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도, 차갑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핫함과 쿨함을 아우르는, 열정과 냉정이 교차하는, 이것은 ‘역사’의 기록이다. 석유(자본)의 역사, 문명의 역사, 인류의 역사, 종교의 역사, 피의 역사, 그리고 한 인간의 역사. 그러니 당연하게도 뜨겁고, 차가운 기운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것의 실체는 검은 액체에서 비롯된다. ‘석유(Oil)’라 불리는 검은 액체. 인간은 석유를 발견했지만, 그것은 장대한 비극의 서곡이었다. 되레 인간을 지배한 것은 석유가 되고만 비극.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석유 제국’을 건설한 미국의 한 자본가를 다룬 영화다. 시대극이다. 석유로 인해 블랙러쉬가 이뤄지던 1900년 전후의 미국 캘리포니아. 석유는 인간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자본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불굴의 의지와 분별없는 열정 사이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속 시원히 결론부터 말하고 보자. 한마디로 ‘석유가 잉태한 분별없는 열정이 불러온 파국’. 영화는 석유와 인간(혹은 종교까지 곁들여)의 협잡이 얼마나 환멸을 불러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시작부터 그랬다. 산맥과 황야를 조망하면서 들려오는 기계음은 비극의 전조와도 같았다.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이 관객의 오감을 붙들었다면, 거의 10여분 이상을 거의 대사 없이 꿈틀대는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퍼포먼스가 뒤를 이었다. 단 한마디 대사, “드디어 찾았어”를 제외한다면, 은광을 채굴하는 그의 모질고 험한 분투가 이어진다. 그것은 어떤 경외심까지 불러일으켰다. 노동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경배 같은 것.
플레인뷰는 혼자 끊임없이 갱을 오르내리다가 사고를 당한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는다. 은광에 이어 석유까지 채굴에 나선다. 은광이 종잣돈이라면 그의 욕망은 검은 액체로 향해 있다. 그것만이 ‘성공’의 모든 것인양, 그는 앞으로만 달려나간다. DNA에 그렇게 각인돼 있는 것 같다. 왜 석유에, 돈에 집착하는지 끝까지 알 순 없지만, 그는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저 자신이 자발적으로 뛰어든 게임에 몰두하는, 광기 그 자체.
성공가도를 달리는 플레인뷰에게 하나둘 사람이 붙지만, 그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신은 ‘석유’ 하나뿐이다. 석유사업을 위해 그는 포장과 기만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유정사업의 장소에서 해당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은 ‘패밀리맨’이며, 유정사업은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선전한다. 양아들 H.W.를 사업설명회 등에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런 목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다 거짓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석유(혹은 돈)만이 그의 ‘유일신’이다. 그것은 ‘대운하’에 모든 것을 걸고자 하는, ‘지금-여기’의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플레인뷰는 석유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던 사나이였다.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시기, 일찍 그 속성을 간파한 플레인뷰가 사람들을 현혹할 기제를 찾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속임수라기보다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그는 ‘패밀리’라는 포장을 통해 ‘꼼수’를 부리긴 해도, ‘패밀리’라는 피붙이 앞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역시나 어떤 강력한 불도저도 ‘형님’앞에선 그저 작아지고 마는 현실과도 겹친다. 어찌 할리우드의 20세기 초반 시대극이 21세기에도 기시감처럼 나타나고 마는가.
말이 잠시 다른 길로 흘렀다. 다시 돌아가자. 석유는 자본(주의)의 동력이었다. 결국 지금 석유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플레인뷰는 지금의 자본가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그가 때론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손, 그것은 사업과 실용에 근거하고 있다. 검은 액체는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가 원래 검은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동색의 석유를 향해 애정을 발산한 것일까. 갑작스레 석유가 분출된 장소에서 청력을 잃은 아들이 플레인뷰를 향해 가지 말 것을 애원하지만, 그는 멈출 수가 없다. 석유 앞으로 달린다. 얼굴 찌푸리고 있는 동업자에게 말한다. 석유가 쏟아져 벼락부자가 될 텐데 왜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냐고.
그것이야말로 자본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동정 없는 자본의 가장 적나라한 광경. 플레인뷰의 표정에서 나는 자본을 향한 숭고함(!)을 엿본다. 석유가 인간을 집어삼킨 광경. 석유 없이 자본주의는 절대 가속을 붙이지 못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의 동력 또한 석유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인터넷의 근간에도 석유는 있다. 가만 둘러보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석유와 관계를 맺고 있다. 기름값이 오른다고 걱정되는 것은 단지 차 때문이 아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석유 없이 돌아갈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석유(자본)은 그것을 철저히 이용했다. 플레인뷰는 좋게 말하자면 한없이 똑똑한 친구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이른바 ‘막장’ 혹은 ‘끝장’의 영화다. 플레인뷰의 마지막 읊조림, “I'm finished”가 불러온 자폭의 느낌이 그렇다. ‘자본 불리기’에만 몰두하고 ‘신성 전하기’에만 매달리던 성공의 이면. 그 모든 ‘분별없는 열정’의 종국을 암시하는, 그 외침은 참으로 강렬하다. 석유를 캐냈으나, 결국 석유에 지배당하고만 작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회한 섞인 피로감의 토로. 석유가 당신을 파멸케 하리라. 플레인뷰에게 미리 알려줄 걸 그랬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타임머신이 없는 세상이다. 안타깝다.
한때 너무도 거침 없이 오름세를 거듭하던 석유를 기억하는가. 그게 불과 몇달 전이었다. 차츰 깨닫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제 분별없는 열정을 버릴 때라는 것을. 플레인뷰를 통해 그 파국을 경험했다면 말이다. 비약하자면, 석유 아닌 대체재가 필요하다. 혼자만의 열정으로 석유발굴에 나서던 초기 자본가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유가폭등의 전후, 어쩌면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대체 에너지의 개발을 촉구하는 영화로도 읽힐 수 있다. 그것은 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놀라운 일이다. 저 영화를 보는 일도 석유와 연관됐음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