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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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의 작품 중 워낙 알려진 작품이라(상도 많이 받고) 기대를 하고 보았는데 워낙 예스런 표지에 한 번 놀라고, 예스런 번역에 또 한 번 놀랐다. 잘 모르는(르 귄이 만들어낸) 단어와 개념이 많아 원서 대신 번역서를 일단 선택했는데, 다음에는 원서로 바로 갈까 하는 생각도 들고. 1974년에 발표된 소설. 인류의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향하는 시기에 착취자와 피착취자, 아나키즘과 아키즘, 과거와 현재, 부분과 전체, 영속과 무한의 대비를 통해 지구인에게 고착화된 세계관을 뒤집는 거대한 헤인시리즈의 대표작. 옛 소련의 집단농장과 지금 현재 쿠바의 자발적 빈곤이 떠오른다. 어느 누구도 다시 그 시절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한다. 과연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 빈곤이 탐욕의 정점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는 지구인들에게 가능할까. 여전히 공산주의는 의미있는 실험이며 앞으로도 보다 개선된 형태의, 보완된 공산주의 가능성을 희망하는 한 사람으로서 <The Dispossessed>는 현실감 있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틈을 엿보게 해준다. 제아무리 낯설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그나저나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뭘까? 교조화된 공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었나? 쿠바가 아직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가 되고 싶다고 나서는 나라는 없겠지? 우리보다 의료와 교육이 앞서지만 더운 여름철 선풍기 하나를 얻지 못해 줄을 서야 하는 곳이라면. 세계 제일 강대국에 사는 사람들이 의료보험이 없어 수술을 받기 위해 쿠바로 오지만 그곳에서 사는 것은 원치 않는 곳이라면.  출간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속에서 빛바랜 아나키즘을 쓸쓸하게 추억하지 않기를. 내 안의 트럼프, 내 안의 박근혜와 싸우는 것이 힘겨웠듯 앞으로 더한 내 안의 000과 대결해야 하는 지금. 헤인시리즈가 얼마 만큼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좀 더 여행해 보아야 알 것 같다.



우리에겐 그것밖에 없소. 오직 서로밖에. 여기 당신들은 보석을 보지만 거기서는 눈동자를 봐요. 그리고 그 눈 속에서 장려함을, 인간 영혼의 장려함을 보는 거요. 우리의 남자와 여자들은 자유롭기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유롭소. 그리고 당시들 소우자들은 소유당하지. 모두들 감옥 속에 있어. 각각이 외롭게, 고립되어, 소유하고 있는 쓰레기더미와 함께. 당신들은 감옥에서 살고, 감옥에서 죽소. 내가 당신들 눈 속에서 볼 수 있는 건 그게 다요. 벽 말이야, 벽! (261)

반려 관계 역시 자발적으로 구성되는 연합이었다. 되어 가는 한에는 되어 가고, 되어 가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가 아니라 기능이었다. 개인의식 외에 다른 구속력은 없었다.
막연한 기간의 약속일지라도 약속이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오도의 사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변화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그녀의 주장은 약속이나 맹세를 무효화시키는 듯 보엿지만, 사실은 그 자유야말로 약속을 의미있게 했다. 약속은 주어진 방향이요 선택의 자가 제한이었다. 아무 방향도 주어지지 않고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썬택하고 변화하는 자유는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감옥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가 만들어 낸 감옥, 어디로 가든 별다를 게 없는 미로 속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오도는 약속, 맹세, 성실이라는 개념을 자유의 복잡성에 있어 필수적인 것으로 보게 되었다. (280)

불성실하다고 해서 어떤 법적 도덕적 구속이 가해지지 않는 사회에서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성실함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언제든 닥칠 수 있고 몇 년씩 이어질 수도 있는 이별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그 기간 동안 성실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도전받는 것을 좋아하고, 역경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법이다. (281)

나의 세계, 나의 지구는 폐허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망가뜨린 행성이죠.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번식하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싸워 댔고 죽었어요. 식욕도 폭력도 통제하지 않았죠. 적응하지 않았어요. 우리 자신을 파괴한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세상을 먼저 파괴했죠.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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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27 1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바나에 한번 가야하는데 ㅎㅎ 동감이에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나뭇잎처럼 2021-12-27 16:05   좋아요 2 | URL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에 가서 신나게 몸도 흔들고요. ㅎㅎ 고맙습니다. ^^

PersonaSchatten 2021-12-27 1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느끼기엔 원서도 예스러워요. ㅋㅋㅋ 저 올 초에 이거 원서로 읽다가 적응 못해서 아직 못 읽었어요. 완독 축하드립니다!^^

나뭇잎처럼 2021-12-27 16:07   좋아요 1 | URL
하. 그렇군요. 워낙 문장이 좋다는 칭찬이 많아서 .. 넘 기대했나봐요. ㅎㅎ 당대를 꿰뚫는 오늘의 SF의 심장은 어디에 있을까요? 부디 몇 줄 읊어주시면 따르겠나이다... 왠지 스티븐 호킹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그레이스 2021-12-27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적인 시선으로 보면 쿠바는 후진국이죠.
조금 더 뒤에 평가될 부분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책읽기가 바빠서 읽다가 멈췄는데 🍃처럼님 덕분에 기억이 났었요
다시 펼쳐야겠네요.
아무래도 책장파먹기를 해야할듯요^^
그런데 오늘도 배송될 책이 있다는...!

나뭇잎처럼 2021-12-27 16:12   좋아요 2 | URL
아무도 읽으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는데 스스로 만든 책 무덤에 파묻혀서는 ㅋㅋㅋ 그쵸? 올해는 정말 조금씩, 천천히, 다시 한 번, 재독의 즐거움에나 빠져보자 했는데... 왜 자꾸 뭐가 오는 걸까요. 멀리서도 오고, 가까이서도 오고, 킨들서도 오고, 오더블에서도 오고... 인류의 미래가 어디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쿠바가 되었든, 북유럽이 되었든. 부자들만 가는 화성에 인류가 미래가 있는 건 결코 아닐텐데 말입니다. 내 안의 탐욕을 바로보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를 희망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올해도 열심히 파셨듯이, 내년에도 즐겁게 파먹기를 계속하시길요.^^ 여럿이 하면 좀 덜 외로운 거 같기도 하네요. ㅎㅎ

mini74 2021-12-27 1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나뭇잎처럼님 넘 재미있어요. 동네 슈퍼가듯 아바나에 한 번 가야 하는데. 넘 멋진 첫 문장. 전 르 귄 소설이 어렵더라고요 ㅠㅠ

나뭇잎처럼 2021-12-27 16:20   좋아요 1 | URL
벌써 몇십 년 째 마음에 품고 있으니 동네 슈퍼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맞는 거겠죠? ㅎㅎ 전 어렵다기보다 넘 직설적이어서 약간 놀랬어요. 문학이란 게 은유와 상징과 뭐 그런 좀 복잡하면서도 손에 가물가물하지만 두고두고 떠올려보면 뭔가 좀 다른 것 같고 하는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정공으로 치고 들어오시니까 프로파간다(?) 그런 느낌도 나고, 연설문(?)인가 싶을 때도 있고. 아직 작가의 극히 일부분의 작품을 읽은 상태가 뭐라 단정하긴 그렇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많은 SF 작품들에 양분을 제공하신 건 맞는 거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익숙하게(좀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거 같고요. 일단 몇 권 더 가보려고요. ㅎㅎ
 

We are all inclined to be quick with the verdict that ‘things do not look like that’. We have a curious habit of thinking that nature must always look like the pictures we are accustomed to.


We are all inclined to accept conventional forms or colors as the only correct ones.


Look at the world as if we had just arrived from another planet on a voyage of discovery and were seeing it for the first time, we may find that things are apt to have the most surprising colours. Now painters sometimes feel as if they were on such a voyage of discovery.


There is no greater obstacle to the enjoyment of great works of art than our unwillingness to discard habits and prejudices.


OBJECTS MADE BY HUMAN BEINGS FOR HUMAN BEINGS


Anybody who has ever tried to arrange a bunch of flowers, to shuffle and shift the colors, to add a little here and take away there, has experienced this strange sensation of balancing forms and colors without being able to tell exactly what kind of harmony it is he is trying to achieve.


In every such case, however trivial, we may feel that a shade too much or too little upsets the balance and that there is only one relationship which is as it should be. 


He may suffer agonies over this problem. He may ponder about it in sleepless nights; he may stand in front of his picture all day trying to add a touch of color here or there and rubbing it out agin, though you an I might not have noticed the difference either way. But once he has succeeded we all feel that he has achieved something to which nothing could be added, something which is right - an example of perfection in our very imperfect world.



One never finishes learning about art. There are always new things to discover. It is infinitely better not to know anything about art than to have the kind of half-knowledge which makes for snobbishness.



TASTE CAN BE DEVELOPED


To talk cleverly about art is not very difficult because the words critics use have been employed in so many different contexts that they have lost all precision. But to look at a picture with fresh eyes and to venture on a voyage of discovery into is a far more difficult but also a much more rewarding task. There is no telling what one might bring home from such a journey.




10년 전쯤인가. 


뉴욕 어느 서점에선가 도판이 좋아(미술책은 역시 Phaidon) 굳이 무거운 가방에 하나 더 얹어 산 것이 곰브리치의 미술이야기(The Story of Art). 대문자 A를 쓰는 Art 같은 건 없다고 멋지게 포문을 여는 이야기답게 이 책은 일반 대중, 그것도 예술에 대해 잘난 체 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전문용어를 최대한 자제하여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글이다. 그렇게 많이 소개하는 작품과 작가들 중에 여성작가와 여성작가의 작품이 극히 드물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이 책을 굳이 이제서야 펴든 이유는 뭘까. 아니 펴들게 되었던 이유는? 정말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절대 허투로 읽지 않겠다는 결기였던 것일까. 어느 날 문득 펴든 문장은 영어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 모국어처럼 친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내가 무척이나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10년 전보다 영어 실력이 조금이나마 향상되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냥 딱 지금 내가 너무도 읽고 싶은 책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곰브리치가 말한 것처럼 ‘최대한 쉽게’ 쓰여져서 그런 지도 ㅎㅎㅎ. 이미 그 책을 살 적에도 몇 줄 읽어보고 이 정도면 읽는 데 크게 무리 없겠다 싶어 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물론 그렇게 산 많은 책들 중에 먼지를 쓰고 앉아있다가 소리없이 방출된 아이들도 여럿 있긴 하지만. 


결론은 지금이라는 것.


미술에 관한 책은 늘 관심 속 중앙에 자리 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시각으로 누구나 아는 그림을 그저 그럴 듯하게 이야기하는 책들을 늘 경계해왔다. 그래서 그나마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손꼽는 책이 조중걸의 <근대미술><중세미술><고대미술><현대미술> 시리즈. 예술이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이 책은 미술사책이자 철학책에 더 가까운 책이다. ‘형이상학적 해명’이란 부제가 이를 뒷받침한다. 아직 해외 미술사가들의 연구를 많이 읽진 못했으나 ‘형이상학적 해명’을 바탕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집요하게 판 책은 거의 유일무의하지 않나 싶다. 미국 맥그로힐 출판사에서 미술 교과서로 쓰고 싶다고 계약 중인 걸로 안다. 서양예술사(미술사, 음악사, 문학사)와 수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인생의 오랜 시간을 신대륙과 구대륙의 미술관 근처에서 맴돈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늦게나마 곰브리치를 시작한 이유는.


미술사에서 가려진 여성의 시각, 역할, 지위, 의미 등을 다각도로 살펴보기 위해 기존의 시각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다. 지금 열심히 바다 건너 오고 있는 <A Companion to Feminist Art>를 영접하기 위한 밑작업이랄까. 손바닥만 한 책이지만 50년 넘게 고전으로 칭송받는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를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이미 곰브리치 책을 좀 삐뚤게 보기 위해 읽는 것 같은 생각도 없지 않지만 예술에 대한 스노비즘을 거부하며, 어떻게 하면 편견에 근거해 판단하는 것을 배격하고, 이제 막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내린 생명체처럼 신선한 눈으로 작품 나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지 역설하는 그의 얘기에 조용히 물개박수를 치지 않을 수는 없다. 


사보지도 않고,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서서 000미술관, 000와 함께하는 미술관 기행 같은 류의 책들은, 잠깐 잠깐씩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강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하지만 곰브리치 말마따나 예술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맥락에 놓인(맥락이 없으면 설명이 불가능한) 작품들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그저 ‘유추’할 따름. 그나마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아주 적은 지식의 양으로.


겨울이 추워 다행이다. 

꼼짝 없이 의자에 착석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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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1-12-26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Chapter 27 에서 드디어 여성 작가,
Käthe Kollwitz 나옵니다.

이 책은 역사를 가로질러 온갖 visual art pieces 를
소개하고 보여줌으로서 우리들을
예술의 세상으로 초대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책의 반 이상이 사진이라서 이 책이 좋습니다.

그래서 Gombrich 가 한 말은 그저 이 책의
첫 번째, 두 번째 Sentences 만 생각날 뿐!
″There really is no such thing as Art.
There are only artists.″


나뭇잎처럼 2021-12-26 19:29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첫 문장에 환한 따뜻한 노란색 형광펜을 칠해두었죠. ㅎㅎ 도판이 많아 책은 두꺼워도 읽는 속도가 붙어 좋아요. 아주 아주 좋은 건 전체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요. 덕분에 따뜻하고 풍요로운 연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초란공 2021-12-26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오늘 책정리하다가 이 책을 ‘발굴‘했는데요^^;; 책이 무거워서 이제 들고다니지도 못하겠어요...ㅜㅜ

나뭇잎처럼 2021-12-26 19:29   좋아요 1 | URL
하하. 그렇게 오래 간직하셨다는 건 언젠가 이어질 인연이라는 뜻일 거예요. ㅎㅎ 저도 한 10년 이고 지고 다니다가 이제사 클릭! 이제사 만날 인연이었던 거죠. ^^

초란공 2021-12-26 19:40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판매된 7백만 부 중 하나의 인연으로요! ^^;

나뭇잎처럼 2021-12-26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살 적만 해도 6백만 부였는데요 ;;;;; ㅎㅎ

PersonaSchatten 2021-12-26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그마한 책으로 가지고 있는데 어째 계속 읽다 말다 읽다말다 하게 되는 거 같아요. 언젠간 저도 완독하고 싶네요. ㅎㅎㅎ

나뭇잎처럼 2021-12-27 16:20   좋아요 1 | URL
저자가 말한 것처럼 도판이 없는 건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도판이 핵심인 거 같아요. 도판을 실물로 보면 더욱 좋겠지요. 읽어서 상상하는 건 아쉬운 일이죠. 완독보다는 미술관 완주를 꿈꾸어 봅니다. ㅎㅎㅎ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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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연말이면 워크샵을 빙자하여 모처에 가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진지하고도 본격적인 대화를 다각도로 나누곤 한다. 일명 부부워크샵. 


아이가 없는 대신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는 커다란 개와 함께 살며 우리는 평균 이상의 대화와 친밀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부다. 하지만 문득문득 상대방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는 자신은 엉키고 꼬이고 삐뚤어진 이미지일 때가 있다. 아니면 늘 그렇지만 평소에는 적당히 위장하고 사는 건지.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최근 극렬한 논쟁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변한 적도 더러 있고, 워낙 한 번 물면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 탓에 출구를 열어놓지 않는 집요한 추궁이 파국으로 치달은 적도 있었다.


결혼 13년차. 

아직도 싸울 게 남았나 싶은데, 외려 시간에 고착된 에피소드는 곰탕처럼 우리고 우려서 전가의 보도가 되었으니 ‘아직도 그 타령이냐’를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궁극의 깔때기로 수렴되는 상황.


이렇게 다른 데 과연 사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하고, 아니 그렇게 넌더리가 났으면 왜 헤어지지 못하나 하는 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는다. 습관인가? 


대체 그 많은 부부들은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걸까.

알 수 없는 대목.


지독한 끝장 토론 끝에 우리가 찾은 결론은 

<A New Eearth: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각자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


각자 서로에게 혹은 상대방, 또는 자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포스트잇에 적어 이리저리 섞은 후

제비뽑기해서 그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다.


ex) 

- 현재에 머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우리는 어떻게하면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 상대방이 자신의 에고를 건드리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런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 자신의 고통체에 가장 영향을 미친 경험은?

- 목적의식을 갖지 않는 것과 목표가 없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등등


우리는 중세풍의 멋진 브루어리 한자리에 앉아 꼬박 3시간 동안 워크샵을 진행했다. 


사실 이 책을 다 이해했는지도 모르겠고, 과연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 맞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책에서 이야기한 자아, 현존, 형상, 의식 같은 주제로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과 그 문제들을 들여다보는 시각을 환기했다는 것이 적지 않은 소득이다. 우리는 결국 더 더 깊이 들어간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 웅크리고 있는 서로에 대한 트라우마(서로에게 받았던 상처)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트라우마가 계속 촉수를 뻗쳐올 때마다 관계가 잠식당했다는 걸 알게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서로에 대한 상처를 기억에서 ‘소멸’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쪽을 선택했다. 앞으로 그 상처를 다시는 꺼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고, 기억에서 지우는 걸로. 화형식을 하고 싶었지만 남의 업장에서 화재위험을 무릅쓸 순 없는 거라 상상 속에서만 날려버리는 걸로. 어차피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스토리들이 다 머릿속에서 지어낸 것 아닌가. 우리는 그 머릿속에서 고약한 암덩어리를 파내버리는 데 기쁘게 동참했다.


결혼 13년차라 열정적이고 뜨거운 밤을 보내진 않았지만 호텔에서 낯선 잠을 자고 여유있는 조식을 먹고난 후 예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엄청난 걸 발견했다.


더.이.상 싸우지 않았다.


언제든 뭔가 터질 것 같은 미묘한 마찰이나 거슬림 같은 것도 없었다. 

한층 더 서로를 아끼고, 티나지 않게 서로를 위해 물처럼 움직였다. 


이렇게 보람있는 부부워크샵은 실로 처음.


늘 뭔가 반성하고 전망을 세우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잔존감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정말 최대한 솔직하게 자신의 것을 털어놓고 묵은 것들을 지우고 나니 마음이 너무도 홀가분했다. 


그러자 찾아온 새로운 세상.

A New Earth.


이 자리를 빌어 에크하르트 톨레에게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덕분에 부부가 몹시 화목해졌다고.


아마 살면서 다시 또 에고가 뿌지직 하고 튀어나오는 순간이 분명히 있을텐데, 

두 사람은 그걸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에고에게 속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로에게 거울처럼 그걸 의식하게 해주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절감하게 되었으니.

이처럼 고마운 소득이 없다.


일단 당분간은 그러는 걸로.







결혼, 관계, 에고, 알아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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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22 0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글도 좋고
워크샾도 궁금합니다

나뭇잎처럼 2021-12-23 10:44   좋아요 1 | URL
헤헤. 글이 좋다니 과찬이십니다. 분명 좋았는데 까먹을 까봐 잽싸게 적어보았어요. 워크샵은 회사에서 하는 거랑 비슷했어요. ㅋㅋ 다만 쓸데없는 전망을 세우는 것보다 가장 필요한 뭔가에 서로 합의하는 게 달랐다는 정도. 해마다 조금씩 커리큘럼을 바꾸는 재미도 있고요. 올해는 톨레에게 큰 빚을 졌네요. ㅎㅎ

프레이야 2021-12-22 0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해마다 부부워크샵을요! 궁금하기도 하고 대단하시다는 생각도 들어요.
마음은 있어도 실천하기 쉽지는 않을 텐데 매해 하시다니요.
몹시 화목해지셨다니 몹시 좋아요^^
13년의 두 배가 넘어버리면 이러저러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답니다.

나뭇잎처럼 2021-12-23 10:46   좋아요 1 | URL
하. 13년의 두 배가 되면 또 어떤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지나요? 정말 관성으로 사는 것만큼은 지양하는 일인데, 그 오랜 세월을 늘 현재로서 살 수 있을지, 하 궁금해지네요. 워크샵은 낯선 데 가서 하는 게 핵심이죠. ㅋㅋ 그만큼 떠나는 설렘이 있고요. 그래서 매년 하게 되는 거 같아요. 떠나기 위한 핑계? 구실? ㅎㅎ 당분간 워크샵 약발이 지속되는 거 같아 모처럼 흐뭇할 뿐입니다. ㅎㅎ

blanca 2021-12-22 17: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저 이 책 꼭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좋은 글 감사해요. 그냥 상황, 현실에 마냥 쓸려다니느라 올해가 어떻게 간지도 몰랐는데 스스로와 삶을 돌아봐야 할 시간을 확보해야겠네요.

나뭇잎처럼 2021-12-23 10:51   좋아요 0 | URL
코로나 덕분인지, 탓인지 송년모임을 많이 갖진 못했지만 이렇게해서라도 한 해를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고런 핑계로 문득 문득 삶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도 재미난 거 같고요. 워낙 많이 팔린 책이라 책에 대한 칭찬은 더할 필요가 없을 거 같지만, 오프라 윈프리가 이 책을 읽고 자기 삶을 바꾼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라고 말하면서 저자랑 둘이서 팟캐스트를 열었어요. 챕터 바이 챕터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팟캐고요. 아 또 둘이서 그렇게 한 챕터당 한 시간씩 딥하게 하니까 책의 보충교재(?) 같은 효과도 있더라고요. 암튼 남편에게 추천하고 고맙다는 칭찬 받은 몇 안되는 책 중 하나입니다. ㅋㅋ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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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짝짓기에 관한 소설. 저자는 한 번도 내딛어 보지 못한 습지로 우리를 안내하지만 서사는 진부하며 이야기는 단조롭다. 아마존에서 경이적인 리뷰와 판매고를 성취한 건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유명한 책을 선택한다? 유명 인플루언서의 지지? 광고? 아니면 무난한 대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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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4 1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뭇잎 처럼님 !
가족 모두 행복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
해피 크리스마스 !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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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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ଫ/⌒づ🎁

나뭇잎처럼 2021-12-24 21:22   좋아요 0 | URL
늘 들려주시는 귀한 음악 선물 감사합니다. scott님도 메리 크리스마스하세요. ^^
 
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1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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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남은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어디서 어떻게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갈지. 어슐라 K. 르 귄은 그 전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성은 과연 필요할까? 우리가 성의 결과라고 여겨지는 행동 중에서 사실 우리가 성에 기대한 결과는 얼마나 될까? 만약 성이 없거나 또는 양성을 가진 인간들에 대해 쓴다면?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인류학자 아버지와 동화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 명문대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역사학자 교수가 된 남편을 만나 평생 세 아이를 두며 SF로 노벨상을 받는다면 제1순위로 꼽히는 작가가 그런 상상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라고 여기는 건 지나친 편의주의일 것이다. 그에게 게센인의 이야기가 찾아온 건 그의 말마따나 '그것이 다가올 길을 그가 준비했기' 때문이다. 책의 후반부를 압도하는 겨울 행성에서 빙하는 건너는 일은 그의 오래된 폴더 '겨울'이라는 곳에 오랫동안 쌓여있었다고 한다. 겨울의 혹독함에 대한 자료. 


작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정작 하고 싶었던 질문은 (양성을 가진) 그 존재들은 정말로 우리와 그토록 다를까? 우리 성이 정말로 그토록 절실할까? 우리 성이 정말로 그렇게 명확히 정해져있고, 그토록 중요할까? 였다고 했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케메르'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밝혀 놓았다. 케메르는 (내가 이해한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발정기' 상태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포유류에서 나타나는 발정기. 발정기 이외의 시간에 게센인들은 성적 특이성이 발현되지 않는 '인간'으로 산다. 


게센의 사회는 그 일상적 기능에 있어서나 지속성에 있어서 성이 없다. 전 생애의 5분의 4기간 동안 이들이 성적으로 전혀 자극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17-35세의 모든 사람이 '출산에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이곳에서는 다른 세계의 여성들처럼 생리적/육체적으로 완전히 출산에 '묶일' 일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아이들은 어머니나 아버지와 정신적-성적 관계가 없다. 상대의 동의 없는 성교나 강간은 없다. 다른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성교는 상호 유인과 동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른바 인간성에 대한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 즉 보호적/피보호적, 지배적/순종적, 주인/노예, 능동적/수동적 따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센인들은 타인을 남자나 여자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잠재적으로 양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완전한 형태로도 갖고 있다.


남자는 자신의 남성다움을 남들이 주목해주길 원하며 여자는 자신의 여성다움이 인지되기를 원한다. 주목과 인지하는 방식이 얼마나 간접적이고 미묘한가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겨울 행성에서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는 오직 하나의 인격체로만 존중되고 판단된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경험이다. 
실험을 행한 이들은 아마도 지속적인 성적 능력을 갖지 않은 인간이 지성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를 확인해보고 싶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그들은 지나친 소모와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대 헤인인들은 다른 포유류와는 달리 인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지속적인 성적 능력과 조직화된 사회의 공격성이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전쟁을 순전히 남성의 배설 행위, 즉 대규모의 강간 행위로 보고, 그들의 실험에서 강간하는 남성성과 강간당하는 여성성을 영원히 제거하려 한 것일까? 

 

욕망도 부끄러움도 없는 이곳에서는, 제아무리 비정상이라 할지라도 남들로부터 따돌림받는 일은 없었다. 게센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성이나 다른 인간적인 요소가 아니라 환경, 추운 세계이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잔인한 적을 가지고 있다. 



어슐라가 페미니스트 작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남녀성차, 그리고 그 성차에 대한 가치의 차등 부여, 그리고 나아가 보다 억압적인 우위에 놓인 남성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양성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차분히,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로 이루어진 세상. 


카르히데. 이곳에서 현재는 늘 원년이다. 이곳 사람들은 유일무이한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를 헤어려 나간다. 늘 원년을 사는 겨울 행성 주민들에게 진보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다. 


카르히데인이 아이를 때리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의 부드러운 태도가 특히 인상 깊었다. 아주 정중하고, 효과적이며, 아이에 대한 소유욕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성' 본능이라 부르는 것과 다른 점은 아마도 그 무소유의 태도일 것이다. 


카르히데와 오르고레인은 불화한다. 그곳 사람들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고, 반목한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으로 응축되어 표출되는 '전쟁'이란 단어는 없다.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 그로 인한 착취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전쟁을 남성의 배설 행위, 대규모의 강간 행위로 보아 게센인들에게 그런 유전적 실험을 감행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주인공의 의문에 작가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회사에서 닉네임을 '우르술라'로 썼다. 마르케스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써서 잘난척하는 영미 편집자들에게 퍽큐를 날리며 '소설이란 무엇인가'로 수백년을 머리 싸맨 사람들을 한방에 날려버린, 그 소설 속의 대모 같은 주인공, 그 우르술라에서 따왔다. 많고 많은 직원들 중에서 존, 메리, 마이클은 A, B, C로 구분해서 부를 정도로 차고 넘쳤지만 우르술라는 유일무이했다. 나는 그것을 자부심으로 여겼다. 


하지만 왜 우르술라인지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간혹 외국인 중에 Mermaid? 하고 묻는 이가 더러 있었다. <인어공주>에 나오는 백발마녀의 이름인가 보았다. 디즈니 인어공주는 본 적이 없어 놉, 이라고 답하며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를 운운하면, 아, 아 알겠다는 듯 눈을 흐렸다. 난 모르는 책이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래 너 책 좋아하는구나, 알겠어 너 문학소녀라는 거, 정도로 알 듯한 표정. 난 굳이 묻지 않았는데, 그 책이 왜 영미권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지, 어떻게 작가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그 잘난 영미문학 크리틱들을 넉다운 시켰는지 설명해주었다. 더러는 혹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더러는 '자자, 이제 회의하자'라는 눈길로 내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아무렴, 아이스 브레이킹하기로 이만한 주제가 없지. 아이스 브레이킹은 그쯤에서 끝내는 게 가장 아름답고.


한국인들은 '우.르.술.라' 네 음절, 외국인들은 '어ㄹ.슐.라' 삼 음절로 내 이름을 발음했다. 하지만 숫적으로 한국인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우르술라님'하고 오음절로 발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슐라 K. 르 귄을 몰랐다. 만약 그녀를 알았다면 One more 어슐라 르 귄이 얼마나 SF의 대모인지 침이 마르게 설명을 했을텐데. 안타깝다. 


'SF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친구에게 말한 후 무지를 혹독하게 질책 받은 다음 그 말은 삼갔다. '무협지처럼 스토리가 너무 패턴화되어 있다'는 말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영원의 끝>으로 쏙 들어갔다. 테드 창의 단편들을 읽다가 너무 매혹되어 흥분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번역본은 끝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테드 창의 단편들을 영문으로 읽다가 눈이 침침해졌다. 그렇게 나의 SF 경력(?)은 노루 꼬리보다도 짧다. 


어슐라의 책에 손을 대기로 마음을 먹은 건 그녀가 번역한 노자의 <도덕경>을 필사하고 부터다.  그녀의 아버지가 평소 즐겨 읽었던 책으로 어느 날 책 한 구절을 끄적이는 걸 보고 뭐하시냐고 묻자 자기 장례식에 쓸 문구라고 대답한 아버지를 따라 그녀도 <도덕경>을 평생 벗으로 삼았고 그녀의 장례식에 쓸 구절도 이미 다 정해놓았다. 바로 그 도덕경에서. <도덕경> 영문본은 차고 넘치는 데 조금씩 미묘한 문구의 차이가 있어서 뭐가 뭔지 조금씩 헷갈릴 때도 많고, 어떤 표현이 더 좋은 표현인지 잘 확신이 안서는 경우도 많다. 한글 번역본이야 어릴 적 읽었지만 그 번역도 그리 명확하진 않다고 읽을 때도 느꼈던 것 같다. 


세상이 좋아져 공책 한 바닥에 오른편에는 영문, 왼편에는 한문을 적고 의미의 공백과 격차를 나름의 두 언어 사이에서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메꾼다. 하나의 언어에 의지해 상상했을 때보다 좀 더 편안함을 느낀다. 어쩌면 한글, 영어, 한문 세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맞겠지. 그런 어슐라가 쓴 SF. 완전 끌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작한 그녀의 책이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장바구니에는 벌써 그녀의 다음 책이 담겨있고... 나는 주문 버튼을 누르고... 전집 말고 한 권씩 사자고 스스로를 달래고... 그러고 있다.





우리 사이에 이렇게 우정을 확신하게 된 것은 조금 전에 우리 사이의 성적 긴장을 진정시키는 대신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한 덕분인 듯했다. 추방된 우리에게 우정은 절실했으며, 그간의 험난한 여행의 밤과 낮을 견디며 잘 확인된 우정을 이제는 사랑이라 불러도 좋았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 사이의 차이점에서 생긴 것이지 유사점이나 닮음에서 싹튼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랑은 갈라진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 유일한 다리였다. 


지구에서 낳아 에큐멘이란 연합체의 특사로 카르히데에 파견된 겐리 아이. 그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주는 에스트라벤을 만나 카르히데가 에큐멘과 협력하도록 애쓴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에스트라벤과 함께 차가운 겨울 행성 카르히데, 그 중에서도 빙원을 함께 건너 목적을 이루고자 애쓴다. 두 사람이 나눈 건 우정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빈약한 지구인의 상상력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탄탄한 다리를 이를 단어가 없다. 우정 또는 사랑. 우정은 동성, 사랑은 이성? 아마도 카르히데 사람들이 부르는 '사랑'과 지금 이 시대 지구인이 부르는 '사랑'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지 않을까 예측할 뿐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훨씬 전에 구상해 놓은 걸 한 번 써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대한 전혀 다른 관념을 갖고 살아가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의 사람들에 대해서. 일단 어슐라 전작 읽기를 마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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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06 19: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르 귄 전작주의 시작!
응원합니다. 따라갈게요 페이퍼라도.^^
전집 말고 단행본으로 한 권 한 권 사는 거
재미나지요. 그게 더 좋더라구요 때때로 자주.

나뭇잎처럼 2021-12-07 09:37   좋아요 4 | URL
전집을 사지 않다보니 책장이 좀 들쭉날쭉하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저만의 일관성 같은 게 느껴지죠. 전작 표지를 예쁘게 뽑았더라구요. 구매욕을 자극해요. 이래저래 원하는 대로 사들이다가 결국 퍼즐 맞추듯이 다 꿰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ㅎㅎ

러블리땡 2021-12-06 20: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궁금해졌어요 장바구니 담아갑니다ㅎㅎ

나뭇잎처럼 2021-12-07 09:39   좋아요 3 | URL
저도 많이 궁금해져서 급 불을 당기는 중입니다.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했던 말이 잘 들어맞는 거 같아요. 두 번째 책은 <빼앗긴 자들>. 요건 또 어떤 실험일지!

mini74 2021-12-06 23: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방탄이 어슐러 단편을 언급하면서 아이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더라도요. 전작읽기! 응원합니다 ~

나뭇잎처럼 2021-12-07 09:36   좋아요 3 | URL
아 맞아요. 저도 뉴욕타임스 기사 읽다가 https://www.nytimes.com/2021/11/04/opinion/graeber-wengrow-dawn-of-everything-history.html <The Dawn of Everything: A New History of Humanity> 저자가 어슐러의 단편 <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란 단편 인용하는 거 보고 아마존에서 찾아보니 리뷰에 온통 BTS 이야기더라구요. BTS 노래는 1도 모르는데 그랬었었던거였더라구요. ㅎㅎㅎ 영면에 드신 어슐러 여사가 반가워하시려나. ㅎㅎ 따끈따끈한 다음 책이 도착했네요. 고고~~

서니데이 2022-01-07 2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사진 속 노트의 손글씨가 예뻐요. 부럽습니다.^^)

나뭇잎처럼 2022-01-08 10:40   좋아요 2 | URL
아. 좋은 소식 가장 먼저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풍성한 주말이 될 거 같아요.^^. 자판을 치고 살아도 한 자 한 자 종이에 적는 맛이 다른 거 같아요. 뭔가 진짜로 읽고 어딘가에 새기는 기분. ㅎㅎ 서니데이님도 좋은 주말 되세요^^

thkang1001 2022-01-07 21: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나뭇잎처럼 2022-01-08 10:4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쓴 지 좀 된 글인데 이렇게 소환되니 반갑네요. Thkang1001님도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주말 되세요. 전 우리 강아지랑 제주도 가는 중이에요. 새벽에 목포에 내려와 거기서 배타고 가요. 소풍가는 아이처럼 설레네요. 고맙습니다^^

thkang1001 2022-01-08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