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하루-150년만의 공개 카톨릭 신학교 ', '길 위의 신부들-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를 보고 

  왜 사는 거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사냔 말이다. 친구의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졌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정의 짐을 어깨 가득 지고서 정작 자신을 죽여가는 것만 같아 그게 답답했을 뿐이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일방적인 도움은 받지 않는 게 좋다. 언제든 족쇄가 될 수 있으니까. 그건 내가 일방적인 희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건 상호 간에 의존적인 관계로 만드려 어느 순간엔 서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게 될 테니까. 어느 순간 그 친구가 "집에 돈을 다 대주느라, 난 아무 것도 못하고 요 모양, 요 꼴이야."라고 자조하는 말을 한다면, 그건 확실히 자신이 판 무덤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리라. 친구의 상황이나 나의 상황이 다른 건 별로 없다. 단지 난 내 앞 길에 대한 중압감만을 느끼며 나의 길만을 간다는 점이 다를까. 여기에 멈춘 우리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건가? 





카톨릭 대학교는 7년 과정이었다. 사제가 된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다. 가장 인간적인 성욕, 명예욕을 포기하고 한 세상 자신이 믿는 신만을 의지하며 나가야 하는 거니까. 더욱이 모든 것들이 짜여져 있다. 그 길에 들어선 이상, 그 답답함이 싫다고 해서 나올 수도 없다. 끼가 많던 그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들을 승화시키며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한 가지만 바라보고 물질적인 욕망이나 사회 진입의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기에 그들이 더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지금의 나의 답답한 현실이 반영된 해석일 뿐임을 안다. 어쨌든 그들은 사회에서 쓰임 받을 것이기에 그게 부러운 것이었겠지. 하지만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나갈 수 있느냐고 한다면 나는 손사래를 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맘만 같았을 뿐, 그 길은 서로 달랐으니까.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란 이름을 듣게 된 건 작년 촛불 집회 때였다. 그들은 삼성이란 거대 권력과 싸웠고 처참하게 패했다. 진실이 가려지고 어둠이 득세하는 세상을 목도한 것이다. 그들은 그런 억울한 상황에서도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세상에 묻힌 어둠을 드러내고 외칠 수 있는 그들이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현실을 지배하는 가치들에서 일정 부분 떨어져 있고 신의 보호를 믿는 사람들이기에 그런 대단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아니, 모든 신부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니까 그들이 그만큼 더 깨어 있다는 증거겠지. 그 분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더불어 사는 삶'에 도움이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각 자의 길이 있다. 그건 나 혼자 방탕하게 살아도 된다는 식의 말은 아니다. 어떤 선언 뒤엔 그 선언에 따른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니까. 그들에게 왜 사냐고 하면 그들은 웃을 것이다. 여기에 어떤 수식 따위가 필요할까. 그럼 뭐하러 그런 길에 들어섰고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게 옳은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라 말하겠지. 무언가 그로 인해 주어질 떡고물이나 명예 따위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행동은 더욱 칭송 받고 사람들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이리라. 내가 이 두 편의 천주교 관련 방송을 맘이 뭉클해졌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나의 삶의 지표가 될 이야기들. 정령 그렇게 자신의 일을 초연히 해나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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