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너무 추워 해떨어지기 전인데도 초등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울었다는데,
모진 애미 만난 나의 4살짜리 딸은 매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밤 10시에야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이유없이 심통을 부리기 일쑤인 딸은 오늘도 버스에서 내린 뒤 갑자기 함께 걷기를 거부했다.
한편으로는 길 한복판에서 아이와 씨름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러다 코베어갈 날씨에 아이가 감기걸릴까 걱정되고,
한편으로는 내 몸도 지쳤는데 피곤하여 짜증이 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저것이 부모 정이 고파 심술이 늘어가나 싶어 죄책감으로 싸아해진다.

어르고 달래고 나무라고 잠시의 옥신각신 끝에 다시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지만
딸아이의 표정은 영 시무룩하다.
아이의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바람에 정신없이 날라다니는 광고지가 우습다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는 아이. 그새 표정이 밝아진다?
혹은 아이는 이미 어른. 엄마 장단에 맞춰준다?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는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도 찾아내고,
바람에 흔들거리는 천막도 찾아내고,
바람에 버석이는 비닐봉지도 찾아내고,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가지도 찾아내고,
바람에 퍼덕이는 현수막도 찾아내고,
그리고 살랑대는 강아지풀도 찾았다.

"엄마, 강아지풀이 흔들거려.
그래서 강아지도 강아지집에 벌써 갔나봐. 아이, 추워 하고.
마로도 이제 우리집에 가면 되지.
(그리고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

배고프다고 보채는 딸아이에게 찬밥으로 김밥 몇 개 만들어 먹인 뒤,
이야 썩든 말든 양치도 안 시키고 옷도 안 갈아입히고 두꺼운 이불로 돌돌 말아 재우고,
아이 옆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울다가
내일은 일찍 퇴근할 수 있을까, 모레는 무조건 야근인데, 금요일이라 다를까,
이 생각 저 생각에 그쳤던 눈물 또 다시 솟아나고.
아이구야, 아이구야,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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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3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oninara 2005-12-1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엄마. 추운데 고생했어요.ㅠ.ㅠ
마로가 엄마맘 다 알거야. 나도 아이가 어릴때 일했었지만 친정엄마가 키워주셔서 정말 편했는데..같이 일하던 엄마들은 아이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었지. 그때 생각이 나네. 힝~~

세실 2005-12-13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조선인님 힘내세요. 마로한테 약한 모습 보이시면 넘 속상하죠...
아직 마로가 어려서 더 그러실꺼예요....
보림이는 엄마 직장생활하는 것이 더 좋데요.....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세요......

ChinPei 2005-12-1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마음 아프시죠?
그러나 마로는 그런 엄마를 가장 사랑하고 있을게요.
힘내세요. 그리고 걱정마세요.
세계에서 가장 마로를 사랑하시는 건 조선인님이시잖아요(그리고 남편님도).

날개 2005-12-13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씨가 추워서 마음이 더 그러신가봐요...
님도 푹 주무시고, 내일은 다시 활기찬 모습이시길 바래요.....

2005-12-14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5-12-1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야근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할 터인데...

아영엄마 2005-12-14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조선인님 우리 아그가 운 건 너무 약해빠져서 운 거지만 조선인님이 밤늦게까지 일하시고 마로도 늦게 집에 들어오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너무 울지 마세요..ㅠㅠ

chika 2005-12-14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근 없는 세상... 세상의 마로들을 위해.

하늘바람 2005-12-1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힘내세요. 야근하시느라 아이챙기시느라 힘드시죠? 하지만 아이와 함께 바람에 날리는 것들을 찾은 내용은 한편의 시같아요. 마로는 착하고 예쁜 마음을 가지고 클것같네요

paviana 2005-12-1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제 아이가 감기 때문인지 물 먹은것도 토하더라구요.약도 못 먹이고 점심먹은거 토한이래 암것도 못먹고 뒹굴뒹굴 둘이 1시까지 투니버스만 봣답니다. 아침에도 6시반에 일어나더라고요.배가 고파서 깬거 같아요.물도 천천히 씹어먹으라고 말해주고 왔는데, 다른데 별로 아프지는 않아하는데 기운이 없어서 학교 못가겠다고 하더군요. 선생님께 전화드렸고, 좀 있다가 이모가 대신 죽좀 먹이고 병원데려가겠다고 합니다.에휴 ...

2005-12-14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5-12-14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운내세요.

sandcat 2005-12-1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 끝이 시큰하군요.
아침마다 가온이와 한바탕 눈물의 이별을 하는 저로선 한숨만...
힘 내시길.

水巖 2005-12-14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야 힘내 ! 조선인님도.
어느쪽 할아버지라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네.

2005-12-14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2-14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 2005-12-14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짓을 하긴요. 살아가는것엔 어떤 변명도 이유도 없습니다.
힘내세요. 연말 넘기면 그래도 한가해지겠지요..

2005-12-14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조선인 2005-12-15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찌잉.

paviana 2005-12-15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애는 병원에서 약먹고 어제도 하루종일 방에서 누워 테레비 보고 책보고 뒹굴뒹굴 해서 그런지 저녁엔 죽먹고 오늘은 학교갔어요.요즘 감기는 토하는게 증상이라고 병원에서 그랬대요.마로도 감기 조심시키세요...

조선인 2005-12-15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파비아나님, 좀 나아졌다니 다행이네요.

로드무비 2005-12-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짜안하네요.
나도 우리 올케에게 신경질 안 내야겠다.
너무 늦게 오면 나도 모르게 입이 불퉁해지더라고요.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데 밤늦게는 차가운 김밥보다 팔팔 끓여서 죽처럼 먹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조선인 2005-12-1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로드무비님, 이 녀석이 죽을 안 좋아해요. 하다못해 국밥이라도 먹으면 좋을텐데, 저도 졸려서 그런지 김밥 몇 개 우물거리는 걸 더 좋아해요.

조선인 2005-12-15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새벽별님. 찌잉~

2005-12-15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12-16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5-12-18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너무 늦게 봤다 ...
측은한 조선인님 힘내세요.
마로가 어서 커서 엄마도 위로해주고 그래야 하는데 ...
그런데 너무 예뻐서 지금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쩍 들기도 ... ^^;;;

조선인 2005-12-1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발마스님, 저도 마로가 지금 이대로라면... 라는 생각 자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