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바꾸는 것보다 종교를 바꾸는 것이 더 쉽다.
세상 사람들을 카페에 가는 사람과 가지 않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다.
그 중 카페에 가는 사람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우월하다.
- 조르주 쿠트린-
우리 마을엔, 그리고 우리 커피하우스 단골 중엔 무명의 소설가가 있다. 아니, 무명(無明)이 아니지. 이름이 없다는 말, 내가 싫어하는 표현이니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가 있다. 그럼 어떤 소설을 펴냈느냐? 없다. 그의 가슴과 머리에, 그리고 이른바 '습작품'만 있다.
굳이 따지고 들면, 소설가 지망생일 텐데, 나는 그런 것 패스. 등단이나 책을 내지 않았다고 '지망생'으로 규정하는 풍토, 별로다. 그는 내게 이미 문학가이자 소설가다. 그의 단편소설 몇 편은 그의 호의에 힘입어 읽은 적이 있다. 어땠냐고? 뭐, 내가 평론이나 비평을 할 처지는 아니다만, 실은 그저 그랬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는 에스프레소를 즐겨한다. 그것도 리스트레또로. 한 번 더 나아가, 리스트레또를 아메리카노 잔에 마신다. 한 번 오면 죽치고 앉아 대여섯 시간을 노트북과 씨름하다가 간다. 아마도 또 어떤 소설을 쓰고 있으리라. 물론 중간중간 딴 짓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런 그를 위해 두세 번 정도 리필을 해 준다. 그는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 한 달에 자신이 먹을 만치의 계산을 한다. 늘 그보다 더 주긴 하지만.
오늘(8월18일). 그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그를 위한 커피 메뉴다. 커피를 건네면서 메뉴 이름을 말해줬더니, 눈치를 챘는지, 그가 말한다.
"이거, 발자크 맞죠?"
하하. 들켰다.
"역시 소설 쓰는 사람이라 다르네요. 조심하세요. 독해요."
"전 심장 발작은 일으키지 않으니까, 걱정마세요. 하하."
8월18일, DJ의 3주기이기도 하지만, 커피 만드는 내겐 발자크가 우선이다. 프랑스의 대문호,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850년 죽었으니 올해 162주기. 그는 '소설의 교과서'로 불린다. 발자크의 소설이 보여준 섬세한 구조와 사실적 묘사, 인물에 대한 탐구 때문인데, 그의 걸작 《고리오 영감》이 그것을 대변한다.
아는 사람은 안다. 발자크, '커피 애호'를 넘어 '커피 개중독'이었다. 독일엔 'BALZAC COFFEE'라는 커피 프랜차이즈(1988년 시작)가 있을 정도인데, 프랑스 아닌 독일에서 그의 이름을 딴 커피 프랜차이즈가 있을 정도니, 의아하면서도 말 다했다. (캐나다 토론토에도 있다고 한다.)
발자크는 커피에 죽고 살았다. 하루에 30잔(50~60잔에 달했다는 속설도 있다). 평생 3만 잔을 마셨다고 추정되는데, 그는 커피 없이 못 살았다. 그는 이른바 '소설 노동자'로 불렸다. 하루의 태반을 소설 쓰는데 썼다고 한다. 14~15시간을 소설 쓰는데 투여했다는 그는 그만큼 다산(多産)했다. 74편의 장편소설을 비롯해 숱하게 많은 단편을 내놨다.
물론 그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빚을 갚아야 했다. 이른바 '생계형 소설노동자'. 여러 사업에 손을 댔으나 하나 같이 망했다. 사업가적 기질은 꽝이었으나 글쓰기만큼은 잘 했나보다. 미친 듯이 '이야기하기'를 써댔다. 그것을 위해 '커피'는 반드시 필요했다. 대체 얼마나 써대고 마셔댔는지, 이 기록을 보자.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이렇게 묘사한다.
"한밤중에 일어나 여섯 자루의 촛불을 켜고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시작이 반.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4시간에서 6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간다. 체력에 한계가 온다. 그러면 의자에서 일어나 커피를 탄다. 하지만 실은 이 한 잔도 계속 글쓰기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이다. 아침 8시에 간단한 식사. 곧 다시 써내려간다. 점심시간 때까지. 식사, 커피. 1시부터 6시까지 또 쓴다. 도중에 커피."
도대체, 이 남자는 뭔가. 잠자고, 생리현상 처리하고, 식사 준비를 포함해 식사 시간과 커피를 제조하는 시간을 제하고 하루 15시간을 글쓰기. 그것도 매일. 미친 거 아냐? 소설을 쓰기 위해 그가 커피를 마셨다지만, 커피 만드는 내 입장에서 보면, 반대다.
"제가 보기엔, 발자크는 커피를 마시려고 소설을 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이게 말이 돼요? 커피가 소설인 이유죠. 죽음보다 지독한 서정이었고요. 하하. 이 정도면 덕후죠, 덕후. 커피 덕후. 커피 오타쿠."
"발자크에겐 커피라는 존재는 '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창작의 동력. 뇌 주름을 깨우고 상상력을 발동하고 생각의 엔진을 돌리기 위한 심장의 검은 석유죠. 근데, 전 아직도 궁금해요. 커피 때문에 정말 죽었을까요?"
글쎄, 나도 모른다. 그는 심장질환으로 죽었다. 너~무 지나치고 과도한 커피로 인해 심장병을 얻었다는 얘기도 있다. 말하자면, 커피가 '발작'을 일으킨 셈인가?
"그럼 행복했을까요?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고 애찬하던 사람이 커피 때문에 죽었으니. 어떤 사람은 커피 애호가다운 죽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발자크가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커피도 너~무 지나치면 독이 된다. 그 지나침은 물론 보통의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한 방에 80잔을 들이키면 훅~ 간다.얼마 전 탈학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커피 강의를 하면서 이걸 알려줬더니, 묻는다. "선생님, 그렇게 마신 사람 있어요?" 글쎄, 나도 그건 모른다.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라는 책이 있던데,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저자인 엘리엇 부는 커피가 자살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까?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카페인의 분자식은 'C8H1ON402'이다. 이것 10그램을 한 방에 먹으면 황천길이다. 카페인 10그램은 그럼 커피 몇 잔 정도냐! 일반 커피 잔으로 80잔 정도다. 그래서 80잔 얘길 한 거다. 조금씩 천천히 한평생에 걸쳐 죽여주는 독약이 될 수는 있겠다. 커피 때문이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어쨌든 최승자는 죽음 대신 '네게로' 간다고 썼다.(「네게로」라는 詩)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코올처럼/ 알코올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김갑수 선생은 한 술 더 뜬다. 《지구 위의 작업실》, '커피는 한 잔의 문학'이라고 했다.
"250밀리그램 이상의 카페인을 먹었을 때 10퍼센트 정도의 사람에게서 불안, 초조감, 안절부절못함, 홍조, 다한증, 손발의 따가운 느낌, 구역, 구토증 등이 나타난다. 1그램 이상의 카페인을 먹었을 때는 극도의 불안, 초조감, 정신착란증, 환청과 부정맥이 있을 수 있다. 10그램 이상에서는 전신발작, 호흡부전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영혼의 상처 없이 문학은 가능하지 않다. 말하자면 커피는 한잔의 문학이다."
"커피 하는 입장에선 어때요? '커피질'도 발자크만 하면 정말 쩔지 않아요?"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덕후질도 저 정도면 확실히 쩐다. 뻬쩨르부르그 사람들이 특별히 주장했다는데, "사상보다도 예술보다도 돈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지독한 액체, 그것이 바로 커피." 커피가 서정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보다 더 잘 드러낼 수가 없다. 발자크에게도 그랬으리라.
"커피, 정말 지독해요. 커피가 없었다면 발자크가 소설을 저렇게 쓸 수 있었을까요? 빚 때문에 죽으려고 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니, 죽음보다 더 지독한 액체죠."
커피는 한편으로 불행을 극복하는 액체다. 그러니, 만날 빚더미에 눌린 발자크가 이렇게 읊어댔겠지. "불행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되라. 어떠한 지혜로도 불행을 미리 막을 도리는 없다. 그러나 그 불행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할 힘은 우리에게 있다."
홍대 부근의 한 카페, '무슈발자크'라는 커피가 있다. 무슈는 프랑스 사람, 파리라는 뜻이기도 하고, 아저씨라는 뜻도 있다는데, '발자크 아저씨'라는 그 커피 역시 진한 에스프레소가 아메리카노만큼 담긴다. 이 커피 주인장 역시 뭔가를 아는 사람인지라, 무슈발자크라는 메뉴 이름 옆에 '심장 주의'라는 경고(?)를 달았다. 이 커피를 100잔 마시면 소설가가 된다는 '믿거나 말거나'까지 말해준다고 한다.
나는 바란다. 부디, 이 소설가에게 나의 커피가 동력이 되길.
발자크에게처럼 커피가 발작을 일으키는 대신, '심장이 건너뛴 박동'으로 그만의 소설을 완성하길.
나의 커피가 그의 서정과 서사를 온전하게 결합하는데 도움이 되길.
소설가의 표정이 오늘 따라 밝다. 심장이 건너뛴 박동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밤9시의 커피는 오직 당신만을 위해 커피를 만들고 내린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커피가 위 속으로 미끄러지듯 흘러 들어가면,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생각이 전쟁터의 대부대처럼 몰려오고 전투가 시작된다. 추억은 행군의 기수처럼 돌격해 들어온다. 기병대 군인들이 멋지게 달려
나간다. 논리의 보병부대가 보급품과 탄약을 들고 그 뒤를 바짝 따라간다. 재기 발랄한 착상들이 명사수가 되어 싸움에 끼어든다. 등장인물들이 옷을
입고 살아 움직인다. 종이가 잉크로 뒤덮인다. 전투가 시작되고, 검은 물결로 뒤덮이면서 끝난다. 진짜 전투가 시커먼 포연 속에서 가라앉듯이" (발자크, ‘커피송가’ 중에서)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