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주이??): 이 글은 굉장히 길고, 두서가 없고, 장황하면서, 책과 상관없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안녕하세요.
제 소개를 조금 할께요. 저는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관련된 직업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저는 다소 특이한 편인데요, 작은 스튜디오에서 앨범을 제작해서 판매하는 인디밴드와 비슷하게 저도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서 파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파는 일'에 대해선 거의 신경쓰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만드는 일'이 대부분이죠. 이런 일을 보통 외국에선 ISV(Independent Software Vendor)라고 부르거나 그냥 쉽게 인디 프로그래머, 인디 소프트웨어 개발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최근엔 스마트폰 시장에서 이 용어를 곧 잘 쓰기 때문에 자기 소개가 다소 쉬워진 것 같네요.
(네, 저희 - 라고 쓰는건 미국과 유럽에 있는 동업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 회사도 아이폰 어플리케이션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앱은 - 적어도 외국에선 - 상당히 유명한 편이기도 하지만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부터 맥과 윈도우에서 제품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아이폰 일을 하는 회사' 라는 쉬운 소개는 하지 않는 편입니다. 보통은 '에- 음 홈페이지를 봐요' 라고 하죠)
'스타트업(startup)'이란 말도 안철수씨등의 홍보로인해 이제 국내에서도 많이 쓰이게 되었는데요. 보통 스타트업은 저희 같은 인디샵 보다는 투자를 받고 뭔가 세상을 바꿀만한 것을 만들어서 빠른 성장을 추구하는 회사를 지칭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타트업은 당장 돈이 되지 않아도 사용자를 많이 끌어모을 수 있으면 괜찮습니다. 저희는 그렇지 않구요. 예를들어 카카오톡은 스타트업이고 패닉 (http://www.panic.com/) 같은 회사는 - 돈을 많이 벌어도, 투자자가 없다는 측면에서 - 인디죠. 저희는 패닉을 지향합니다. 작고 쓸만한,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 아름다운 것들.
그럼 무엇을 만드냐구요? 패닉과 같이 주로 맥에서 구동되며 한 카피당 $20~40정도에 판매되는 소프트웨어를 만듭니다. 아이폰 앱들은 당연히 더 싼 편이구요. 오래된 제품 중엔 윈도우에서만 구동되는 것도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될 글은 이것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제품인지 다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거의 대부분이 '텍스트'를 다루는 것들입니다. 실제로 당신이 맥킨토시를 사용하고, 작가이거나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이면서 '맥에서의 글쓰기 환경'을 고민한적이 있고, 외국인이라면 (한국인 사용자들도 없지는 않지만 국내엔 프로모션을 전혀 안하기 때문에...) 상당히 높은 활률로 저희가 만든 제품을 사용하거나, 했거나, 최소한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같이 일하는 친구는 미국 메인주에 살고 있는데 저희는 스티븐 킹의 집에 찾아가서 (실제로 가까운곳에 살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가 만든걸 사용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자는 농담을 가끔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 아이북 같은 것이 언급되면 상당히 설레이는 저 자신을 볼 수 있구요. 왠지 예상에 이 아저씨는 그냥 기본으로 딸려오는 소프트웨어를 쓸 것 같지만...
저는 제 일을 굉장히 좋아하고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예전부터 꿈꿔 왔던 일이구요. 아직 갈 길이 많이 멀긴 하지만 상업적인 측면에서나 (감히 말하자면) 장인적인 측면에서도 어느정도의 성취를 달성하기 위한 초입에 발을 내딛었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매일하는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되짚어보면 이런 생각이 다 농담 같지만요. 제가 책을 읽거나 작가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입니다. 이 일은 가내수공업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컴퓨터를 앞에두고 우리의 두 귀 사이에 있는 물건을 사용해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측면에선 작가와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물론 띄어쓰기 안한 글자(친구가 소스코드를 가르키며 한 말입니다)를 타이핑하며 예술혼 어쩌고 생각하면 우습죠.
제가 일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완제품'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프리랜서가 아니고, 컨설팅을 하지 않으며, 기업용이나 사내용 업무를 하지 않고, 연구소에서 실험용 코드를 작성하지도 않고, 뱅킹과 같이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를 관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평생에 걸쳐 - 라는 말을 쓸 정도로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 제 영혼을 갉아 먹을 수 있는,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하여 굉장히 조심해 왔습니다. 무한히 복제되어 판매되는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용 제품을 만들기 때문에, 저는 아주 작은 기능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계약관계에 의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는걸 아주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마음에 드는 부분은 사용자와의 피드백입니다. 사용자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것은 꽤 스릴있는 일입니다. 찬사를 받을 때도 있지만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아주 가끔은 '니가 만든 환상적인 이 제품에 비해 가격이 턱 없이 싸기 때문에 나는 그냥 두번 구매했다. 잘 먹고 잘 살아서 계속 만들어라' 라는 메일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평 불만으로 가득찬 버그 레포트들도 종종 날라와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죠. (사실은 매일, 아주 잘, 잡니다) 역사에 남을 명저인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심리학'에서 저자는 자신의 코드에 대해 에고리스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버그들을 종종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결함으로 생각 되기도 하기 때문에 - '아니 어떻게 이런 멍청한 실수를 했지?' - 저도 에고리스를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드백의 또 다른 문제는 커밋먼트인데요. <불특정 다수의 유저>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운영을 하기 위해선 유저들의 요구사항을 아주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우스를 인용하면 '모든 사용자는 거짓말을 한다!') 기업에 있을때는 대부분의 대답을 긍정적으로 하게 되지만 이 일에선 '거부'를 먼저 익히게 됩니다. 절대로 기능이나 기한에 대한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 천만원이나 수 억원의 계약금을 받고 특정한 요구 사항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기능을' 만든다는 것을 사용자들에게 어느정도 훈련시켜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메일을 확인하고, 그 후에 홈페이지 사용자 포럼의 새 글들을 확인하는 것은 매일 반복하면서도 다소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포럼에서 이 글을 보게 된 것은 일주일 쯤 전의 일이네요. 보통 포럼에는 메일보다 사적인 이야기를 거른채 ('난 어떤 사람인데 어떤 연유로 이걸 구매했다' 라는 식의) 요청이나 문제가 올라오기 때문에 장문의 글을 보기는 쉽지 않은 편이라 한 화면을 가득 채웠던 이 글은 꽤 귀찮게 느껴졌죠. 동업자에게 넘길까 생각을 하기도 했고. 아마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오타가 많았기 때문에 더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긴 설명은 다 이 글을 소개하기 위해서, 제 상황을 이해시켜드리기 위함이였습니다. 그 글에 오타가 많은 이유가 있었죠. 아주 거칠게 번역해 보겠습니다.
(이해하시겠지만 온라인상에서의 평판은 제 일의 거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전 실명세계와 익명세계를 섞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 이름은 '프래니'로 이 사용자가 말하는 제품 이름은 '주이'로 칭할께요.)
'친애하는 프래니 여러분께,
저는 크리스토퍼라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소프트웨어를 다운받기 전까지 저는 아주 괴롭고 답답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저는 맥을 사용하다가 최근 쿼드코어 VAIO 랩탑을 구매해 윈도우즈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Dragon Naturally Speaking Professional 11을 사용하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여러가지 신체적인 문제가 있어 타이핑을 오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600달러를 투자하여 저 구술 소프트웨어를 구매하였고 이제 손이 아닌 말을 통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에디: 저도 잘 모르지만 Dragon Naturally Speaking라는 프로그램은 아마 사용자가 말을 하면 컴퓨터 화면에 그것이 표시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Dragon Pro와 완벽하게 호환되는 - 알고보니 '호환된다' 정도가 아니더군요 - 당신들의 '주이'를 발견 했습니다. 저는 1분에 120개 이상의 단어를 말할 수 있는데 '주이'의 교정 시스템은 아무런 흠 없이 동작합니다. 심지어 토픽이나 태그 그리고 '주이'의 모든 기능을 저의 입을 통해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이'가 이 최고의 구술 소프트웨어와 호환되기 위하여 당신들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단순하게 최고의 코더들을 데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쨋거나 이 '주이'는 조용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제 인생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만약 당신들이 나처럼 신체적인 장애가 있다면 최고의 타이피스트보다 빠르게 구술로서 컨텐트를 작성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훌륭한 프로그램에 대한 보상으로, 당신들이 제 홈페이지에 두드러지게 홍보할 만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만약 없다면 이참에 만들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프래니 회사의 로고를 제 홈페이지에 표시해도 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전 Dragon을 사용하는 장애인들에게 (문자 그대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이'를 알리기 위해 아주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주이' 를 구매하도록 설득시킨 사람들은 저에게 설득 당했다는 노트를 남길 것입니다. Dragon 사용자들이 당신들이 우아하게 제공한 기능들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처럼, 당신들도 분명하게 이러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중략. 여기부터는 어떤 기능이 있으면 좋다고 디테일한 설명이 있기 때문에 생략해도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Best Regards - and thanks again for creating such great software!'
저의 놀라움과 기쁨을 짐작하실 수 있으신지 모르겠군요. 사실 정말로 놀라운 점은, 괄호안에 제가 언급한 것 처럼, 전 Dragon Naturally Speaking이란 프로그램의 존재를 이 글을 통해 처음 알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완전하게는 모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크리스토퍼씨의 예상과 달리 이 장애인을 위한 구술 소프트웨어와 제 프로그램이 잘 동작하기 위해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연'이라는 낭만적인 단어를 끌어 올 수는 없습니다. 짐작컨데 드래곤이라는 프로그램은 굉장히 똑똑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주이'의 여러가지 인터페이스들을 인식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어떠한 특징 때문에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지 기술적인 디테일을 설명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면 제가 빅뱅이론의 셸든 쿠퍼 같이 보일테니 넘어가기로 하죠. 아마 드래곤은 대부분의 윈도우 프로그램을 5~80% 정도는 말을 통해 컨트롤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마 다른 프로그램들과 달리 '주이'의 모든 기능이 완벽하게 동작한다는것은 상당한 우연과 운이 작용한 것 같네요.
당연한 일이지만 저는 이 글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크리스토퍼씨에게 보낼 메일의 내용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몇 일 전에 '주이'의 미래에 대한 한 가지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이'는 벌써 1년째 업데이트가 없습니다. 새로운 메이저 업데이트가 필요할 시기가 오고 있죠. 그런데 저는 '주이'를 만드는데 사용된 기술적인 거의 모든 것을 갈아엎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대체될 기술은 아마 Dragon Naturally Speacking과 호환이 되지 않을 것이어서 (어디서 많이 듣던 문장들이죠? 윈도우 비스타나 iOS2에서 iOS3로 넘어갈 때도 들었던 말들이군요. 긱Geek들은 언제나 호환성을 내다 버리고 싶어한답니다. 양복쟁이Suit들이 말려주어야 하는데 저에겐 말려줄 양복쟁이가 없네요.) 크리스토퍼씨와 그의 장애인 친구들은 새로운 '주이'를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이'에 사용된 기존 기술은 상당히 갈라파고스화 되어서 저는 점점 '주이'에 대한 개선을 생각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말했던가요? '거부'를 먼저 익혀야 한다고. 저는 지금 제가 느낀 기쁨을 돌려 줄 수 있는 문장들을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