레 따랐다. 로보가 알려준 예술, 에드워드가 보여준 사진, 안토니오가 제시한 혁명. 그 모든 것이 티나의 것이 됐다. 티나는 사랑 덕분에 존재했던 것일까. 티나를 사랑을 자기 것으로 흡수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듬해, 안토니오는 정적들로부터 암살당했다. 티나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도 악의적이었다. 화려하고 이지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을 향한 세상의 질투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고정적인 이미지에 저항해서 싸우고 싶었다. 한 번은 “미국에선 美가 모든 것의 기준”이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안토니오의 저격은 그녀에게 팜 파탈의 이미지를 덧씌웠다. 이미지의 저주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혁명을 향한 전진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


사랑과 혁명은 그래서 통한다. 사랑이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티나 모도티, 운명과 싸워 혁명을 꾀했던 여인

 


티나는 언제나 주어진 운명에 싸워야했다. 그녀의 외모에서 덧씌워진 부당한 이미지도 그랬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다. 이탈리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열여섯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재봉부터 시작했다. 연극·영화에도 몸을 담았고, 사랑을 통해 예술가?작가들과 교류했다. 주어진 대로만 있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예술이 혁명을 도울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티나의 예술세계에 혁명은 중요한 오브제였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가난한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경험은, 멕시코에서 그녀의 예술세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의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능력이 티나의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동고(同苦)를 도덕적 감정의 핵심으로 꼽았는데, 티나의 작품은 그런 도덕적 감정을 동반한다. 다큐멘터리적 요소 없이도 클로즈업해서 찍은 ‘손’시리즈. 그것은 예술과 혁명을 동시에 담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멕시코에 거주한 1923~1930년에 찍은 250여 컷에 잘 형상화돼 있다. 멕시코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시기, 그녀는 그런 시대를 온몸으로 흡수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에 1929년 12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첫 개인전. 노동자들을 위한 관람시간을 특별 배려했고, 마지막에는 ‘멕시코 최초의 혁명적 사진전’이라는 연설을 진행했다.


그러나 그녀의 혁명이 계속 꽃피진 못했다. 전시회를 마치고 6주 후 돌아온 것은 멕시코 정부의 추방 명령이었다. 그녀가 속한 사회주의 단체에서 대통령 암살을 꾀했다는 혐의였다. 다행히 혐의를 벗었지만 그녀는 멕시코를 떠났다.

 

사진에 우호적이었던 독일이 다음 행선지였다. 케테 콜비츠, 게오르그 그로츠 등과 교류했고, 그들 모임의 회원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나치가 있는 독일은 그녀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뭣보다 그녀가 사용하는 그라플렉스 카메라의 필름을 구하기 힘들었다. 독일에선 라이카 카메라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이어 그녀가 찾은 곳은 모스크바였다. 그녀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로버트 카파, 헤밍웨이 등과 예술적 교류를 나눴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자 비토리오 비달의 혁명동지로 활동했다. 러시아의 콜론타이,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등과 정치적 혁명 동지애도 나눴다.

 

혁명은 여전히 그녀의 오브제였다. 스탈린의 비밀경찰로도 활동했지만, 권력투쟁과 스탈린의 편집증에 질린 그녀는 소련을 떠나 스페인 내전 지원을 나섰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으나 그녀는 사진을 접었다. 자신의 혁명적 이상과 배치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번역과 공산주의자 활동에 전념하다가, 1942년 택시 안에서 숨을 거뒀다. 심장마비였다. 마흔 다섯. 이른 죽음이었다.

 


티나 모도티. 재단사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사진작가의 모델로, 모델에서 사진가로, 사진으로 혁명을 담는 투사로, 공산주의 혁명을 전파하는 혁명가로 끊임없이 변신하며 세상을 누빈 여인. 그녀에게 사진은 시대를 기록하는 도구였다. 사회주의의 이상과 시대정신을 내용으로 간결하고 아름다운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녀의 작품은 사후 더욱 큰 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1991년의 소더비 경매. 그녀의 작품 <장미>는 16만5000달러에 팔렸다.


시절은 점점 더 노동자에게 각박해진다. 99%의 피눈물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예술과 혁명의 접점을 본 티나 모도티를 다시 꺼내는 이유다.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세기가 평가절하한 대표적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녀에게서, 혁명을 되짚어보자. 행동하자. 점령하자.


사랑과 혁명은, 각자의 다른 이름이다.


(※참고자료 : 《티나 모도티》(마거릿 훅스 지음/윤길순 옮김|해냄 펴냄), 위키백과, 한겨레, 티나 모도티 팬사이트(http://cinemarx.cafe24.com/tina), 위민넷)

 

 

[문화예술잡지 뷰즈 21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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