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보고 나서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이메일을 안지우기 시작했을까? 난 근 5년동안은 메일을 지워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지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동으로 지워지는 일도 이젠 없다. 이제 메일을 '지운다'라는건 굉장히 적극적인 의사표현이다. 내 메일함에 계속, 영원히 담고 싶지 않은 확실한 거부.
한때는 메일을 보관할 수 있는 용량이 적었거나, 보관기간이란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메일은 지우거나 지워지는 것이었다. 혹은 메일 프로그램을 쓰면 메일을 전부 가지고 와서, 인터넷 서버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지만 내 컴퓨터에만 저장되 있다는건 언젠가는 100% 확률로 유실된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 내가 주고 받는 이메일이 내가 죽을때까지 지니고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아주 높은 확률로 확신할 수 있지만, 과거 한때, 3~5년정도의 메일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없어졌다.
그것에 아주 애절한 사연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 사실을 떠올리면 인생에서 작은 일부분이 상실된 거 같은 기분이든다. 나만 이런 사람은 아닐 것이다.
새벽 4,5시쯤 책의 중간쯤에서 한번 덮어버렸다. 이 책을 더 이상 보지 않는게 좋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결말이 특별히 궁금하진 않았다. 이 책을 어느정도 심드렁하게 보거나 독특한 형식의 연애 이야기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책의 저자가 가장 정조준한 타입(의 남성)이 있다면 난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레이케에겐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고 나와 확실히 다르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많지만, 가끔은 내가 오해 받는 부분이 그와 비슷하게 보이는것들이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나도 어느정도는(!) 섹스보다 메일을 원할때(!)도 있는 사람이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은 모두 언젠든지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난 1년중 대부분 제정신이고 이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수다를 환영하고, 멜랑콜리나 우울증과도 거리가 상당히 멀고, 술을 마시는 등으로 해서 '오프라인'이 되는 일도 없다.
이들과 같이 순전히 메일로부터 시작하진 않았지만 내가 한 연애는 모두 상당한 양의 메일들을 동반된 것들이었다. 가끔은 우리가 특정 시기에 메일을 주고 받지 않았더라도 관계가 발전했을까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연인에서 친구관계로 남은 몇몇(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두명이어서, 다행이다)은 여전히 나에게 남은 여생동안 충분히 기억할만하고 인간적인 애정이 듬뿍 담긴 메일들을 보내주는데 그것들을 시시때때로 내 머릿속에서 메아리차고 나와 대화를 한다.
반대로 책을 읽고 나서 그 관점에서 생각해보니, 나와 잘 진행이 안된 관계들은 모두 메일을 주고 받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적어도 내 마음한켠에 그런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음. 쓰고 보니 이건 상당히 무례한 비약인것 같지만.
그래서 난, 음 에미 로트너 식으로 말해보자면
1) 난 이 이야기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는 수준을 넘어, 이와 같은 일을 내 미래에서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다. (비포선라이즈는 자신있게 부정할 수 있다!) 그래서 뭔가 몰라도 될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이 약간은 무섭다.
2) 에미와 레오가 주고 받은 메일들은, 너무 많은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오늘 머릿속으로 떠올린 사람수는 적지 않으며, 사라진 메일의 내용들을 복기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지금 메일함에 있는 비사무적이고 비상업적인 메일들을 모조리 다시 읽을까하는 미친짓을 고려하기도 했다.
3) 그래서 돌아가고 싶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넘어가고 싶다.
4) 근데 난 후버카페 이야기가 나올 때 까지 에미 로트너가 예쁜 사람일 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라이케의 지적질을 보고 다시 읽었음에도 난 그걸 모르겠는데, 왜지? 이들이 독일인이라 그럴까?