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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 당연의 세계 낯설게 보기
정수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집어들면서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한국 사람이라면, 아니 한국 사람 뿐 아니라 한국 사람에 대하여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꼭 읽어야 한다. 내가 이렇게 호언장담하는 것이 모두에게 통용되지 않을 것이란건 알지만, 한번 읽는다고 해서 손해볼 것은 없으니깐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과 그 해법'에 대해 열띤 토론이 펼쳐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앉아서 유목하기' '당연한 것 전복하기' 이기 때문에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걸거다. 이미 진중권씨가 쓴 '호모 쿠레아니쿠스'를 보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느끼던 것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거짓인지 느낄 수 있었으며, '수유+너머'의 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얼마나 무조건 반사적인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게 뒤얽힌 이 때, 이 책을 만난 것은 오히려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오고 있던 것을 아주 일목요연하게 풀어주고 있다.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몇가지로 나누어 계보학적으로 분석하고, 거기에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우릴 보고서 우리의 단점을 논한 책들이 범람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지적들은 지극히 일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 것들이 태반이기에 보고 나서도 그 편협한 관점에 화가 나기 일쑤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 사람이 가진 문화적 문법을 그 자체로만 판단하고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지 계보학적으로 탐구하고 있기 때문에 신빙성도 있고 수긍하게 된다. 물론 그걸 지나친 일반화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의 문화적 문법을 알고 그 당연한 것들과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이 책은 한번 읽고 읽었다고 덮기에 아까운 책이다. 그래서 두고 두고 읽을 생각이다. 그래서 나의 문화적 문법들이 바뀔 때까지 말이다.
기계란 무엇인가? 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저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래밍한데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물체를 기계라고 한다. 그 기계를 이해하려면 당연히 그 프로그램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만 파악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을 기계라고 할 수 있는가?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지면 태반이 화들짝 놀라면서 '뭔 시덥지 않는 질문을 던지냐는 듯'이 째려볼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은 기계이다. 이 말을 듣고 너무 성급하게 화내진 말라. 차근 차근 이유를 들어보며 반박해도 늦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동감하게 된다면 인간 기계를 이해하려면 프로그램을 이해하면 되겠다는 논조도 가능할 것이다.그럼 이제부터 이유를 들어보자.
"불행히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기준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잣대, 그리고 우리가 되고 싶은 이미지, 가장 갖고 싶은 것, 최고로 생각하는 가치 등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게 아니다. 그것들은 어느샌가 우리 머릿 속에 프로그램화된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비추어 다른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 프로그램이 입력되는 과정은 우리가 하나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실존하는 방식 그 자체이므로 완전히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이다."
이 글은 고병권씨가 쓴 '공각기동대'의 감상평이다. 이미 나의 페이퍼에서 인용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나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일방적인 프로그래밍의 과정일 뿐이다. 국가관, 화폐관, 그리고 종교관에 나라는 개체가 포섭되는 순간 난 국가적 기계, 화폐적 기계, 종교적 기계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프로그래밍된 것들을 이 책에선 '문화적 문법'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책에선 그런 문화적 문법을 더욱 세세히 파고든다. 단순히 현재의 것들만이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 과거 종교관에 의한 사상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이다. 지금 한국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과거의 연속이라면 그 말 또한 거부할 수 없으리라. 이 말을 듣고 있으면 이런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그럼 반항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은 뭐란 말이냐?". 물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순응만 하진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머지 않아 그 반항과 비판을 멈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 반항과 비판엔 무조건적인 거부나 신체의 자유을 만끽하고자 하는 바람만 있었을 뿐 어떤 철학이나 체계적인 비판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한계를 알게 되었다면 그걸 넘어서려 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터.
그렇다면 어떻게 기계적인 순응의 삶을 떠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바로 해답은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 이다. 이 말은 함석헌씨가 했다는 말인데, 짧지만 강한 여운을 주는 말이다. 생각한다는 건 나에게 주어진 상황들이나 여건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내가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들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판단해본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능동적인 주체를 만들어갈 수 있고, 세상을 어떤 굳어진 시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편견과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면 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 그런 능동적이며 편견 없이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개인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며 '문화적 교양층'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개인주의와 문화적 교양층에 대한 설명은 본 책을 읽으며 맘껏 사유해보도록 하자. 이런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우린 나라고 규정되었던 갖가지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걸 버리는 게 왠지 줏대 없어 보일지라도 그게 잘못된 것임을 안다면 2보 전진을 위해서 1보 후퇴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술렁임으로 인해 스스로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힘겹게 싸워 얻은 것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미 강을 건넜다. 강 건너편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타고 온 뗏목을 깡그리 불쌀라버린 것이다. 강을 건넌 우리에게 남은 길은 '용감해지는 길' 뿐이다. 이제 우리는 오로지 '걷기로 하자'. 아무튼, 이곳에서 빠져나가자.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널 수는 있지만, 강을 건넌 후엔 뗏목을 버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거다. 뗏목이 아깝다고 그걸 짊어지고 나아가려 한다면 결국 뗏목도 자신도 주저 앉을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자. "문화적 문법을 바꾸는 일은 생각을 바꾸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까지 나가는 작업이다. 삶의 방식의 변화는 곧 사람의 변화다. 그러므로 문화적 문법을 바꾸는 일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러기에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530p)"라는 본문의 말처럼 힘겨운 싸움이지만, 이걸 끊임 없이 이뤄낼 때 "개인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세계와의 연관 속에서 재확인하면서 자신이 몸담고 살고 있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397P)" 하게 됨을 잊지 말자. 능동적인 신체가 되었을 때, 주위에서 만나게 되는 능동적인 신체들과 맘껏 접속하자. 그럴 때 변화의 강도는 더욱 세지며 탈력을 받게 될 것이다.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날을 헤매일까
왜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서태지와 아이들 3집 '교실이데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