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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사회 - [할인행사]
피터 위어 감독, 에단 호크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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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를 통해 그 소식을 듣자마자 심장이 덜커덕 내려 앉았습니다. 따가운 여름 햇살이 심장을 바짝 쫄이는 그런 느낌. 쫄깃해진 심장을 부여잡고 할 말을 잠시 잃었습니다. 그리고 "아..."라고 터져나오는 장탄식. 8월 12일, 어느 여름날 불현듯 불시착한 비보였습니다.  


캡틴이 떠났습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다시 한 번 그 말을 나지막이 내뱉아 봅니다. 


젠장젠장젠장. 사실 쉽게 수긍이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추정이라니. 그는 캡틴이었는데 말입니다. 캡틴이 스스로 죽은 시인이 되는 건, 쉬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거부합니다. 


로빈 윌리엄스. 명배우. 더 이상의 수식어가 그닥 필요하지 않는 그입니다. 


영원히 내 머리속에서 잊히지 못할 장면으로 각인된 그입니다. 그가 교실을 떠나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 되고야 맙니다. 눈물 그렁그렁하며 시인(학생)들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가득한 어떤 애정. 


붙잡고 싶었으나 잡을 수 없어 떠나 보내야 했던 키팅 선생처럼, 그 역시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 교실에서 책상 위로 올라설까 말까 우물쭈물하는 학생이 된 기분이랄까요. 

그러다 마침내 책상 위로 올라섭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벌떡 영화관에서 일어났던 고등학생 2학년 소년을 기억합니다. 울먹이며,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생각도 않고 떠나는 캡틴을 함께 배웅하던 그 소년. 한국의 좆 같은 교육 현실에 그저 묵묵하게 침잠해 있던 소년에게 그것은 하나의 계몽이자 계시였습니다. 캡틴은 '시적 정의'를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소년에게 선생의 바람직한 기준은 키팅 선생으로 세팅되었습니다. 물론 전과 후로 그는 키팅 선생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운이 없었던 것이겠죠. 드물게라도 한국에도 키팅 선생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고딩 시절 잊을 수 없는 잔상을 남긴, 내 마음속 캡틴 키팅 선생을 그렇게 떠나 보냅니다. 안녕, 키팅 선생님. 땡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키팅 선생의 모습을 보니 왜 그리 짠한지요. 잊지 못할 장면,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그 마지막 장면.  


그는 따지고 보면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피터팬으로 살고 있었던 것 같아요. 키팅 선생이 남긴 그 인장이라는 것이 워낙 강렬했었거든요. 더구나 그 사춘기 시절, 오죽했을까요. 늙지도 않고 교실을 떠났던 그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던 우리 로빈 아저씨. 


<후크>에서 피터팬(이 늙은 모습)으로 등장했던 그를 기억합니다. 아마 로빈 아저씨는 이제 지구가 아닌 네버랜드에서 영원히 살겠지요. 어쩌면 가야 할 곳으로 간 셈인가요.ㅠㅠ 

좋아하는 이들과 로빈 윌리엄스 영화를 함께 보기로 했습니다. 

내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른 사람들이 <굿모닝 베트남> <굿 윌 헌팅> <패치 아담스> <후크> <패치 아담스> 등 각자 보유하고 있는 로빈 윌리엄스 가지고 와서 함께 그를 그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무엇보다 캡틴을 위해 

'천국보다 아름다운' 커피를 볶아 제공할 예정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캡틴을 그리며, 책상에 올라서게 될까요. 그리곤 외치게 될까요. 


오 캡틴 마이 캡틴.

   

'천국보다 아름다운' 곳으로 가셨기를 바랍니다. 그곳이 네버랜드여도 좋고, 산 시인의 사회여도 좋습니다. 그곳에서도 <굿모닝 베트남>에서처럼 흥겹고 신나는 방송을 하면 좋겠습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재단이 캡틴의 죽음을 독특하게 애도했네요. 공식 SNS에, "지니, 당신은 자유요(Genie, you're free)." 캡틴은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 램프의 요정 지니의 목소리 연기를 했었고, 이 말은 알라딘이 지니에게 건넸던 말이었죠. 


하긴,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캡틴은 그렇게 자유를 이야기했었죠. 진짜 자유. 내가 찾는 자유.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 길을 가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뭐라 비웃든 간에."


고맙습니다. 캡틴 덕분에 웃고 즐겁고 행복했었습니다. 내 청춘의 일부분은 캡틴과 함께였다는 사실, 잊지 못할 겁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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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아요] 마을감수성을 자라게 하는 영화 ①
쿠바의 연인
정호현, 오리엘비스 / 이오스엔터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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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영화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영화가 그러할 수는 없죠. 체제 순응과 체제 강요(협조)적인 영화 또한 난무하니까요. 그러니, 영화를 보면서도 우리는 세상을 향한 감각의 촉수를 벼려야 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기.
여기, 함께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역시 권하는 것,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이 영화들, 마을과 시민을 잇는 '레가토(음과 음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을공동체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요? 아뇨, 그렇지 않을 겁니다. 모든 것은 차곡차곡 쌓여서 발현되는 법이거든요.

당신과 함께 마을감수성을 자랄 수 있게 하는 이 영화들, 보고 싶습니다.

 

<쿠바의 연인>

경쟁찬양지대로서 치열하고 지랄 같은 한국살이에 지친 여자(정호현 감독), 쿠바로 여행을 떠난다. 춤과 노래 그리고 여유, 이곳은 한국과 다른 낭만으로 다가온다. 금상첨화, 연하의 잘 생긴 쿠바남자 오리엘비스와 사랑에 풍덩! 두 사람, 결혼에 이른다. 지극히 한국적인 기준으로 적(성국)과의 동침이다!

이 영화, 뭣보다 쿠바의 마을풍경이 인상적이다. 그 남자 집에서 정류장까지 걸어서 5분인데, 30분이 걸리기 일쑤다. 이웃들과 일일이 손잡고 이야기하느라 그렇다. 정겹고 살갑다. 그런 마을살이에 젖은 오리엘비스의 말, 인상적이다. "돈보다도 삶을 사랑한다." 당연한 말인데도, 이 말이 생경한 이유? 따로 없다. 당신이나 나나 한국에 살기 때문이다. 맞다. 우린 지옥에 산다. 지옥에서도 찰나처럼 찾아오는 행복을 모르핀 삼아 우리는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해피해피 브레드>

마을카페를 꿈꾼다면, 이 영화가 주는 환상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훗카이도 츠키우라 마을의 카페 마니. 미치도록 눈이 시린 도야코 호수를 배경으로 따끈따끈 맛있는 빵과 향긋한 커피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카페 마니의 풍경이다. 마을카페가 어떻게 힐링캠프가 되는지 엿보고 싶다면, 이곳을 찾아라.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는 잔잔하고 소박한 일상에서도 누군가는 치유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가끔은 카페 마니를 찾아, 지랄 같은 세상사 모든 것을 놓고 커피와 빵의 향연에 심취하고 싶다. 홀수도 좋고, 커플도 좋다.

 

 

 

<일 포스티노>

마리오는 망명 온 파블로 네루다의 전용 우편배달부(일 포스티노)다. 여자 마음을 얻기 위해 詩를 알고 싶던 그, 네루다를 통해 메타포(은유)는 물론 세상이 詩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에 시상을 싣는다. 베아트리체와의 사랑도 함께다. 詩를 통해, 마리오를 통해 드러나는 세상, 감동적이다. 영화의 제목이 ‘일 포에타(시인)’가 아닌 ‘일 포스티노(우편배달부)’인 이유,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사랑하는 당신의 일 포스티노가 되고 싶다. 메타포다. 마을의 일 포스티노, 매력적이다.

 


<카모메 식당>

이 영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대와 관계의 영화다. 핀란드의 한 마을, 커피하우스를 연 사치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피붙이는 아니지만, 정붙이로서의 연대 혹은 대안가족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들은 끈적끈적하지 않다. 뭣보다 그들, 생이 외로운 것임을 알고, 그것을 피하려 하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혼자임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의지하는 것도 민폐가 아니다. 그들이 마을이다. 식당(카페)이 곧 마을인 것, 식당에서 마을을 엿볼 수 있는 것, 행운이자 축복이다. 커피를 맛있게 하는 주문을 알고 싶다면, 영화를 열어볼 일이다. 참고로, 카모메는 '갈매기'라는 뜻이다.

 

 

[함께 보아요] 마을감수성을 자라게 하는 영화 ①
[함께 읽어요] 마을감수성을 자라게 하는 책 ①
[함께 읽어요] 마을감수성을 자라게 하는 책 ②

 

(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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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함께 보아요] 마을감수성을 자라게 하는 영화 ①
    from 맺고,따고,볶고,내리고,느끼고,사랑하라! 2013-02-16 23:23 
    예전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영화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영화가 그러할 수는 없죠. 체제 순응과 체제 강요(협조)적인 영화 또한 난무하니까요. 그러니, 영화를 보면서도 우리는 세상을 향한 감각의 촉수를 벼려야 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기.여기, 함께 보고 싶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역시 권하는 것, 아닙니다. 제가 아는 한 이 영화들, 마을과 시민을 잇는 '레가토(음과 음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
 
 
saint236 2013-02-1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 포스티노 우연히 본 영화이지만 재미있게 봤던 영화입니다.

책을품은삶 2013-02-24 11:1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제겐 영원히 잊지 못할 영화 중 한 편이에요. ^^
 
원 데이 - 개정판
데이비드 니콜스 지음, 박유안 옮김 / 리즈앤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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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쌓이고 쌓인 것. 그것도 차곡차곡. 오늘에서야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한다.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

 
나의 (영화) 여신으로 등극하시다. '여신남발자'라는 놀림에도 꿋꿋하게!
 
줄리아 로버츠는 이제 만신전에 올려놓고, 그 자리, 이젠 앤 해서웨이의 것이다.



<원 데이(One Day)>, 확인 사살을 했다. <프린세스 다이어리>가 아니었다. <브로크백 마운틴>부터 내 마음을 두드리던 앤이었다.

 
앤, 나를 홀린 여신.
<원 데이>. 나를 울려버린 영화. 다시 언급할 기회를 갖도록 하자.


오늘, 앤을 만나서 나는 행복하였도다. 오늘 이런저런 일들을 만나던 와중에도, 앤과 엠마가 내게로 왔다. 7월15일, 성 스위딘의 날. 그 어느해에는 그날, <원 데이>를 돌려볼 것 같다. 그들의 Kiss를 눈물겹게 바라볼 것 같다.

 

 
그리고 그것,

당신과 함께라면 더 좋겠다.

  
이렇게,

당신 손을 잡고,
 
골목길을 달릴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이 있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랑해. 당신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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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일본영화) - 할인행사
쿠보츠카 요스케 출연 / 스타맥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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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 허구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강력한 현실이고,

이 허구와 현실을 이어주는 것은 날조와 왜곡을 통해 만들어진 집단적 기억이며, 이 기억이 만드는 집단적 정체감이 개인을 개인으로 정립시킨다.

현실적 실체가 된 상상의 공동체가 억압과 폐쇄의 위험을 벗어버리려면 ‘열린 공동체’로 진화해야 한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민족적․문화적 소수파(이방인)의 존재다.


- 고자카이 도시아키의 <민족은 없다> 중에서 -


뜨겁다. 계절도 그렇지만, 올림픽 때문이다. 공식적인 국가대항전. 자본이 숨은 주인공이지만, 어쨌든 나라를 걸고 싸운다. 이기거나 지거나 상관 없이 출전만으로도 영광이라는 올림픽 공식 멘트는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이다. 이긴 자만이 모든 것을 가진다. 져도, "괜찮아"라고 위로해주지만, 기억은 거기까지. 이긴 자만 기억하는 세상은 여전하고, 꼭 이겨야만 하는 그런 나라, 있다! 


후끈하다. 한국과 일본. 식민과 피식민의 기억은 영원할 마당. 쥐새끼는 느닷없이 바다를 건너 독도에 발을 디뎠다. 그야말로 뜬금포. 평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로, 한일 양국 시끌시끌하다. 축구는 그런 상황에서 어떤 정점이었다. 동메달을 놓고 벌어진 3·4위전. 한국이 이겼다. 그것도 2대0. 잘 했고, 이겼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임을 확인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는 '공식적' 멘트도 막상 경기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고스란히 나는 태극전사였다. 한국팀의 몸짓 하나하나에 내 마음이 쏠렸다. 울트라 닛뽄은 그냥 들러리였다. 이겨서 약간 미안하긴 했지만, 그것도 승리의 기쁨 앞에선 그저 거품에 불과했다. 


살짝 궁금했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이었다면 달랐겠지? 울화통이 터져서 죽었겠지? 독도에서 찍찍 거리는 쥐새끼, 당장 쥐어패고 싶었겠지? 일본에서 태어나서 조용한 외교라는 명분아래 일본에 슬쩍 마음을 두던 평소와 달리, 뭔 뻘짓을 한 거야? 흠, 그렇다면 재일교포라면 어떤 심정일까? 재일교포도 물론 살아온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 그 층위가 다르겠지만. 스기하라에게 묻고 싶었다. 


스기하라? 뉴규? 의 주인공이다. 


아참, 이 글은 나(스기하라)의 나레이션으로 전개된다.


이건 나의 연애이야기다


나? 태어날 때 선택 따윈 못했다. 당연하다. ‘수십억분의 1’의 경쟁률을 힘겹게 뚫고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처지잖아. 어쭈구리,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족쇄가 나를 묶고 있었다. 가족의 일원, 국가의 구성원, 민족의 자손. 오호, 이건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닌데, 그렇게 주어졌다. 


어쨌거나, 난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코리안저패니즈.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만 살았어. 일본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지. 그런데 남들은 나를 “재일한국인”이라고 불러. 이런, 이건 누가 붙인 이름이야? 이봐, 사자는 자신을 사자라고 안 불러. 너희가 멋대로 붙인 이름이잖아. 난 나라구! 왜 날 너희 맘대로 만든 틀에 묶어 놓구 평가하나? 그렇게 이름을 붙여 차별하지 않으면 불안하지? 차이를 차별로 내모는 또라이들.


아차, 좀 오바했군. 이건 나의 연애 이야기였지. 잊어버려...^^;


나 좀 묶어 두지 말고 내버려 둘래? 


“민족, 조국, 국가, 단일, 애국, 통일, 동포, 친선

지배, 억압, 예속, 침략, 편견, 차별 … 제기랄

배타, 배척, 선민, 혈족, 순수, 혈통, 단결 … 지.겨.워.”


아빠는 이런 족쇄에서 나를 풀어주려고 국적을 바꿨다. 엄마와 하와이를 간다는 핑계로 대고. 하지만 나는 안다. 아빠는 내게 구시대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다. 재일교포니, 일본인이니, 엿이나 먹을 짓이다. 이 넓은 세상. 국경선 따위가 나의 행로를 제어할 게 무어냐고. 


그래서 닭들이나 할 짓인 ‘슈퍼그레이트치킨레이스’는 그런 나를 해방시킨다. 나는 원 밖의 강한 적들과 싸우면 된다. 나를 둘러싼 이 허구의 세상과도 마찬가지. 다른 건 없다.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움, 나는 즐긴다. 


사쿠라이(나의 여자친구지)! 그런데 넌 왜 그래? 내 피에 대한 진실한 고백을 그렇게 뭉개버리다니.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몸이 안 따라온다고? 한국인이나 중국인의 피는 더럽다고? 이런,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론데 나는 ‘재일한국인’이 되는 순간, 왜 피가 더러워지는 거지? 웃기는군. 너처럼 자유분방해 뵈는 애가. 그것도 아빠 얘기라며 그걸 쉽게 믿어버리는 것도 우스워.


아, 이건 나의 연애이야기였지. 너와 직접 연관된 이야기인데 너를 이렇게 묘사하면 안되지...^^; 어쨌든, 넌 예뻐서 좋아. 팬티가 보여도 쪽 팔리는지 모르는 네가 좋아. 내가 어느 국적의 사람이건, 어느 민족이건, 정말 상관 않는 거지? 그냥 나라는 인간 자체를 좋아하는 거지? ‘그냥’ 친구가 ‘진짜’ 친구라잖아, 하하.


살아있다, 사랑한다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이야기, 너무 무겁게 보인다고? 걱정마. 이건 발랄하고 경쾌한 사랑이야기니까. 그냥 내 연애이야기야. 살아있어서 사랑하고, 사랑해서 즐겁고. 그래, 사랑 그놈, 부질없는 짓인줄 알지만, 그래도 어떡해. 내겐 사랑이 우선이고 최고야. 친구 정일의 죽음도 사쿠라이, 널 향한 마음을 멈추게 할 순 없어. 민족, 국가, 그런 건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물론 국경이 있고, 핏줄에 대한 집착이 있는 한 국가나 민족의 구분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잘 알아. 그렇지만 나 호들갑 같은 거 떨지 않아. 한국 국적이라고, 단일민족 한핏줄이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내 나라 내 동포 내 민족이라고 감싸 안을 생각은 전혀 없어. 


그렇지 않아? 5·16 군사쿠데타를 불가피한 일이라고 빡빡 우기고, 공천을 현금으로 장사하는 족속들과 내가 한 동포라는 테두리에 들어갈 이유? 없잖아! 독재자의 딸이자 독재자 DNA를 그대로 물려 받은 자를 향해 거짓 충성을 맹세하는 권력 불나방들과 같은 민족으로 취급 받는 것도 기분 나빠. 완전 나빠! 


아, 또 깜빡했군. 이건 내 연애이야기일 뿐이야. 넘어가지...ㅋㅋ 정치적 발언? 그런 건 없는 걸로~ 내가 뭔 정치이야기 같은 걸 하겠어, 킁킁. 


그래, 불만있냐?


뭐, 하나가 돼야만 직성이 풀리고 단결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배알 꼴리겠지만, 별 수 있나? 난 일본에 사는 재일한국인이야. 당신들에게 동질감이나 민족 감정을 느껴야할 이유 따윈 없어! 


‘애국’의 이름으로 하나될 것도 없고 ‘민족’을 기치로 연대해야 할 의무도 없지. 그 광란의 한-일전. 난 어느 편도 아니야. 내가 응원하고 싶은 쪽을 응원할 뿐이야. 어느 편인가 묻는 당신에게, 조까라 마이싱~! 


아, 내 연애이야기는 이걸로 끝. 난 사랑에 빠졌고 너무 아프다.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 내가 지껄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래. 불만있는 자, 나에게 돌을 던져라. 난 당신들에 의해 내 삶의 선택과 주체성을 휘둘리고 싶진 않다! 다 맞아주마. 다 뎀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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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후... - 할인행사
대니 보일 감독, 나오미 해리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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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잔혹사의 발자취

 

이성(理性)을 동력으로 삼았던 근대는 인류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을 약속했다. 이성중심주의의 굳건한 구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근대성의 발현, 세계의 주체를 신에게서 인간으로 옮겼다. 즉, 패러다임의 전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식민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근대성은 물질적 풍요까지 등에 업었다. 이성의 힘은 더욱 탄탄해졌다.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찬란한 문명의 건설을 청사진으로 내세울만 했다. 그리고 인간도 변화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근대이성, 어느 순간 도전에 직면했다. 그동안 유래없이 쌓아왔던 물질적 풍요를 단숨에 허물어뜨릴 뿐 아니라 이성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광기 혹은 야만이 출현했다. 계량화와 각종 수식과 이론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자랑하던 자본주의는 대공황의 물살에 휩쓸린다.

 

 

정치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했다. 인류의 생존과 이성의 힘은, 전방위로 위협당한다. 만신전에 오르길 그토록 열망하던, 혹은 장담했던 인류는 그렇게 나락을 경험했다. 이성에 대한 근거 없는 맹신이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그토록 믿고 싶었던 근대이성의 총체적 결과물은 인류문명의 허구성에 대한 직시였다. 우리(인간)는 만물의 영장인가, 지구라는 혹성의 지배자인가. 회의와 의문. 실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계기, 만들어졌다. 이성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리란 근대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한계와 역기능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이라 명명된 근대이성의 한계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른바 ‘비판 이성’을 주장, 이성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강조하면서, 믿고 있는 듯하지만. 


어쨌든 인류는 첫 번째 이성주의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생채기를 발판삼아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실패가 반드시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것, 아니다. 실패는 반복되기 마련이며, 실패를 교훈으로 삼는 것은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얘기다. 

 

인류의 문명 발전에 대한 집착은 이어졌다. 숱한 전쟁과 살육 등에 의한 희생을 거치면서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21세기에도 야만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배세력들이 자신의 이권을 위해 협잡과 조작을 일삼는 동안 대중들도 이에 현혹됐다. 지배세력의 이권이 곧 자신의 것인양 착각했다. 노동은 차츰 힘을 잃었고, 자본은 더욱 힘을 불렸다.

 

과거라면 손사레를 쳤을 유전자조작, 복제인간 등 디스토피아적인 발상도 활개를 쳤다. 전지구적으로 생각했던 과거의 합리적 이성마저도, 가출했다. 인류 스스로 집단 취면을 걸었다. 우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전지구적인 멘붕의 시대. 그것이 마냥 허풍은 아니다. <28일 후...>는 그 뚜렷한 징조를 보여준다. 그것은 은유일 수도 있고, 직유법일 수도 있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하나. <28일후...>는 인류의 이성을 부정한다.

고귀하고 숭고하며 아름다워야 할 인류문명의 결정체(이성)는 차디찬 돌멩이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인류는 '분노', 그 사소한 감정조차 조절 못하는 족속이다. 인류 따위에게 이성이란? 서류상의 유물에 지나지 않을 뿐! 세상은 분노하지만 인간은 어떤 힘도 없다. 허세였고, 허풍이었다. 고작할 수 있는 건, 서로에게 등 돌리기. 내게 불이익이 닥칠까봐, 서로를 밀어내기에 급급할 뿐이다. 


단초는 바이러스. 그것도 인간에 의해 배양된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한 바이러스의 기승은 인류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품고 영화는 출발한다. 곳곳에서 펼쳐지는 유혈폭력과 광기의 현장. 영장류들은 이른바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그들에 의해 비극의 종이 울렸다.


바이러스 유출이후 28일이 지난 날, 주인공인 짐(킬리언 머피)이 병원에서 깨어난다.(그가 '퀵서비스 배달원'이란 사실도 재미있다. 분노 바이러스가 20초안에 감염자를 극단적인 분노상태로 이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나 그가 깨어났을 때, 산업화가 시작된 문명의 땅, 영국은 폐허인 상태다. 거리엔 아무도 없다.(황폐화된 도시의 풍경은 <28일후...>의 영상미가 표현할 수 있는 압권이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힌 불안과 의심을 품은 런던은 장엄한 레퀴엠(장송곡)이다.) 


이 살풍경, 피로 얼룩진 묵시록이다. 이성 따윈 없다. 이미 대피령이 떨어진 도시, 런던에서 짐이 처음 대면한 생명체는 인간이 아니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붉은 눈빛의 좀비. 역시 이성은 없다. 오로지 (바이러스) 본능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다. 물론 그 본능, 진짜의 것이 아니다. 인간을 집어삼킨 바이러스가 지배하는 본능이다. 신자유주의가 전파한 물성 바이러스와 다르지 않다. 경쟁과 성공을 향한 무한질주, 좀비 자본주의가 오버랩 된다.  

 

좀비는 짐을 습격한다. 위기에 처한 짐, 몇 안 되는 생존자, 셀레나와 마크의 도움으로 간신히 이를 모면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 왜 이런 상황이 오게 됐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분명한 건, 그들은 고립돼 있으며 살기 위해 한때 같은 인류였던 좀비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뿐. 20초 안에 '승부'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룰은 이성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과 동의어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명제만 뚜렷하다. 그것이 생존의 룰이다.


할리우드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보증수표를 내세우고 참패한 <비치>이후, 대니 보일 감독, 심기일전을 했나보다. 생존 앞에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이성을 들고 나왔다. 감히, 누가 목숨 앞에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장삼이사라면 말이다. 그는 폐허 혹은 연옥의 현장을 짠하게 펼친다. 인간 이성을 철저히 짓밟는다. 그것은 아무짝에도 인류에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양.


<28일후...>는 지옥화다. 곧, 현실이다. 과장했으나, 그 실상은 다르지 않은. 마크도 죽고 짐과 셀레나는 또 다른 생존자, 프랭크와 해나 부녀를 만난다.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겠다는 무장 군인의 방송도 듣는다. 얼마나 반가울 쏜가. 지옥에서 만나는 인류의 흔적이라니. 그들, 무장군인이 있다는 맨체스터로 떠난다. 지옥에도 찰나의 행복은 있다. 그들, 유사가족의 형태를 띠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행복을 맞본다. 


하지만 이는 더 큰 재앙을 향한 눈속임이다. 바이러스 감염자, 좀비의 습격보다 더욱 흉포한 존재의 등장. 대니 보일의 진짜 속마음이 드러난다.  잠시의 안도감은 영화의 속도조절을 위한 장치였다. 짧은 잔치가 끝나고, 대니 보일은 진짜 타깃을 향한다. 인간의 진짜 속성을 까발린다. 폭력과 권력의 힘은 어떻게 이성을 배반하는가! 팡야. 속절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인간의 진짜 내면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인간의 본성. 


그런 본성은 무장군인 둘의 대화를 통해서도 발설된다. 철학적인 한 군인은 말한다. "지구상에서 인류의 시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인류의 멸망은 결국 정상으로의 회귀다" 이성에 따를 것을 호소하는 말이다. 반면 부대를 지휘하는 군인의 입장은 다르다. 그에게, "인류사는 폭력의 역사"다. 야만과 광기로 얼룩진 잔혹한 인류의 모습을 대변한다. 


결국 생존자들을 지킨다던 군인(인간), 이성을 시궁창에 처박는다.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약속은 위장술에 불과한 레토릭이었다. 영화는 끊임없이 되묻는 것 같다. 당신은 인간의 이성을 믿느냐? 그리곤 파열음을 내며 대답한다. 그것? 믿을 거 못된다.

 


둘. <28일후...>는 이성의 한계 인식과정에서 나타났던 파시즘(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을 비꼰다.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무렵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갓 지나간 직후였다. 영국은 바이러스가 창궐한 무인도로 전락했고 어디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는 마스크로 대변되는 바이러스의 공포가 남겼던 어떤 고립감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과 홍콩, 사스가 창궐했던 국가가 당했던 혹은 그 지방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왕따의 순간들. 미국의 음모론까지 유포됐던 고립무원의 현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언젠가 돌아올 부메랑일지도 모른다.


근거조차 희박한 갖가지 유언비어와 침소봉대의 맞춤법은 '피의 순결함'으로 무장해 유대인 학살의 기치를 들었던 나치의 만행과 연결된다. 그 경계가 희미해도, 그 호들갑에 심어진 국가 혹은 민족적 분파의 연결고리는 섬뜩했다.


대니 보일은 아나키스트인 것처럼 보인다. <트레인스포팅>의 주인공이 스코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은 것처럼 <28일후...>에서도 영국에 대한, 국가에 관한 밀착감은 약하다. 대영제국의 재건을 꿈꾸던 마크는 초반에 죽고, 애국심에 불타는 것처럼 보였던 군인들도 종족 번식과 성욕의 충족에 미친 괴물이었을 뿐이다. 국가를 내세운 이들을 일찍 죽이거나 괴물로 삼는다는 것. 박수, 짝짝짝.  


다만 유순하고 투덜이 스머프였던 짐의 반전은 극적이긴 하나 영웅주의 냄새도 살짝 풍긴다. 증오와 생존을 위한 폭력 전사로 변신한 폭이 너무 컸다는 얘기다. 


뱀발로, 제목과 관련해 들었다. 왜 28일일까. 한달에 약간 못 미치는 4주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의아심, 가질 법한데. 여성들은 어쩌면 빨리 눈치 챌 수도 있었겠다. 28일은 여성의 생리주기. 생산능력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다. 극중 미래를 위해 여성이 필요하다는 장교의 말을 떠올리면, '28일후'라는 제목,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뜻을 품고 있다는 말씀. 그렇다면? 28일후는, '새로운 시작' 혹은 '희망'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희망의 도래'보다 '절망의 지속'에 배팅하고 싶다. 다시 '28일후...'가 지나도, 이성의 개안(開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 문명의 역사는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당장 지금-여기의 우리는 그것을 목도했다. 과거 위정자들과 지배세력은 위선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마저 시궁창으로 처박혔다. 뻔뻔함이 지배하는 시대, 멘붕이 일상화된 시대, 이성은 없다!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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