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나는 봄을 싫어했다. 사춘기 시절에는 무서워하기까지 했다. 겨우내 죽은 듯 잠들어있던 나무들이 미친 듯이 꽃을 피워올리고 황무지인 줄 알았던 대지가 하루가 다르게 시퍼렇게 울창해질 때, 그 미친 듯한 생명력이 나를 두렵게 했다. 엘리어트가 괜히 4월은 잔인한 달이라 목멘 것이 아니라 믿었다.
언젠가 지구는 식물들에게 점령되고 말 거야. 우리 동물들은 다 저들의 양분으로 잡아먹힐 거야. 어쩌면 저들이 먹이로 삼기 위해 일부러 동물을 만들어내고 키우고 있는지도 몰라. 약간의 공상과학적 상상력이 더해져 식물이 떨어뜨려주는 과일 한쪽으로 간신히 연명해가며 덩굴에 묶여 오도가도 못하고 온몸을 뒤덮은 잔뿌리에 쪽쪽 내 몸이 빨려나가는 악몽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초록색 물감에 독 성분이 있었기에 많은 화가들이 죽거나 아팠었다는 걸 읽은 뒤에는 이거야말로 멋모르고 나대는 인간에 대한 식물의 준엄한 경고라 여겼다.
대학교 교양으로 <환경과 인간>이라는 과목을 들은 건 반성의 계기였다. 수업은 정말 지루하고 재미없었지만 교재만은 매우 흥미로웠다.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체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한 고발이 책장마다 선연히 이어졌고, 가이아 지구에 대한 강사의 신념이 서슬 퍼랬다. 연구는 열심히 하면서, 책은 잘 쓰면서, 왜 교수법은 엉망이냐 조금은 안타까워하며, 그 수업은 잠자는 시간이거나 다른 수업 과제하는 시간으로 유용했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강사의 모습이 왠지 이 책의 저자와 닮은 꼴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예삐꽃방을 비난하며 차라리 화분을 사라고, 아니면 아예 식물을 기를 생각을 하지 말라던 그녀의 당부가 이 책에서 느껴져 혹시 동일인물인가 작가의 나이를 슬쩍 확인해보기도 했다. 수업태도는 한없이 불량했으나 그녀 덕분에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뒤늦게나마 전해주고 싶다.
다만 이 책은 그때 그 분과 목소리는 매우 다르다. 때로는 마이크에서 삑 소리가 날 정도로 쇳소리로 열변을 토하던 그녀와 달리 저자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자분자분하다. 여러 번 접힌 자국이 있기에 인간이 어우러진 식뮬 풍경을 더 너그럽게 보고 계시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조용하고 낮지만 더 힘있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림이 있다.
뱀꼬리) 내 손으로 화분을 사진 않지만 어쩌다 선물 받으면 참 열심히 보살피는 편인데 항상 몇 달 못 가고 죽었다. 드디어 그 원인을 이 책 덕분에 알게 됐다. 난대 또는 아열대 지방에서 온 식물이 살기에 우리집은 항상 너무 추웠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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