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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평점 :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다(물론 나도 포함된다). 스무 살이 넘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아주 드물게 예외적인 인간이 있을 뿐이다. ‘사실’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도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나에게 유리하면 사실은 중요한 근거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실 따위는 개에게나 줄 먹이거리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여기의 ‘종북’이라는 딱지다. 종북(從北)이 말 그대로, ‘조선노동당과 그 지도자의 외교 방침을 추종하는 경향’을 뜻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냥 자신(의 정치적 견해)과 다르면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유행’이 됐다. 다른 이유는 없다. 종북의 근거나 이유를 발견해서가 아니다. 그냥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종북이라는 유행어를 갖다 붙인다. ‘듣보잡’ 변희재는 그래서 낸시 랭에게 ‘종북’이라는 레떼르를 부여했다.
밑도 끝도 없는 종북놀이를 보면서 지젝의 말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입증해줄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념이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품고 있는 확고부동한 무언가가 있다. 삶의 맥락에서 다져온 생각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에 충돌하는 사실을 제시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사람은 신념을 바꾸기보다 그 신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종북이 그런 것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가 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경제적으로 상층으로 올라서려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수입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도표를 제시하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보다 당신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가능성이 크단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마도 종북과 같은 딱지가 붙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자기를 기만해서라도.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도 그것을 설명한다. 긴장이나 불안 상태로서 경험하는 심리적 모순을 가리키는 ‘인지 해리’를 통해서다.
“인지 해리를 줄이려는 욕구는 우리가 새 정보에 반응하는 양상에도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자신의 편향을 확인받고 싶어 하며, 행복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 들어오는 정보를 기꺼이 조작하고 무시한다. 이런 일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강하게 일어나기에 이름까지 붙여졌다. 바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것이다.… 합리화하는 성향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증거는 종종 즉각 비판, 왜곡, 배제와 맞닥뜨리고는 한다. 더 많은 해리를 겪을 필요가 없도록 하거나 견해를 바꿀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p.246)
이 책은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다. 인간뿐 아니라 생명이 기만과 자기기만을 통해 진화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를 로버트 트리버스 저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도 들먹이면서 언급한다. 거칠게 말해서 인간은 속여야만 산다. 불편부당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려는 노력이 다양한 기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이해하기 힘드니까, 종북이라고 레떼르만 붙이면 되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고, 생명일지도 모른다.
로버트는 부모-자식 갈등 문제를 연구할 때 자기기만의 단초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책에도 그것을 일부 언급했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혼내거나 매를 들면서, 혹은 사교육 등으로 내몰면서 부모들은 하나같이 외친다. “이게 다 네가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 “내가 잘 되려고 이러는 거니? 다 널 사랑하니까 이런 거야.”
진심 묻고 싶다. 정말로? 부모도 알 것이다. 깊은 자신의 내면에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용기나 준비가 안 돼 있을 뿐.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을 위해 기만과 자기기만을 이용해 아이의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권력을 쥔 자의 횡포다. 그러니 권력은 자기기만의 중요한 지점이 된다. 권력은 자연 사람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사람이 달라졌다느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느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다. 권력은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약화시킨다. 로버트는 권력이 자기기만에 작동하는 메커니즘도 언급했다.
“사람들에게 권력을 쥐었다는 느낌을 갖게 하면, 그들은 남의 관점을 취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자신의 생각을 중심에 놓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그 결과 남들이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이해할 능력이 줄어든다. 무엇보다도 권력은 남에게 무신경하게 만든다.”(p.47)
권력을 쥐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던 사람이 남의 관점이나 감정을 헤아리려는 노력이 줄어드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하고 있다. 선거 전후의 정치인이 달라지는 모습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없을 때래야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정성 원리를 고수하고, 남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더 쉽다는 사실은 참 아픈 현실이기도 하다.
기만과 자기기만이 스스로를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한 행위라는 것은 그만큼 인간에게 요구되는 성찰의 지점이 있음을 방증한다. 성찰하거나 자기기만을 제어하지 못할 때, 자기기만이 야기하는 엄청난 파급에 대해서도 책은 언급한다. 전쟁이나 학살 등이 그것이다. 개인 생활에서야 경우에 따라 귀여운 행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집단이나 조직, 국가적인 자기기만이 이뤄지면 인류 전체에 큰 위협이 되는 사건이 된다. 인류 문명의 발생 이후 벌어진 모든 전쟁이나 학살이 그러했고, 최근 우리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전쟁이 아니다!)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등 인류의 대비극은 집단적인 자기기만을 토대로 한다.
“9/11 사건이라는 가짜 구실을 내세운 그 전쟁은 석유 및 관련된 경제적 자산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동시에 주둔 기지를 건설하고 맹방인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고안된, 의도적인 선택에 따른 전쟁이자 공격전이었다. 물론 뻔한 거짓 핑계를 내세웠다. 훗날 이 전쟁은 기만과 자기기만을 수반한 어마어마한 군사적 실책의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학교에서 가르치게 될 것이 확실하다.”(p.406)
저자는 특히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자기기만의 위험성을 경고했다.(“많은 종교가 지난 한 가지 결정적인 능력이 있다, 바로 독선이다.”(p.470)) 이것은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뿐더러, 종교나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기만이 우리를 점점 옥죄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온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기만의 언어가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지 않는다. 되레 실제 가르침을 소홀하게 만든다. 신성에 대한 믿음 여부가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기만이 불러올 부정적인 영향이나 파국을 염려한다. 그러면서 자기기만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또한 개인적이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기만이 늘어나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란다. 그는 자기기만으로 일련의 작은 편익들을 맛보다가 큰 코를 다친 경험을 종종 했다고 토로한다. 착각을 즐기다가 급격한 반전에 이른 경험들이다. 자기 과신에 취해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크게 대가를 치르기 전에 되돌아보고 성찰할 것. 명상, 기도, 친구와 상담자 등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자기기만을 통해 진화해왔다곤 하나 우리는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다고 로버트는 믿는 것 같다. 그 믿음 또한 자기기만이 아니길 나도 바란다.
“자기기만은 쓰라린 결말로 이어질 때가 종종 있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만이 아니라 잘못 판단한 전쟁과 경제 정책 같은 거대 사건들에도 들어맞는다. 우리는 남과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일시적인 혜택을 누릴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대가를 치른다. 나는 이것, 즉 무지의 비용은 나중에 치르는 반면, 자기기만의 혜택은 즉시 볼 수 있다는 것이 삶의 일반 법칙이라고 믿는다.”(p.506)
다만, 이 책을 누구에게나 쉬이 권하지는 못하겠다. 띄엄띄엄 관심사에 따라 챕터별로 읽는 것은 나쁘지 않겠으나 가독성이 좋은 편은 아니다. 번역이 마냥 매끄러운 느낌도 아니다. 내가 지닌 과학적 상식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중간중간 턱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