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내린 빗방울 수 만큼의 기다림이나, 우주를 수놓은 별들의 수만큼의 그리움,
은 당연 아니다. 이런 기다림과 그리움은, 아주 지독한 사랑을 할 때나 가능한 일이고.

그럼에도, 그 이름이 호명될 때면,
나는, 가뭄 끝에 내리길 바라는 짧은 비만큼의, 어떤 기다림을 품는다.

그 이름, 왕가위.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그런 왕가위가 내린다. 비처럼.

이름하여,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언제나처럼, 그 속엔, 어떤 '사랑'과 '이별'의 풍경화가 펼쳐지리라. 기억과 상처 역시 품은.
(왕)가위 감독이 미국 할리우드에서 찍은 첫 장편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작품.
주드 로, 노라 존스, 나탈리 포트만...
양조위, 장만옥, 장국영 등이 아닌,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놓을 가위's World는 어떨까.
블루베리 파이와 함께, 어떤 밤들을 지새우면 '블루베리 나이츠'로 명명될까.

전반적인 평이 그닥 좋은 것 같진 않다만, (☞ 의아할 정도로 가볍고 퇴행적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이같은 평 또한, '왕가위'라는 이름값에 붙은 기대값 때문에 그러하지 않겠는가.
사실 중요한 건, '왕가위'를 만난다는 사실.
지난 <2046>때처럼, 다시 4년을 기다린 끝의 만남.
나는, 그저 '블루베리'를 냉큼 베어먹을 준비가 돼 있다.
설혹, 그것을 먹고 배탈이 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있나.
'블루베리'를 선택한 건, 결국 나인걸.

이번엔 어떤 사랑과 기억이, 스크린을 지배할까. 궁금하다.
그런 면에서, 내게 가위 감독의 최고작은, <동사서독>이다.
그 황량한 사막에서 펼쳐진 서사시의 운율을, 상처에 할퀸 외로운 군상들의 사랑에 대한 기억과 슬픔을,
나는 환상처럼 품고 있다. 어쩌면, 실제보다 기억 속에서 더 부풀려졌을 영화의 감흥.
간절하고, 또 간절하면서도,
누르고 묻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랑과 기억 한자락.
마시면, 지난 기억을, 지난 일을 모두 잊게 해준다는 술, 취생몽사(醉生夢死 : 본뜻은, 술에 취하여 자는 동안에 꾸는 꿈 속에 살고 죽는다는 뜻으로, 한평생을 아무 하는 일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리고 그들만의 농담. 잊으려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기억임을 아는 두 사람만의 어떤 언어.

그렇다고,
<동사서독>의 슬픔 한잔이, 머그잔 한잔을 넘칠만큼은 아니었다.
딱 그만큼만. 넘치지 않을 만큼만. 그저 한잔으로 충분히 목너울이 적셔질만큼만.

어쨌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내린다.

가위가 녹슬진 않았는지,
함께 가위 한번 잡아볼까?
그리고, 우리 함께, 블루베리 파이 한번 시식해볼까? ^.^*

아래는, 4년 전, <2046>을 기다리면서, 읊조린 일종의, 왕가위 찬가(?).





엇갈린 갈지자를 그리는 연인들의 스쳐감...
언제고 떠남을 염두에 두고 있는 그 누군가...
부지불식간 다가와 소용돌이치고 있는 감정의 물결...
걷잡을 수 없는, 그러면서도 꾹꾹 눌러 담는...
그것이 왕가위였다...
문 꼭 잠그고...
지독한 외로움에 스스로를 던진 뒤...
온몸은 최대한 늘어져 있어야 한다...
담배와 술도 곁에 있다면 금상첨화다...
담배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창문은 꼭꼭 닫아두고...
술잔은 언제든 입 속으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늘 손에 쥐여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견딜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늘 왕가위와 그렇게 마주 대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골방에 처박혀 담배연기에 질식당하고 술에 찌들어 왕가위를 잘근잘근 씹어대고 싶었다...

연출 작품  (장편)
· 열혈남아(1987), 아비정전(1990), 중경삼림(1994), 동사서독(1994), 타락천사(1995), 해피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 2046(2004)
 
한 남자가 있다

내뿜은 담배연기 마냥 갈 곳 몰라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음악과 영상들로 나의 감성을 애무해주던 그 남자.(그래서 오르가슴을 느끼게 만들고...)
영상마다 끈적끈적한 감정의 행로를 심어놓곤 갑자기 나 몰라라 해 버리던 무책임한 남자.(그래서 더욱 슬프도록 안타까운...)
때로는 영화 이야기를 하는 건지, 우울하고 니힐한 우리네 인생을 들쑤셔보는 건지 알 수없게 만드는 아리송한 남자. (그래서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 한편 만들면서 온갖 똥 폼은 다 잡고 시간은 시간대로 걸려서 팬들을 지치게 만드는 괘씸한 남자.(그래서 다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그러면서도 그가 온다는 소식만으로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섹시한 남자.(그래서 설렘을 안겨다주는...)

그랬다. 왕가위는 젊은 날이 지니고 있을법한 우울한 영혼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마약보다 위험하고 죽음보다 강렬한...
 
그와 함께라면 저주라도 좋다

왕가위는 저주다. 계절이, 혹은 가을이, 아픈 사람들에겐. 조금씩 부식돼 가는 마음의 시간을 그는, 불쑥 끄집어낸다. 그리고선 박박 긁어대면서 니힐함을 주입시킨다. 한결같은 슬픔의 정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늘 주춤주춤 거리는 주인공들. 언제고 떠남을 예고하고 있는 관계. 그 정서와 감정은 지독하게 슬프고 아프다. 조용하게 흐느적거리면서 고름을 짜내는 감정의 파편들...

예외적으로 <중경삼림>의 633(양조위)을 제외한다면 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 끝이 암울하고 비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태로운 관계에 발을 담든다. 처음부터 끝을 알고 시작한다는 것, 그 얼마나 지독한가. 그럼에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수 없다. 그건 어쩌면 나, 우리의 모습이고 현대의 자화상이다.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공연히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그건 일종의 저주다...

에고, 그 불온한 매력

어떤 식으로든 처방전이 필요하다. 그의 영화로 입은 상흔은 다시 그의 영화로 씻김굿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왕가위의 영상에서 굳이 의미를 따지려 해선 대략 곤란하다. 이유를 찾고, 근거를 요구하고, 이성에 의한 분석을 요구하는 이 까다로운 세상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직관에 의존해서 세상을 부유한다.

하나같이 마음의 고름을 품고 있는 그의 페르소나들은 이성과 합리보다 '불끈' 즉흥과 충동에 어울린다. 그리고 불온한 매력을 품고 있다. 상처를 주고받고, 그 아픈 상처를 꽁꽁 품은 채 슬픈 기억 속에서 부유한다. 그 에고들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연가. 소화(유덕화, 열혈남아)가, 아비(장국영, 아비정전)가, 223(금성무, 중경삼림)이, 구양봉(장국영)과 맹무살수(양조위, 동사서독)가, 아휘(양조위, 해피투게더)와 보영(장국영)이 그랬고. 특히 <화양연화>의 차우(양조위)와 리첸(장만옥)은 이성에 지배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는 마음의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멈칫거림을 너무도 절절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작은 몸짓, 제스처 하나에도 내 마음은 하릴없이 서걱거렸다.

다시 돌아온 그에게

4년을 기다렸다. 앞서 그를 만난 것이 2000년이었다. <화양연화>, 반복과 시간의 건너뜀, 스쳐 지나가는 느낌들의 미묘한 연결, 찰나에 담아내는 그 감정들의 절절함. 그건 쉽게 말이나 글로 설명될 수 없는 이미지였다. 알아채기라도 할라치면 터질 것 같은 정염의 불꽃들을 거세한 채 차곡차곡 쌓아올린 미세한 감정들의 작은 요동이 오감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왕가위의 매력은 '거부'에 있다. 진지하고 엄숙한 듯 보여도 그의 속내에는 젠체하는 것들을 마음껏 씹어준다. 때론 시간의 흐름이나 기승전결 따위도 무시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거북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짜증을 낸다. 그러나 진짜 착하다면 모르지만 착한 척 할 필요는 없다. 강호의 협객들이 나오는 <동사서독>에서는 "칼은 필요없다"며 "무협은 죽었다"고 일갈한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화양연화>도 불륜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감싸 안고 동정표를 던지게 만들었다. 과연, 왕가위!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현대의 태도와 감정을 놓고 왕가위는 모험을 한다. 세월에 깎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도덕, 윤리 혹은 관습에 도전장을 던진다. 그리고 규정짓지 않는다. '부재'와 '결핍'이 두려운 이들에게 왕가위는 슬며시 말을 건네는 듯 하다.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고독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법"이라고. 조용히 고독을 받아들이라는 듯. 그래서 <2046> 앞에서 나는 또 다시 묘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 끊임없이 먹어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고 타는 듯한 목마름에 시달렸던 그 때처럼 말이다... (20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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