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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풀리지 않을 오해를 안고 무덤에 있는 여자가 있다.

그 오해는 어떻게든 끝끝내 지속될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오늘 커피수업 하면서, 커피 내리면서, 커피 마시면서 그녀를 생각했다. 


그 오해, 그녀가 하지도 않은 말 때문이다. 

"빵이 없으면 고기(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그 말, 앙투아네트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거의 모든 것이다.

허나,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 말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녀를 단두대로 몰아낸 자코뱅당이 자신들의 공포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다.  http://swingboy.net/532


10월 16일은 그녀가 붉은 피를 쏟으며 사라진 날(1793년)이자, 

세계 식량의 날이다. 


재밌는 우연이다. 또 흥미로운 우연이 덧붙여진다. 

내가 좋아하는 책 [커피가 돌고 세계사가 돌고]의 류이치로 교수에 의하면,

앙투아네트는 카페(살롱)문화와 커피 보급에 힘을 쏟았다.  

 

 

이유가 있었다. 커피를 좋아해서라기보다(물론 진짜로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18세기 프랑스 귀족층의 커피문화를 이끈 뒤바리 부인(바리 백작 부인) 때문이었다. 앙투아네트, 문화적 소양을 높이 평가받은 뒤바리 부인을 따라잡고 싶었다. 


그러나 카페와 커피 보급에 힘을 쏟은 앙투아네트의 행동은 부메랑이 되어 그녀에게 날아왔다. 그 카페에 함께한 계몽 사상가의 연설에 카페 시민, 카페 대중은 절대왕정에 맞서는 시민의식을 키웠다. 


아뿔싸, 그녀의 신분과 지위를 위태롭게 할 자양분을 그녀 스스로 북돋은 것이다! 어쩌랴. 그것이 역사의 운명인 것을. 그녀가 물을 준 커피와 카페는 시민계급 형성에 윤활유가 됐고, 마침내 시민계급이 추동한 혁명은 그녀의 목을 날렸다. 


그러니까, 오늘의 내가 내리고 수업했던 커피는 역사의 쓴물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이름의 커피. 

갑자기 추워진 가을 날씨는 그녀를 기억하라는 신호였을까. 

식량과 식품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라는 계시였을까.  


여전한, 그리하여 영원히 봉인될 악플에 시달릴 무덤 속 앙투아네트의 눈물은, 또한 여전하며 영원히 구조적 불평등에 시달릴 식량 분배의 문제는 커피를 통해 흘러내린다.  


다시 반복하고 상기해보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하지도 않은 말)에 대한 악성 댓글이 프랑스대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문제가 아닌 부르봉 왕가의 사치와 부패가 곪고 곪아서 터졌다. 1%의 문제였다. 


식량의 문제는 곧 생존이며, 이것은 당면한 현실의 문제로서 저항의 불씨를 지펴야 한다. 1%만 배부른, 99%가 굶주리는 신자유주의·금융자본의 탐욕의 도가니가 인민들의 봉기를 돋는다. 혁명은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다. 


그렇다면,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던 커피는 초거대권력이 된 자본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아니, 없을 것이다. 자본은 또 다른 모습으로 세습화될 것이니까.  


나는 오늘 '마리 앙투아네트'의 검은 눈물을 뽑고 마셨다. 

내일(10월 17일)은 세계 빈곤퇴치의 날이다. 더 춥단다. 

식품정의를 생각한다. 좋은 커피, 함께 마시고 싶다. 

바로, 당신과 함께. 가을밤에. http://www.wisdo.me/3796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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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상.

 
나의 겨울을 온전하게 만들어주는 건 늘 당신이군요.

 

하얀 눈, 설산과 함께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흐느끼는 당신.
 
그런 당신을 만날 때마다 눈물이 터지고야 마는 나는,

이번 겨울이라고 다름없이 당신을 만나곤 여전히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야 맙니다.
 
어젯밤, 코끝이 찡하도록 벅찬 밤이었습니다. 
당신을 다시 스크린을 통해 만난다는 재개봉 예고편만으로도 말이죠.  
  
2월14일,

발렌타인데이 선물로 당신이 찾아온다니,

제 맘은 이미 그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요, 지금 제 인생의 'small happiness'입니다.  
 
그날, 눈이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하얗고 포근한 눈.

이번에는 더욱 벅찬 겨울이 될 것 같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극장에서 당신을 만나곤, 울고 있는 한 남자를 보거든,
저라는 남자겠거니 여겨주세요. 전 여전히 '히로코앓이'를 하고 있거든요.
 

나는 당신이 여전히, 아픕니다...

 


그리고 내게 세계를 선물해줬던 내 모든 첫사랑(들)에게,
히로코처럼 나도 묻습니다.
 
잘 지내나요, 고마운 당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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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처럼 검은,

지옥처럼 뜨거운,

천사처럼 순수한,

사랑처럼 달콤한.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계절이 흔들린다. 바람의 온기도 달라진다. 

9월은 그런 시기다. 

여름은 이미 숨이 꼴딱 넘어갔다. 아이스 커피도 살살 꽁무니를 뺀다. 

커피하우스를 찾는 손님들의 표정도 미세하게 달라진다. 본인들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계절, 작정하고 붙잡지 않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이 되기 십상이다.

달라진 바람과 온도 차이에 마음 틈도 벌어진다. 

바람은 그 벌어진 틈으로 들어와 쉼표를 찍는다. 

가을은 그래서 마음이 쉬어야 한다. 끊임없는 변덕들 사이에서 쉬이 지치고 피로해지는 것이 이 계절이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러 오는 손님들의 표정이 달라진다.

 

9월이 특별한 이유, 있다. 

내 어느 9월에 틈입했던 추억의 편린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9월11일도 끼어있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가 품은 기억들 때문이기도 하겠다.

내 것은 아니지만, 혹은 우리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내 것이기도 하고, 우리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커피를 준비한다. 밤9시의 커피는 9.11을 그렇게 맞이한다. 

 

(1) 이 커피, 2001년의 그 시간을 위한 것이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인류의 영원한 트라우마로 남을, 2001년 9월11일.

 

그때 그 사건, 뒤늦게 깨달았다. 세계는 나와 상관 없는 일이 아니구나.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도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구나. 

남의 일이라고 멀뚱하게 바라볼 일만은 아니구나. 

그제서야 어설프게나마 세계를 인지할 수 있었던 순간. 깨달음의 순간. 

 

그리고서야 어설프게 알았다. 사랑! 

마지막 순간,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밖에 없구나.

숨 쉬고 있다면, 사랑해야겠구나.

 

누구나 똑같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죽어간다. 

그럼에도 '살아간다'고 말하는 순간에는 사랑이 전부로다! 

죽기 직전에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역시나 뒤늦은 자각. 

 

9·11을 둘러싼 숱한 담론과 해석, 이야기가 있지만,  

내가 9.11으로부터 받은 가장 큰 깨달음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직간접으로 이를 다룬 다큐나 영화를 통해 9·11을 사유하는 편이었다. 

 

 

☞ <화씨 911> <루스 체인지> <플라이트 93> <레인 오버 미> <내 이름은 칸> 등이 그것이었다. 

 

그 가운데, 압권은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같은 아픔을 공유해도 서로 할퀴고 후벼파기도 하는 것이 사람살이임을 엿봤고, 누구나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절망적인 세상에서도 서로 삼투하면서 타인의 슬픔에 접근할 수 있음을 알았다. 

 

참고로 제목. 다시 말하자면, 직역은 '나를 지배해달라'이나,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내 곁에 있어 줘'라고 의역될 수 있음을. 


(2) 이 커피는 2001년 이전, 1973년의 그날을 위한 것이다.

  

9월11일이 품고 있는 이날의 슬픔.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의 대통령이 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가 죽은 날. 아옌데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과 인민들의 이상이 피노체트라는 개새끼 때문에 산산조각났던 그날.

 

당시, 아옌데가 집권한 칠레는 20세기의 '파리 코뮌'이었다. 

대기업의 국유화와 농지개혁의 촉진, 분배 위주의 경제정책 등 '노동자 인민을 위한 나라'였다. 

 

그걸 증명하듯,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다큐 속, 한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정말 위대한 유토피아를 위한 꿈이었다." 

 

그러나 '인민들을 위한 나라'를 용납할 수 없었던 치사하고 속 좁은 미국, 농간을 부렸다. 칠레 경제의 핵이었던 구리의 국제가격을 떨어트리는 등 인플레와 생필품 부족을 유발했고, 피노체트라는 유치찌질한 하수인을 전면에 내세워 반동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군 앞에 포위 당한 아옌데, 피델(카스트로)이 준 소총으로 죽음을 택한다. 

투항도, 망명도, 애원도 않는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라고 외치며 장렬한 산화. 

 

9월11일, 1973년의 9·11. 

물론 비극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인민가수 빅토르 하라가 16일, 인민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23일에 피노체트 하의 칠레를 거부했다. 칠레의 비극에 방점을 찍었다.

 

그 어느해 9월, 내가 꼭 칠레에 발 딛고 싶은 이유다.

9월의 어느날, 핏빛으로 꺾인 사회주의 혁명을 기억하며 칠레산 레드와인을 마시는 이유.

1970년 아옌데의 인민연합 대통령후보 캠페인송이었던 빅토르 하라의 '벤 세레모스(Venceremos·우린 승리하리라)'를 들으며, 파블로 네루다의 詩를 꿍얼꿍얼 읊조리면서. 아직 맛보지 못한 칠레 커피도 함께. 

아마도, 메이비가 아닌 프로바블리, 살아선 경험하지 못할, 혁명의 순간을 그리면서.

 

 

앞서 언급한 <살바도르 아옌데> 외에도 이런 영화와 책이 있다. 

밤9시의 커피가 구비하고 있는 친구들. :) 

 

☞ <칠레전투:비무장 민중의 투쟁> 3부작. 인민의 희망과 좌절, 그 기록. 참으로 먹먹하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그 비극의 9·11을 재현한다. 

<일 포스티노>(파블로 네루다) <평화 속에 살 권리>(빅토르 하라) <영혼의 집>(아옌데의 조카가 쓴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 여성들의 삶을 통해 칠레의 역사를 보는)

 

책을 꼽자면,  

[빅토르 하라]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3) 그렇다면 비극만 있었느냐? NO! 

1973년 이전, 1906년의 9·11. 그러니까 100년하고도 6년 전.

 

20세기 들어 최초의 9·11은, 평화의 기념일이었다. 

스와라지(자치)를 통해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고 말씀해주신 간디는 이날, 

남아공에서 인도 노동자 3000여명과 함께 '비폭력 불복종운동(사티아그라하)'을 펼쳤다.

 

변호사였던 간디, 소송사건을 맡아 남아공으로 갔다.

인도인, 황색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당했다. 

기차 1등석을 샀으나 3등석으로 가라는 승무원의 요구.

 

간디, 간지나게 버텼으나 쫓겨났다. 

이유? 남아공의 그 유명한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분리)정책 때문이었다. 

굴욕 당한 간디, 깃발을 들었다. 굴욕에 저항하기 위한 3000여명과 함께 유색인의 지문을 날인하도록 하는 법안에 반대하는 의미로 신분증을 불태웠다.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  

 

간디의 그 유명한 비폭력 불복종운동의 시초.

이 운동, 1960년대 마틴 루터 킹의 흑인인권운동과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현대음악가 필립 글래스가 재현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실황을 담은 영화 <사티아그라하>도 있다. 

 

한편으로 재밌는 역사. 

물론 의도한 바는 아니겠으나,

차별에 저항하는 평화운동이 일어난 날(1906년)과

미국의 폭력적 패권주의를 깨우는 계기가 된 날(2001년)이 같다는 것. 

 

4. 여기에 이젠 또 하나의 9·11이 덧붙여진다. 2012년 9월11일.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의 공식적인 개소를 알렸다. 

 

이것은 그러니까, 9·11의 '네 가지' 의미.  

 

밤9시의 커피는 네 가지 커피 메뉴를 준비했다. 

각각이 지닌 역사와 의미를 버무리고 블렌딩하여, 맛과 향을 낸.

BGM으로는 '벤 세레모스(Venceremos·우린 승리하리라)'를 깔았다.

 

밤9시의 커피를 찾은 당신을 위해 준비했다. 

9월11일의 메뉴 중 당신은 무엇을 고르겠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당신의 마음과 이야기를 듣는다. 밤9시의 커피다.  

 

1. 레인 오버 미

2. 칠레의 눈물 

3. 사티아그라하

4. 부엔 카미노(Buen camino·당신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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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부터 이맘 때면, 

심장이 시켜서 하는 일이 있어요. 

느닷 없이 닥쳐온 사건에 심장은 때론 격하게 반응을 하죠. 

그리고 특정 시간을 품은 심장은 때가 되면 몸과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 말을 다시 되씹어야 했던 그날. 2004년 8월4일.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먼저 꺾어 식탁을 장식하듯, 

신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데려가 천국을 장식하신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울었습니다. 

당시 울면서 썼던 누나에 대한 추모.   

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가 떠났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일. 

슬픔을 참고 견뎌내는 일 외에 그 사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 

추모바자회를 열고 있습니다. 

매년 8월4일, 1년에 단 하루,

심장이 시켜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추모바자회를 열고 있어요.

아름다운가게의 도움을 받아서. 

 

올해도 열립니다. 

행여 집에서 팽팽 놀고 있는 책이나 CD 등이 있다면 보내주세요. (무료택배 방법 있슴다!)

아님, 추모바자회 행사 당일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책방'에 오셔서 자원봉사나 물건을 사주셔도 되고요.

뭐, 별로 보고 싶진 않겠지만, 행사 당일 저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ㅋ 


참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사람입니다. 정든님 정은임. 

<냉정과 열정사이>는 그랬습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다."

 

아무렴요. 

누군가, 정은임은 누군가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있을테니 행복할 거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렇게라도 정든님을 우리는 기억하고 삽니다.

살아남은 자의 숙명이자 슬픔.

 

영원한 나의 누나. 

이젠 늙지 않는 나의 누나.

안녕, 은임 누나. 잘 있나요?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하루

8월4일(토) 아름다운가게 서 제7회 정은임 아나운서 추모바자회 열려


8년여 전, 그날 즈음,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하늘도 슬퍼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불의의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정은임 아나운서는 며칠 뒤, 비가 많이 오는 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4년 8월4일. <정은임의 FM영화음악> 등을 통해 ‘라디오시대 마지막 스타’였던 그녀가 떠난 자리, 그녀를 기억하고 사랑했던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정든님, 정은임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청춘의 어느 한 시절을 정은임에 빚진 사람들, 그 사람과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아름다운 하루를 열기로 했습니다. 매년 8월4일,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날입니다. 추모바자회를 열고 있습니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오는 8월4일(토) 모입니다.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책방에서 추모바자회를 엽니다. 우리 세상과 사회를 조곤조곤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 아직 기억합니다. 지난 2011년을 제외하고, 매년 8월4일 연 추모바자회는 올해로 7회째를 맞이합니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가게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하루’입니다. ‘정은임 아나운서 팬페이지’(www.worldost.com)의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아름다운가게’(www.beautifulstore.org) 등과 함께 열고 있습니다. 


바자회는 정은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기부와 참여로 이뤄집니다.

행사 당일 아름다운가게에 모여 봉사활동도 하고 수집된 물품을 판매합니다.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누구나 참여 가능합니다. 수익금은 아름다운가게에 전액 기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렇게 해왔습니다.

지난 1회 바자회 수익금 전액(200만원, 특별후원금 70만원 포함)은 아름다운가게 수해지원금에 포함됐습니다. 2회 때는 바자회 행사와 추모 영상회를 가졌으며, 바자회 수익금 전액(182만7천원)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성금으로 활용됐습니다. 3회(136만2천원), 4회(155만4450원) 5회(187만2010원) 6회(111만원) 바자회 수익금 전액은 아름다운가게 수익나눔 성금에 보태졌습니다.


이번 바자회도 자발적인 기증과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품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은 무료택배(1577-1113)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책방은 도서, 음반 등을 주로 받으며, 옷을 제외한 가로*세로 30cm 정도의 잡화류도 가능합니다. 무료택배 기증은 8월1일(수) 도착 분까지 가능하며, 직접 갖다 주셔도 됩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분은 당일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책방에 오셔서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정든님 정은임,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합니다. 

안녕, 정든임 정은임.

 

다음은 8주기 추모행사 내용입니다.


1. 행사일 : 2012년 8월4일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2. 행사장소 : 아름다운가게 광화문책방 (서울 종로구 종로1가 24번지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지하2층 B215, 연락처. 02-732-6006)

3. 아름다운가게 기증 방법 : http://www.beautifulstore.org/Join/Giving/Process.aspx

 

관련사이트

http://www.worldost.com  정은임 추모사이트 ‘정든님’

http://www.cyworld.com/bastian2004  정은임 미니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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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절, 메이데이.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상한 수사는 박정희의 사악한 계략(!)이었고, 어쨌거나 5월1일은 노동을 생각한다. '노동'을 저 멀리 어디 외계인들이나 하는 짓거리나 수사로 생각하는 족속들에겐 참 불편한 날이다. 노동이라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돈거니 같은 족속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어머니, 누나와 함께 '가정'을 이뤄 오손도손 알콩달콩 살고 싶은 바람을 가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소년은 열여섯 생일을 앞두고 있다. 이 소년의 꿈,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Boys, Be Ambitious'와 같은 구호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꿈, 경쟁에서 싸워 이기고 적자생존에서 살아남는 법만 가르치는데 혈안이 된 우리 사회의 익숙한 풍경에선 낯설다.

 

기억하는가, 열여섯.

어떤 꿈이었는지 몰라도, 한창 꿈을 꿨던 시기였다고 생각되는 나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대학입학이 '신화창조'니 하는 말로 오염돼 있긴 해도.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이 열여섯 소년, 리엄은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다. 가난은 그의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다. 엄마는 열여섯번째 생일에 교도소에서 석방될 예정이다. 돈을 모으기 위한 열여섯의 '고군분투기'는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엔 가혹하다. 그리고 지독하게 현실이다.

 

 

<스위트 식스틴>.

'달콤한 열여섯살'이라는 제목, 예상대로 반어법이다. 켄 로치 감독답다. 이 명민한 좌파는 노동의 현실, 부패한 자본주의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영화엔 지독한 현실에 대한 그의 분노가 묻어난다. 영화로 세상과 싸우는 그의 열혈이 언제나 나는 반갑다.

 

전작인 <빵과 장미> 통해

그는 '세계화'에 짓눌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인권을 다뤘다. <스위트 식스틴>은 기본 뼈대는 갖고 간다. 개인과 가정을 통해, 그리고 이번엔 열여섯을 통해 자본주의를 다시 말한다. 이 열여섯이 꿈꾸는 평범한 가정생활. 그것이 자본주의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경을 보자.

글래스고 변두리의 그리녹. 한때 선박 제조로 유명했으나 쇠퇴한 도시다. 후기 산업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소외지대. 주민들은 도리 없이 도시의 운명을 따른다. 하층 노동계급. 즉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된 계급인'으로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곳에서 열여섯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빤하다.

 

마약!

학교에서 퇴학당한 리암이 평범한 가정생활을 위해, 쇠락한 도시에서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무엇. 언급한 대로 그 이유, 가상하다. 감옥에 있는 엄마와 미혼모인 누나, 조카와 함께 사는 '꿈'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것이 순탄할리는 없다. 어른들의 세계가 열여섯에게 호락호락할 턱이 있나. 리암은 마약 때문에 수시로 곤경에 휘말리고 사태 해결은 미적지근하다. 좌충우돌하지만 답은 없다. 막막하다. 

 

 

세상은 한없이 가혹하다. 

이런 말, 너무 무성의해 보이나 이만큼 진실을 드러내는 말도 없다. 리암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평범한 가정 하나 꾸려보겠다는데, 세상은 하층계급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일도 마땅치않다. '해고가 곧 살인'인 지금의 우리 현실과 다르지 않다. 노동은 언제든 대체가능한 것으로 치부되고, 개별성은 무시당한다. 차이가 있다면, 비극은 십대의 소년에게도 혓바닥을 불쑥 내밀고 있다는 것 정도?

 

물론 켄 로치 아저씨가 마냥 암울하진 않다.

온통 잿빛이지만, 십대 고유의 생기발랄과 에너지마저 집어삼키진 못한다. 이 덕분에 불편한 연민의 시선을 거둘 수 있다. 켄 로치의 시선이 그래서 좋다. 동정심을 과격하게 드러내지 아니한다.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일찍 알아버린 아이들, 그냥 세상에 아우성을 내지른다. 발걸음도 경쾌하다. 나쁘지 않다.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눈높이에 세상을 맞춘다. 교조적인 교훈이나 훈화 따위의 흔적? 그렇다. 없다. 그런 건 켄 로치의 전공이 아니다.

 

쨍하고 해뜰 날, 온다.

리암은 우여곡절 끝에 집을 장만한다. 엄마는 출감을 하고 파티를 연다. 이젠 뭔가 되는가 싶다.  그러나 다음날, 엄마는 낭비만 일삼고 철 없는 애인의 집으로 훌쩍 떠난다. 가족이 함께 사는 꿈은 신기루일 뿐이다. 소박하게 그 꿈만 이루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 리암이건만, 삶은 다시 가혹함을 강요한다. 제길할.  

 

산산조각 난 꿈.

아, 어쩌란 말이냐. 리암은 세상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열여섯에게 이리 가혹해도 되는가, 세상아!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처럼 견고하다. 쫓기는 몸으로 전락하는 달콤해야 할 열여섯. 그 아름다운 시절의 생일, 어둠으로 채색될 뿐이다. 그게 과한 욕심이었나. 조금만 제대로 된, 시궁창보다 약간 나은 삶을 원했을 뿐인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고 사회구조는 견고하다. '인생 역전'은 자본주의의 혓바닥 놀림이다. 언제나처럼 악순환은 하층민의 몫이다. 노동만으로 삶 하나를 부지하는 것도 사치란 말인가. 富가 그렇하듯 범죄나 가난 역시 이젠 세습이란 말인가.

 

 

우리는 노동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방점은 '충분히'다.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화폐의 노림수는 명백하다. 너만 노력하면 돼. 사회는 손 놓고 있다. 미친 거다. 켄 로치 아저씨.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마약문제로 인한 가정파탄 등의 문제는 이 사회가 병들어 있고 붕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공적인 이슈는 사생활을 갉아먹는다. 세상 어느 누구도 진공 상태에서, 고립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다.”

 

노동을 혼자이게 만들지 마라.

열여섯을 영원히 밖으로 내몬 사회는 희망이 없다. 쌍용차, 재능교육, 콜트콜텍, 코오롱, 유성기업 등을 내모는 이 사회는 어떤가. 노동을 한 없이 불온하고 불쌍한 것으로만 내모는 이 사회는 제대로인가. 켄 로치 아저씨는 외친다. 새로운 경제구조를 만들어라.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닌,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로 전환하라. '부익부빈익빈(富益富貧益貧)'은 이미 하나의 사회문제가 아닌 고착화된 사회구조가 됐다. 로또만이 희망인 사회?  

 

열여섯 아니 마흔은 여전히 꿈꾼다.

노동만으로 충분히 먹고사는 삶.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살았으면 됐지, 이놈의 세상은 계속 다그치기만 한다. 정권교체로 끝날 것이 아니다. 여전히 강고한 시스템을 등에 업은 놈들에게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켄 로치 아저씨, 말했다. 착취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든다. 시스템을, 그래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노동이 인정 받는 길이리라. 켄 로치가 그러하듯, 나도 당신의 노동을 감탄한다.

 

우리는 그렇게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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